“조서방네 사각모자가 부러우냐, 전서방네 돈이 부러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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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방네 사각모자가 부러우냐, 전서방네 돈이 부러우냐?”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5.0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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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3>

 집이 흙집이라 여름에는 시원해. 150년 됐지. 우리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여. 다 부수고 남아 있어도 이 기둥이 통나무로 사각네모지게 깍아서 했는디 우리집만 옛날거 그대로여. 이 밑에는 다 썪었어. 요기꺼정 방이여. 옛날에 여그가 주방이여. 조그가 아래 윗방이구. 요기서부터 조기까지 큰 마루였어. 내가 시집 와서 얼마 안 돼 가지구 단을 냈어. 옛날엔 암것두 아니었어. 저것두 시방 한 50년 넘게 됐네. 사람 안 살믄 금방 무너져. 여기서 아들들이라도 와서 살거믄 집 짓는데 그때는 7,8천만 원이면 졌지. 한 30평. 그런데 그렇게 지으면 여기 누가 와서 살어. 다 홍성서 기반 잡아갔구서 사는디. 안 와 살어. 우리 두 늙은이 살다가 가는 거지. 우리 할아버지 내 생일 때는 우리 집에 다 못 와. 큰 아들네 가지, 넓응께.  

사로 제대했어. 어려웠었지. 제주도 모슬포에서 훈련받고 전방 배치 받아야 하는데 훈련 도중에 휴전이 됐어. 상이용사도 1개월 부족해서 해당이 안 돼. 내가. 1개월 전에만 들어갔어도 상이용사가 되는데. 군번이 내가 94군번이거든. 모슬포에서 나와 전방 저 백암사 26사단 창설하는 사단에 배치됐어. 거기서 고생 지지리 했어. 그냥. 뭐 집이 있나? 천막 같은 것두 그냥 대금이라면 알라나? 큰 총. 하나하나 총알 장전해서 이렇게 댕겨가지구 쏘는 거, 그 대금 가지구서 소나무 벼가지고 막사를 졌어. 겨울에. 연장이 뭐가 있어. 곡괭이로 벙어리 장갑 그거 끼고 흙 개갔고 벽에다 붙이면 붙긴 붙어. 거기서 100개월 이상 있었지. 여그서 나서 여그서 큰 거여. 본토백이여. 나가구 싶은 맴도 있었지만 내 주제에 가진 것두 읎구 뭐가 있었깐? 나갈 생각두 못 허구. 농사터두 읎었어.

나 8살 먹어 아버지 돌아가시구 고모님이랑 어머님이랑 살았지. 어머니가 길쌈 해 가지구 솜씨가 좋았어. 우리 어머니가 바느질해서 옷 같은 거 꼬매서 품삯해서 날 킨 거여. 우리가 4남맨데 밑에가 누이동상, 남동상은 죽고, 장남이닝께 여그서 살지. 제대하면서 퇴직금 타 가지구 홍성서 법원 있잖어. 거기 땅을 엄청 샀지. 그 때는 시골 땅이 더 비쌌어. 여긴 엄청 비쌌지. 홍성 변두리 땅이 더 쌌지. 그렇게 애들 가르치고 소 맥이고 우리 큰 아들은 우리 어매 아배가 다 땅 사줘서 집 지은거여.

보건소서 쫄병 시절부터 올라간거여. 그래 소장 해먹는겨. 일본말로 다다께라고 해. 보건 계통이라면 환하지. 잔치했지. 플랜카드 써 붙이고 야단했지. 조용희라고 조용히 일하고 살아라 그런 뜻으로 해준거야. 그래 조용해. 넘에다 해꼬지 않고 베풀면서. 어디 가서 금품 하나 먹지 말고 베풀어 그랬어. 지금도 베풀어 걔가. 어지간한 사람 다 알어. 우리 며느리가 고생했지. 왜냐면 우리 아들은 헙헙해서 봉급 타면 읎어. 지금도. 며느리가 벌어 살림한당께. 목욕탕 같은데 가믄 에구 조용희 소장은 으찌 다 신경써서 잘 하신다구 그라는디 듣기가 좋더라구.

 그가 예전에 조서방네가 많았어. 지금은 나하고 둘 남았어. 전서방들은 돈이 많았어. 조서방네는 가리키기만 했구. 그래서 사람들이 그랴. 조서방네 사각모자가 부러우냐, 전서방네 돈이 부러우냐. 그러믄 사각모자가 부럽다고 한겨. 노인네들이 그러더라구. 우리네는 땅이 부러운 게 아니라 사각모자가 부럽다구. 그 때는 배운 사람들이 읎었거든. 필적이 좋아서 군대에서 사무관 있었어. 차트 같은 거 쓰고 그랬지.  지금은 다 소용읎어. 다 꾸불꾸불해가지구. 왜정 때 졸업했거든. 제일국민핵교 다니다 여그 구항초 생기면서 여그서 1년 다니다 졸업했지. 그러니께 6학년 적에 해방이 된 겨. 한글은 그 때만 해두 배우지 않구 가 기초는 지대로 배운 거지. 일본말만 배우고. 이제는 다 잊어버렸어. 정신이 읎어가지구 기억도 안 나. 늙으면 소용읎어. 눈 어둡지. 귀 어둡지. 천치 바보 되는겨. 지청구만 먹구. 물어봐도 안 혀.

왜정 때는 가난이 이루 말할 수 읎었어. 콩깨묵 그런 거 배급 나와서 그거 먹구 콩 누른 거, 씁쓰름하고 맛대가리 하나 없는 그런 거 먹고 살았어. 일본 놈헌테 다 바쳤어. 공출해서 뺏어가구. 그릇두 하나 읎었어. 가마니 지어서 내가구. 부잣집서 쌀을 한 가마 얻거든 그러믄 가을 가서 두 가마 갚아여 혀. 그러니까 없는 사람 싹 죽어버린거여. 곱장이라는 거여. 부자는 노상 부자 되는겨. 나도 오래 몇 년 얻어 묵었어. 것두 아무나 주간? 갚을 능력을 보구 주지. 일을 열 개씩 했어. 나뿐 아니라 옛날 어른들 고생 지지리혔어. 기억만 하는거야. 얼굴은 다 기억 나. 마을 살았던.

군대 있을 적 양구에서 만났지. 처남 되는 사람이 나하고 군대 생활을 같이 했지. 누이동생 있다고. 그래 내나 줘. 그래 연결돼갔구 결혼했지. 와서 고생 많이 혔어. 미안하구 말구. 뭐 나오는 거 읎어. 노령연금 둘이 32만 원. 달랑 그거여. 넘들은 국민연금도 타는데 난 미련해서 먹구 사느라 그런 거 하나 읎어. 아들이 쪼끔씩 줘. 그 놈으루 생활하는 거여. 그러니께 살지. 걱정은 읎어.
 

조성준·김인규 부부 1933년생, 1938년생으로 김인규 씨 오빠의 소개로 인연을 맺어 61년이라는 시간 동안 부부로서의 연을 맺으며 살고 있다.

가 막내딸로 광천서 아무것두 할 줄 모르구 시집을 왔는디 우리 시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서 보리쌀 절구통에 쪄 먹던 시절이여. 다 해주고, 우리 할아버진 그 때 군대 가 있응께. 우리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보다 더 정 들었어. 내 손길이 어려서부터 고왔어. 우리 오라버니들이 세숫물까지 방에다 떠다놓구서 일어나 씻으라구. 동네 사람들이 나 시집 간다고 허니께 우리 조카딸 점등이 고모 그 촌에 가서 살믄 내 열 손가락 장 지진다고 했어.

시집을 왔는디 동네 사람들이 새댁 구경 와 가지구 에구, 아씨 손길 보니께 마님 저 손길로 밥 못 얻어 잡수겄다구 그랬댜. 나 그땐 구항 미인 들어왔다구 그랬어. 내가 시집온 지 꼭 61년 됐어. 61년 전이면 아, 이 사람아, 하늘만 빼놓구 다 변했어. 비 올라믄 옛날에 탄차 있잖아? 기차가 뽁~소리 내고 가믄 광천서 서울 올라가는 그 소리가 여기 은은하게 들리더라구. 맨날 친정만 가구 싶지. 신랑이나 집에 있나.

우리 그 땐 광천 참 좋았네. 4일, 9일이 광천장이여. 광천 독배로 시집 못 간 내 년 팔자야, 그런 노래가 있었어. 천북이구 저런데 갯벌에서 댕기는 처녀들이 댕기 주렁주렁 따고 갯것 이구 광천까지 몇 십리 걸어서 오믄 우리덜이 같은 또랜데도 휘파람 불고 그렇게 우리가 드셌어. 내가 덕명핵교 나왔어. 우리덜 시집가구 나니께 그러더랴. 옛날 느덜 선배 언니들에 비하믄 니덜은 암것두 아니라구. 우린 그 때 저녁에 뫠 앉아서 십자수 하고 고구마 같은 거 서리해다가 그 때는 하나 걸리지 않구 콩 같은 거 솥에다 쪄서 먹구 그래두 도둑놈이라고 안 했지. 웃고 살고 재밌게 한겨.   

옛날에 여기가 다 논 다랑이였어. 둑에 새파랗게 쑥이 올라오믄 시어머니랑 나랑 맨날 앞치마 두르고 쑥 뜯어가지구 삶아가지구 나는 헐 줄 모릉께 방앗간이나 있다나? 맷돌에 보리쌀을 갈어. 가루가 나올 거 아녀? 그러면 그 눔을 절구통에 넣고 쑥 넣구 싹싹 쪄. 그럼 그게 개떡이여. 다 어렵지. 밭 매는 것두 어렵고, 뭐 하는 것두 어렵구. 일이란 건 다 봬가지고 해야 하는디 넘들은 일하고 와서 밥을 한 사발씩 먹구 배가 고프다는데 나는 일하고 나믄 밥을 더 못 먹어. 힘들어서. 지금까지두 그게 나는 뼈에 안 백였어. 지금은 농사 안 허구 다 내놔서 그렇지. 그렇게 이제 다 살만하구 그렁께 내가 떡 병 들은겨. 2015년 3년 돼었어. 췌장암. 수술 다 허구 처치실 간 겨. 우리 아덜이 나 귀에다 대고 엄마, 숨 크게 들이쉬고 내미쉬고 그렇게 세 네 번 하라구. 그 소리에 내가 막 숨은 안 쉬어지는데 산소호흡기 달고 숨을 쉬었지. 그 이튿날 입원실 올라가서 산 겨. 그래 이 날 이때까지 맨날 병원 다니네. 의사가 요대로만 유지하면 뭐 할 거 읎다. 그래. 기분좋게. 그래, 그렇게 했네.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하는 동안 한 이불을 덮고 살아오신 노부부의 그 속내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지지리도 고생혔다는 말씀을 수도 없이 반복하시는 아버님, 어머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 어려운 시절을 다 보내고 편하게 사셔야 하는데 몸이 아프시다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덩달아 걱정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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