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해서 남은 건 등 굽은 거 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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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해서 남은 건 등 굽은 거 밖에 없네요”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6.0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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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5>
장재연 1929년생으로 서부면 판교마을에서 태어나 20살에 은하면 대천리로 시집 와 평생 바느질을 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다.

리 집 양반이 66살에 돌아가셨어요. 돈 한 푼 벌어주는 거 한 번 못 보고 호미 들고 일하는 거 한 번 못 보고, 그저 논다네. 친구들하고 고스톱 치고 맛있는 거 먹으러나 다니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서 항상 원망했어요. 세상 왜 그렇게 사나. 그러커구 애들 가르킬러니께 가난했거든, 돈이 있어야지. 내가 시집 오니께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상 나 그렇게 17식구가 한 집에서 살았어. 저기서. 그래두 방이 4개니까 좁을 줄 모르고 고생한 줄 모르고 그게 사는 건줄 알고 살았지.

어른들 귀염 받는 재미로 어려운 거 모르고 살았어요. 그리고 우리 시누들이 지금도 동네서도 다 일러. 저 집 시누 같은 사람 없다고. 다섯 시누들 농이니 이불이니 다 내가 벌어서 시집  보냈어요. 시누들이 얼매나 올케 자랑을 하는지 동네 사람이 그랬대. 올케 좀 꿔 달라고. 그러커구 사는디 가난하니까 다듬이질하고 바느질이야. 17식구 바느질할러니 한복 전문가가 됐어요. 그래서 서울 고려대핵교 경동시장에 가서 한복 바느질을 해갔고 애들을 다 서울로 전학시켜서 거기서 대학 가리키고 공부시켰어. 우리 집 양반 용돈 대 줘가면서.

서울에 내 마흔 살에 갔다가 쉰 살에 내려왔어요. 왜 내려왔냐믄 우리 시어머니가 늙으셨어. 그래 시어머니가 “오너라.” 그러셔요. 애들도 크니까 집에 내려가라 싸태유? 딸도 고등핵교 졸업하고 직장 잡았구 딸이 그러대. “엄마, 홍기하고 그냥 자취 생활할게. 할머니가 너무 힘들어하니 엄마 그만 집에 가지?” 그래서 집에 내려왔어요.

그 때 서울서 넘의 한복집에 일 해주고 와리 먹었지. 그 사람이 일을 가져오면 그 집에서 바느질해서 그 사람은 6할 먹고 나는 4할 먹고. 그러다가 나보고 인수하라고 해서 인수했지. 바느질이 넘 쌓여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어요. 한복집 처분하고 여기 와서 또 바느질했지. 광천 가게에서, 그것두 감당 못하게 대 줘. 두루마기는 하루 3벌, 한복은 두 벌씩 했어요. 가난한데도 바느질해서 애들 가리키구, 살림 일구고, 그대로 그대로 살은거여. 내 환갑 적에 시누 다섯, 동생, 내가 그 때 기념으로 한복 다 해 입혔어요. 저 집에서 이 집으로 이사올려고 보니께 애들 두루마기며 한복이 다 우리 집에 가 있드라구. 그래서 내가 끄내서 보니까 너무 잘 꼬맸어. 아, 내가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작년까지도 수의 꼬맸어요. 그러니까 등이 굽었잖아요. 바느질해서 남은 건 등 굽은 거 밖에 안 남았네요.
 

친정아버지이며 홍성의 독립운동가인 장용갑(1911~1986) 선생. 사진은 친정어머니 환갑잔치 때 모습.

리 아버지가 옛날에 머리가 좋으셔서 홍성 공업핵교 지금 의료원 자리가 공업핵교 자리래요. 지금 공업핵교가 대전의 한밭핵교가 됐대요. 광산과를 나오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사상이 달라요. 남들보다 유달리 앞서 가. 두루마기 해다 드리면 옷고름 떼고 단추 달고, 거리적거린다고 차 탈라믄. 바지두 괴아리를 매, 흘른다고. 공업핵교 다니실 때 독립운동 하신다고 그렇게 해서는 왜놈들한테 요찰인물로 찍혔어요. 감방에는 한 달에 세 번도 가셨어요. 사상 문제로. 광산은 경상도로, 전라도로, 충북으로 강원도로 금광이라면 금광 다, 왜놈들이 오래도 못 둬. 거기서 뭐 조직하는가 봐, 인부들하고. 얼마 안 있다가 다른 데로 전근시키고 워낙 똑똑허셨으니께.

내가 아홉 살에 아버지 따라 경상도로 갔어요. 어머니랑. 경상도 이반성 국민핵교 그 때는 소핵교 1학년에 입학했어요. 거기서 입학해서 쪼끔 대니다가 또 목포로 왔어. 그러다 돌산으로 갔어. 또 함안으로 갔어. 2학년 때 결성으로 전학 왔어요. 그 때 다섯 번째 전학을 왔어요. 큰집에서 나는 인저 따라다니기 싫어 있구 아버지만 어머니하구 충북으로 강원도로 돈 벌으셨지요.

우리 아버지가 공업핵교 다니실 적에 걸어다닝겨 보니께 냇가에서 발을 씻다 보니까 흙이 졸졸졸 흘러 내려오드래. 그러니께 흙의 줄기를 따라 올라갔어유. 따라 올라간 것이 금곡리여. 여기 금곡리 구탱이. 거기 멈춰 보니 흑연 줄기가 있더래유. 상공부에다 출현을 했어. 돈이 있어야 그걸 채광을 하지. 그러니께 돌아다녀서 돈을 벌어가지구서는 인저 왜놈 말기 때여. 여기서 채광을 해가지구서는 일본으로 수출을 했어. 그러다가 일본이 망했잖아. 그러니 어디 팔 데가 없으니까 그 광을 팔았어유. 그래가구 그냥 살은 거지 뭐.

또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긴급조치로 서대문 교도소에 갔어요. 아버지가 바른 말을 잘 하셨거든. 버스를 타고 가는데 누가 양반 쌍놈을 찾드래. 그러니께 지금 세상에 양반이 어딨느냐, 베짱도 없는 세상이다. 박정희는 양반이어서 대통령 됐느냐, 뭐 이런 말씀을 하셨대. 누가 그걸 경찰에 고발을 했어. 박정희를 비판했다구. 그러니께는 죄는 맨들면 되더구먼. 그래가지구서는 고생 많이 하셨지유. 아마 독립운동금도 보냈을 거에요. 돈은 많이 벌었어도 남은 것이 없어요. 당신이 다 쓰고 가셨어.

면회 다니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어머니가 인절미를 해서 변또에 하나 싸주믄 길거리에서 만나 줘여. 그 눔을 가지고 면회를 가지. 길으면 열흘, 짧으면 오일, 일주일이면 석방시키는거야. 한 삼일 있으믄 또 데려가. 우리 아버지가 이 노래를 허요. ‘아버지는 배를 타고 강남 가시고, 어머니는 병이 들어 누워계시고, 오빠는 병정 나가서 소식이 없고, 어린 동생 젖 달라고 누워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구나~’ 우리 아버지가 지은 노래야.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내가 친정에 자꾸 댕겼지. 어머니가 너희 아버지 돌아가실라구 그런다 그래. 뭐 그 때 차가 있었나, 걸어서 가닝께 “나 지금 죽으면 안 된다. 헐 일이 남았다.” 그러시는겨. 더 살아야 한 대. 죽에다가 계란을 풀어가지고 오래. 영양 보충한다고. 그러커구서는 갖다 드리니까 당신이 뜨다가 수저가 못 올라가요. 그래 어머니가 떠서 이렇게 드리니까 두세 수저 드시더니 못 잡순다고 허구 눕더니 돌아가시더라고. 돌아가시는 걸 봤는데 그렇게 흐느껴 우시드라구. 당신 한이 맺혀서 그러는 거 같아서 진짜 눈물 났어. 진짜 가슴 아프게 울었어. 우리 동생이 장재설이라고 지금 서울서 아버지 독립운동가로 어떻게 운동을 하는디 쉽지가 않은가봐. 아버지 산소에 독립운동기념비 세워주는 게 그 사람 원이여.
 

결혼 직후 20대 초반에 마을에서 짝은 사진.

리 시대에 고생 안 한 사람 없어요. 그러구 사는 길이 이거다 허구서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살았는데 넘들은 고생했네 어쨌네 그러믄 누구를 위해 고생했는겨? 내 해 먹고 사느라 고생했지. 시누 다섯 다 내가 여웠어요. 그렇게도 나 고생했단 소리 입 밖으로 내덜 안 혀유. 애들 보구두 나 고생했다 힘들었단 소리 한마디 않거든? 그래두 그걸 알아주는지 애들이 열심히 살아주는 거 고맙고 엄마한테 잘해주는 거 고맙고. 이 양반하고 결혼해갔고 양말 한 짝, 화장품 하나 사주는 꼴을 못 봤어요. 내가 벌어서 뒤바라지만 했지. 그러커구 돌아가시구서도 원망했죠. 내가 싸우기라도 했음 미운 정이라도 있지. 입다툼 한 번 안 해봤거든. 돌아가신 날 아침, 내가 한복하느라구 서울로 비단 끊으러갔는데 문 닫고는 “잘 댕겨와유” 그래요. 갔다오니까 돌아가셨어요. 차 사고로. 내가 넘들 보고 그랬어요. 난 후회는 없다. 잘못했다는 후회는 없고 아쉬움은 있어도. 동네서도 다 알고. 이 양반이 가시구서 지금 와서는 효도를 나 혼자 받잖아요.

애들 4남매가 출세하고 부자 된 놈은 없어도 열심히 살아주니께 고맙게 생각하지 항상. 꼭대기서 산다고 집 지줬지, 응달에 산다고 이 집 지줬지. 가전제품도 다 좋은 거루다 들여다 주고, 이렇게 살게 허니께 내가 겁나게 행복감을 느끼더라구요. 아, 내가 이렇게 행복감을 느끼면 90이구 지금쯤이면 복 있겄다, 쪼끔 더 살으나 이런 때 죽으면 복 있단 소리 듣겄다구. 그러믄 아들이 “어머니 그럴수록 더 살아야허유” 그래요. 더 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지금 가도 아쉬움은 없어요. 후회도. 우리 친정어머니가 아흔 일곱 살에 돌아가셨어요. 아침 잡숫는데 막내아들이 모셨어. 밥을 뜨니까 젓가락이 굴젓으로 가드래. 며느리가 놔 드렸대. 그 눔을 먹고 또 밥을 뜨드랴. 굴젓을 놔 드리니까 그냥 쓰러지더래유. “어머니 왜 이러냐구” 안구서 차로 병원에 갔는데 중간에 돌아가셨어요. 밥 잡순 시간하고 돌아가신 시간하고 10분도 안 된대유. 그래 내가 우리 애들 보구서 “너무 오래 살아서 짐 되는 거 같다” 그러믄 “외할머니처럼만 살면 돼유” 그래요.

그 양반하고 살 때도 존댓말 썼어요. 그 양반이 존댓말 하는데 내가 어떻게 반말해. 그리고 어른들 앞에서 반말 못해요. 나는 지금도 나이가 칠십이 넘은 사람은 존댓말 쓰지. 자네라고 안 해요. 잘 가요, 좋잖아? 나도 괜찮고 듣는 사람도 괜찮을 거에요.
 

"지팡이를 탁탁 치며 걸으시는 어머니는 마치 작은 산 같습니다. 든든한 가림막이 돼주고, 그늘을 내어 주고, 먹을거리를 지어주십니다. 평생 당신이 있어 외롭지 않고 평안했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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