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 한내돌다리, 보령~남포 잇던 한양 길목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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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 한내돌다리, 보령~남포 잇던 한양 길목 돌다리
  • 취재=한기원 기자/사진·사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6.2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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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다리에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찾다<1>
보령의 대천천 둔치에 있는 17세기에 만들어진 한내돌다리 모습.

우리나라 최초의 교량은 413년 완성한 평양주대교, 위치는 미상
현대의 교량, 인간 공동체 생명선의 의미를 갖게 돼 중요성 강조
한내돌다리, 보령현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교통요지 대천천 돌다리


교량(橋梁)은 하천 계곡 또는 해협 등을 횡단하거나 도로를 연결할 때 그 통로를 위해 축조된 구조물이다. 그러나 교량은 물리적 축조물로서 연결통로지만 그 의미는 간단치가 않다. 작게 보아 교량은 지역 간 인적·물적 교류의 통로다. 여기에 우리 조상들은 또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이데아의 통로를 다리(교량)로 그려냈다. 교량에 대해 ‘경주(經註)’에서는 거마가 통행할 수 있는 다리를 교(橋)라하고, 사람이 많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다리를 량(粱)이라 했다. 인류 초기의 교량은 유랑인들이 이동하는 도중에 계곡 건너편으로 이동하거나 건너편의 동물을 잡으려는 통로였다. 이 시기는 계곡에 넘어져 있는 통나무를 이용하는 등의 단순 형태의 다리에서 점차 인간의 문명이 발달해 수레나 마차의 통과가 필요하게 됐다. 문헌으로 보면 진보된 기술과 형식을 갖춘 다리로는 3국 시대부터 건설된 것으로 유추된다. 현재에 남아있는 옛 교량은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기능적인 요소 외에 조상들의 정신적인 의미를 가진 설화와 전설이 깃들인 교량들이 있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교량 공사는 413년 완성한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로 그 위치는 미상이나 그 당시로서는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됐던 것으로 전한다. 현대에 있어 교량은 인간 공동체의 생명선의 의미를 갖게 됐고, 그 중요성은 더욱 더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교량은 사람과 차의 통행뿐만 아니라 상하수도관, 각종 케이블의 통과,   문화의 교류 등 인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해 인류의 역사와 같이 할 것이다. 이렇듯 설화와 전설이 담겨있는 다리들 중에서 특히 충남지역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돌다리에서 역사문화적 가치와 의미를 찾아봐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 17세기에 만들어진 대천 한내돌다리
충남 유형문화재 제139호인 대천 한내돌다리는 충남 보령시 동대동 809-1번지 대천천 둔치에 복원 정비돼 있다. 오서산(鳥棲山)과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發源)해 서남향으로 대천시내를 관통해 서해로 들어가는 길이 18km의 대천천(大川川)하류에 있었던 다리다. 조선시대 남포(藍浦)·비인(庇仁)·서천지역의 한양 길목 12간(間) 돌다리이며, 남포와 보령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대천천은 대천의 서부 해안평야를 가로질러 감으로 옛날에는 두 지역의 교통에 커다란 방해가 됐던 강이다.

한내돌다리 “옛날 남포 비인방면에서 보령현을 거쳐 한양으로 통하는 교통요지인 대천천 하류(현 대천철교 위 방향 50m)에 놓였던 돌다리로 일제시대 초기까지 주 교통로로 이용됐다. 다리의 규모는 폭 2.38m, 길이 50여m로 12경간으로 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리의 구조는 1.5~2.0m정도의 자연석 지대석을 묻고 그 위에 다듬은 받침돌 3단을 횡으로 쌓아 다리 기둥과 멍에를 대신 한 다음 그 위에 길이 3.0~4.5m, 폭 70~90cm, 두께 30~40cm 정도의 다듬은 시렁돌 3개를 얹어 다리 바닥을 구성했다. 바닥이 3개의 시렁돌로 이뤄져 우마차 통행에 적당하게 설계 된 단순하고 실용적인 다리이다. 석재는 거의 화강석으로 돼 있는데 석질로 보아 왕대산에서 채취해 큰 사리 때 뗏목으로 운반해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설치시기는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신안읍지 등에 언급돼 있는 것으로 봐 17세기 이전으로 보인다. 양식은 고려 원종 15년(1274)에 만들어진 함평 고막천 석교와 비슷하다. 1970년대 초까지 약 20m정도가 남아 있다가 붕괴돼 일부는 하천제방 석축으로 사용되고 일부는 1976년 7월 읍사무소로 옮겨 보존하다가 1992년 12월 이곳에 복원했다”고 한다.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은 거칠게 손질한 2~3개의 돌을 쌓았고,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돼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했는데, 원래는 12칸 돌다리라고 하나 적어도 22칸은 됐던 것으로 추측된다. 교각(橋脚)은 별다른 기초 없이 두께 30~40cm, 길이 60~300cm 정도의 거칠게 손질한 장대석(長臺石)을 2~3단 쌓았고, 그 위에 이것과 직각방향으로 길이 180~450cm 내외, 두께 35cm 정도의 장대석을 걸쳐서 답판(踏板)을 만들었다.


현재 남아있던 교각은 가장 높게 남아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하면 120cm인데, 이 위에 두께 35cm의 시렁 돌(다리의 바닥면에 깔았던 돌)을 얹으면 강바닥에서 약 145cm정도의 높이가 되기 때문에 해발 590cm 내외로 추정된다. 이 높이는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상류에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는 높이다. 보통 때도 교각이 물에 잠기는 아주 낮은 다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바닷물이 들어 올 때는 돌다리의 시렁 돌 위에까지 넘쳐 미끄럽고 위험했다”는 설명으로 볼 때 높이가 낮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교각의 거리는 135~500c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다리의 폭은 3개의 장대석으로 복원해 보면 170~220cm정도다. 또 한쪽에서는 잘 다듬은 사각기둥(140×57×59cm)이 있어 여러 차례 보수해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어느 때는 교각이나 다리의 난간 등에 사각기둥을 썼던 때도 있었던 듯하다. 지금은 그런 석재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2칸 돌다리라고 전해지지만 가장 긴 시렁 돌(454cm)을 기준으로 해도 다리의 칸수가 22칸은 돼야 하니 더 길었을 것으로 유추되는 대목이다.

17세기 기록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현의 남쪽 20리에 대천교(大川橋)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신안현지(新案縣誌, 1748)’나 ‘여지도서(輿地圖書, 1760)’에는 위치와 석교(石橋)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다리는 보령과 남포간의 빈번한 교통을 고려하면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돌다리는 17세기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판에는 “한내돌다리는 대천천 하류에 놓여있던 돌다리로 조선시대 남포현과 보령현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동국여지지·여지도서 등의 기록으로 보아 17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910년대 근대식 교량이 들어서면서 다리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1978년 허물어진 시렁돌 일부를 수습하고 1991년 매몰되었던 일부의 교각이 드러나 이곳에 옮겨 복원하였다. 해마다 ‘한내 돌다리 밟기’ 민속행사가 열린다”고 적고 있다.

지역주민 최병성 씨에 따르면 “이곳 보령에서는 해마다 향토문화축제가 열릴 때 12칸 돌다리밟기제(祭)와 돌다리 밟기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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