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군수 연암 박지원이 세운 건곤일초정과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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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군수 연암 박지원이 세운 건곤일초정과 돌다리
  • 취재=한기원 기자/사진·사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9.2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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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다리에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찾다<8>
면천 골정지의 건곤일초정에 놓여있는 돌다리.

연암 박지원의 애민사상을 기리기 위해 정자 ‘건곤일초정’ 복원
연꽃으로 가득한 골정지 연못에 초정(草亭)을 짓고 돌다리 놓아
면천향교의 유생들이 자주 머물며 시를 읊고 학문을 익혔던 곳
연암 박지원 1797년 면천군수 부임 골정지 정비 농업용수 사용


당진 면천의 면천향교 앞 저수지에는 볏집으로 지붕을 올린 정자가 하나 있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면천군수 시절 저수지 한 가운데에 축대를 쌓고 소박한 정자를 지었으며, 이름을 ‘건곤일초정(乾坤一艸亭)’이라 했다고 전해지는 정자다. 이 사실을 기려 지난 2006년 당진군에서는 1억6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저수지 안에 현재의 정자를 짓고 돌다리를 놓아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을 위한 민속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이 당시 면천군수로 재임하면서 세운 ‘건곤일초정’이 돌다리와 함께 복원된 것이다. ‘건곤일초정’은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있을 때 면천군 백성들의 고통 받는 삶을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농소초’와 ‘한민명전의’ 등 개혁정책에 관한 책들을 저술했는데, 이러한 박지원 군수의 애민사상을 기리기 위해 면천 성상리 3000여 평의 ‘골정지’ 연못에 인공 섬을 만들고 돌다리로 연결해 지은 10평 규모의 육각형 정자이다.

■ 건곤일초정, 일제강점기 소멸돼 복원
충남 당진 면천면 성상리 465의 ‘골정지(骨井池)’라는 연못 안에 세운 정자의 이름이 ‘건곤일초정 (乾坤一草亭)’이다. 본래 이 정자는 1800년(정조 24)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면천군수로 있을 때 세워졌다는 정자이다. 박지원은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해결하기 위해 ‘과농소초 (課農小抄)’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의 개혁정책에 관한 책들을 저술했는데, 이런 박지원의 애민사상을 기리기 위해 정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버려진 연못 한가운데에 돌을 쌓아 인공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정자를 지었는데, 인근 면천향교의 유생들이 이 정자를 찾아서 시를 읊고 학문을 익혔다고 전해진다. 이 정자는 일제강점기에 소멸됐으나 지난 2006년 당진군이 1억6000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복원했다. 연꽃으로 가득한 골정지(骨井池)라 불리는 약 9900m²의 연못에 예전처럼 인공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약 33m² 크기의 초정(草亭)을 지은 후 돌다리를 놓았다. 돌다리의 규모는 폭이 60㎝, 길이 220㎝, 두께가 40~60㎝ 정도의 화강석을 두 개씩 총 8개를 네 칸으로 ‘건곤일초정’과 연결되도록 놓았다.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란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초정’이라는 의미로, 두보의 시 구절에서 차용한 이름이라고 한다.

‘골정지’는 면천향교로 가는 길옆에 조그만 연못(주위 319m, 수심 3.3m)이 있는데 이곳이 면양읍지에 기록이 남아있는 골정지로 알려져 있다. 당시 북학을 주창한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쓴 아버지의 전기 ‘과정록’을 보면 “아버지는 술과 음식을 마련한 후 백성들을 모집해 연못을 준설하여 도랑물이 그곳으로 흐르도록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못은 물이 가득 모여 넘실거렸으며 가뭄에는 농사를 짓고 물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 시절에 쓴 ‘과농소초’에는 이 연못을 ‘언월지’라고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면천 골정지의 건곤일초정.


■ 실학자 박지원 면천군수 시절 건립
‘열하일기’로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1797년에 면천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군수로 면천에 3년간 머무르며 버려져 있던 지금의 골정지를 정비하고 농업용수로 쓰도록 했으며, 지금의 순성면 양유리의 ‘양제’도 준설했다. 이용후생의 기반 위에서 정덕이 실현된다고 보아 물질의 풍요로움을 긍정하고 기술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올 수단으로 생각해 벽돌과 기계사용을 강조해 온 박지원은 면천군수로 지내면서 마을의 곳곳을 정비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며 보고 겪은 내용을 수록한 ‘과정록’에서도 박지원의 면천군수 시절을 엿볼 수 있다. ‘면천군 남쪽에 양제라는 제방이 있었는데…(중략)… 장마를 겪으면 곧 허물어져 백성들이 피해를 보았다. 아버지는 부임하신 초기에 그곳에 가 이리저리 살펴보신 후 봇물이 터지는 원래의 수로를 막고 따로 제방 왼쪽의 바위가 많은 곳을 뚫어 물을 가두고 내보내는 수문으로 삼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골정지 가운데에는 작은 돌섬이 있다.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지내면서 연못에 인공 섬을 만들고 돌다리로 연결해 그 위에 ‘건곤일초정’을 지었다. 두보의 시에서 따왔다고 알려진 ‘건곤일초정’은 천지 사이의 한 초정이라는 뜻이다. 건곤일초정에 오르면 면천향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박지원이 옛 시절 유생들을 거느리고 정자에 올랐을 때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연못 가득 심어진 연꽃들이 만발하면 그 향기가 옛 선비들의 기품을 머금고 있을 듯하다. 이곳은 옛 부터 향교와 가깝고 주역의 태괘형상으로 되어 있어 향교 유생들이 자주 머물며 시를 읊고 학문을 익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소멸돼 그동안 저수지로만 활용돼 오던 것을 지난 1999년 주변을 정비하고 편의시설을 설치해 주민쉼터로 조성했다. 2000년 우연한 기회에 ‘과정록’을 접한 뒤 ‘건곤일초정’을 복원하게 됐다는 고경수 전 면천면장은 “관리가 되지 않아 황폐했던 곳이 이제는 주민과 관광객의 휴식처로 거듭나 면천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복원 당시에는 주춧돌과 다릿돌로 보이는 돌 몇 석만이 남아있어 그 위치와 문헌에 전해 내려오는 당시의 모습을 단서로 해 지금의 건곤일초정을 복원하고 돌다리를 놓았다”는 설명이다. “골정지에는 봄이면 벚꽃과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에서 연못에 핀 연꽃을 감상하러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말했다.

건곤일초정은 연암 박지원의 명성에 힘입어 건립 즉시 전국의 언론의 주목을 받아 면천과 박지원, 건곤일초정이라는 문화스토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 졌다는 설명이다.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건곤일초정이 등장한 것은 2000년 초, 과정록이라는 박종채(朴宗采1780~1838)의 책이 국역이 되고 나서다. 박종채는 박지원의 아들로 아버지 박지원의 행적을 기록한 과정록을 남겼는데 그 속에 박지원이 면천군수 시절 향교 앞 저수지에 대를 쌓고 초가지붕을 한 정자를 짓고 건곤일초정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이 나온 뒤로 면천과 박지원, 건곤일초정을 연결하는 논의가 일어났고 당진시는 현재의 정비된 모습의 저수지와 건곤일초정의 모습을 만들게 된다. 박지원이 면천군수를 역임 한 것은 맞고 향교 앞 저수지에 정자와 다리를 놓아 휴식의 공간으로 삼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자의 이름이 건곤일초정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다.

문제를 제기한 한학자 이청 씨는 “건곤일초정이 등장한 것은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가 아버지 박지원의 행적을 기록한 ‘과정록’을 남겼는데, 이 ‘과정록’에 저수지 가운데 정자를 ‘건곤일초정(乾坤一艸亭)’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하지만 박지원이 직접 친구 이태영에게 정자의 현판을 써 줄 것을 청하는 편지에 정자의 이름을 본인이 직접 ‘취옹희우우사정(醉翁喜雨又斯亭)’이라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 씨는 “건곤일초정이 언급된 박종채의 ‘과정록’보다 박지원의 ‘답사순서’가 선행 자료이고, 자료의 공개도 먼저 제시된 상태에서 이런 착오가 생긴 것은 참으로 면구한 일”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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