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다리가 물위에만 놓이는 것이랴? ‘옥산가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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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다리가 물위에만 놓이는 것이랴? ‘옥산가교비’
  • 취재=한기원 기자/사진·사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9.3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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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다리에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찾다<9>
부여 옥산가교비는 유일하게 천덕산 8부 능선 넓적바위에 자리하고 있다.

최영 장군 왜구를 물리친 홍산대첩의 무대였던 구룡평야와 태봉산성도
홍산현소재지 시장을 장악 보령에서 홍산으로 넘어오기 위해 다녔던 길
보령 미산면 도홍리 한 사찰의 스님 이곳에 돌다리를 놓았다고 전해져
옛 돌다리, 지금 보이는 것처럼 넓적바위 형상으로 보여 질 수도 있어


충남 부여군의 서부에 위치한 홍산면은 면적 25.39㎢, 인구는 부여군 전체 6만7270명 가운데 1480명(2019년 7월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안서리이다. 본래 홍산군 지역으로 홍산읍내 서쪽 아래에 있으므로 하서면이라 해 가덕(加德)·차대(車垈)·내동(內洞) 등 12개리를 관할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서면의 증암·석우 등 17개리와 남면의 일부를 병합해 옥녀봉의 이름을 따서 옥산면이라 하고 부여군에 편입됐다. 지형은 동서방향으로 금천구조선이 대덕리 서쪽 부시치에서 끝나고, 다시 이와 직각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구조선이 옥산저수지와 북쪽의 상기리를 이어 T자 모형의 곡을 이루고 있다. 서쪽의 옥녀봉(玉女峰), 동쪽의 비홍산(飛鴻山), 남쪽의 원진산(遠進山) 등의 산지에 둘러싸여 분지를 형성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지만 경지가 협소해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무·배추·고추·딸기·참깨 등 원예작물을 경작해 토지 이용도를 높여가고 있다. 상기리·가덕리를 중심으로 인삼 재배를 많이 하고 있으며, 상기리·홍연리 등 4개리가 복합영농시범지역으로 선정돼 유축농업으로의 전환단계에 있다. 도로는 부여∼장항간을 연결하는 노선과 남북간 노선이 있으나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문화(文化)·학산(鶴山)·홍연(鴻淵)·봉산(鳳山)·중양(中陽)·대덕(大德)·신안(新安)·내대(內垈)·가덕(加德)·수암(秀巖) 등 11개리가 있다.

부여 옥산면은 백제시대에는 대산현에 속했고, 경덕왕 이후는 가림군의 영역인 한산현에 속했다.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도 홍산현의 지역으로서 상서, 하서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상서면의 17개의 동리와 남면의 반서리 일부를 병합해 옥녀봉의 이름을 따서 옥산면이라 했다.

■ 아홉사리고개 다섯 번째 고갯길 쉼터에
충남의 서남쪽으로 흐르는 차령산맥의 칠갑산을 중심으로 고원지대를 이루고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차츰 낮아지는 지역에 위치한다. 동쪽은 남면과 충화면, 남쪽은 서천군 마산면과 문산면, 판교면과, 서쪽은 보령군 미산면과 홍산면에 닿아 있다.

천보산(天寶山·325m)은 충남 부여군 홍산면에 위치한 산으로 지티고개(삽티고개)를 경계로 금북기맥의 천덕산(天德山)과 마주보고 있다. 이 두 산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천보산은 야무진 바위로 이루어진 골산(骨山)이지만 천덕산은 그저 수더분한 육산(肉山)으로 서해안과 인접한 충남의 산은 해발 300~400m 안팎의 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작은 산이지만 속살을 잘 살펴보면 나름대로 등산 가치를 높이는 비장의 무기들을 숨기고 있다. 유명한 고찰(古刹)이나 고성(古城) 등이 대표적이고, 높이는 낮아도 아기자기한 암릉이나 볼거리가 있는 경우다. 아무렇게나 생긴 암괴가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어 빼어나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천보산의 경우는 후자다.

주위에는 고려 때 최영 장군이 왜구들을 물리친 홍산대첩의 무대였던 구룡평야와 태봉산성(충남도지정 문화재자료)도 있다. 천보산의 암질은 자갈 콘크리트를 버무린 것처럼 1억 년이 넘은 타포니(Taffoni) 현상을 이루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도 하다. 바로 진안의 마이산을 빼닮았는데, 우리말로 하면 풍화혈(風化穴)이라고 한다. 천덕산에서는 금북기맥을 잇는 비득재 방향으로 내려서지 않고 아홉사리 고개로 내려선다. 이 길은 옛날 민초들이 무수히 오갔던 고갯길로 발길에 길이 움푹 파여져 있기도 하다. 안내판의 ‘상천유원지 문녕기’의 ‘문녕기’라는 말은 이곳 방언으로 저수지 댐을 일컫는 말이다.

부여지역에서는 천덕산이라는 명칭보다 아홉사리고개라고 더 알려져 있는데, 고개가 9개라는 이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보령시 비산면에서 부여군 홍산면  방면으로 넘어오는 9개의 고개 중 다섯 번째 고갯길의 쉼터였을 법한 지점이다. 예전에는 홍산이 현의 소재지로서 많은 시장을 장악하고 교육기관이 자리 잡고 있어 보령에서 홍산으로 넘어오기 위해 다녔던 길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이 산길이 거의 이용되지 않아 산림 속에 묻혀있는 실정이다.

■ 천덕산 8부 능선 마당바위라 불리는 곳

부여 옥산면에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8호로 지정된 한 개의 문화재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것이 바로 ‘옥산 가교비’이다. 이 비석은 옥산면 상기리 상입부락과 보령시 미산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362m 높이 천덕산의 8부 능선 지점인 해발 250m 지점의 남산면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옥산 가교비’는 다리를 놓은 후 그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비는 보령의 미산면과 부여의 옥산면이 맞닿아 있는 천덕산의 마당바위라 불리는 곳에 서 있다. 예전의 이곳은 고갯길상의 쉼터 역할을 하였을 것이나, 지금은 산길 자체가 거의 이용되지 않아 거의 묻혀 지고 있다. 이 가교비는 방처럼 넓게 깔린 바위 윗면에 비문을 새겨 놓은 모습이다. 남아있는 비문은 많이 닳아 있어 확실히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로, 원래는 30자 가량의 글씨를 4줄로 새겨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교비는 마당바위라 불리는 방바닥처럼 넓적한 암반 위쪽에 새겨져 있다. 비문이 새겨진 면의 크기는 가로 50cm, 세로 100cm가량이며, 비문의 내용은 마멸된 부분이 많아 확실히 판독하기는 어려우나 당초 모두 4행 30자 가량으로 구성 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판독 가능한 비문의 글씨들은 다음과 같다.

 ‘○○○○施主僧敬特(시주승경특)
 化主劉金候(화주유금후)
 ○○乭山(돌산)
 ○○印(인)○○王幼(왕유)○任雲(임운)’
 ‘지역유지인 유금후의 시주를 받아 경특 스님이 다리를 놓으니…,
 우뚝한 산 위에 놓인 다리위에서 다가오는 구름과 벗하며 노니나니…,
 지나는 나그네여 잠시 봇짐을 벗어놓고 그 맛을 누리시라.’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이 고갯길 너머의 보령시 미산면 도홍리에 있었던 한 사찰의 스님이 이곳에 돌다리를 놓고 그 내용을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도대체 다리는 어디 있는 것일까? 산꼭대기가 바로 보이는 곳에 개울이 어디 있으며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다리란, 눈을 비비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다리는 없다. 신발을 신고 직접 건널 수 없는 곳에 놓이는 것이 다리이거늘 물이 없는데 어찌 ‘다리가 있다’고 비석을 세워두었을까, 너무나 황당하기만 한 일이다. 그런데 평평한 바위에 서서 주위를 살펴본다면, 아마도 비석 바로 아래에 있는 커다란 넓적바위가 돌다리인 듯싶다는 생각이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실마리가 될 듯싶다.

“어찌 다리가 물위에만 놓이는 것이랴?” 봇짐을 지고 고개를 넘는 나그네들이 다리를 펴고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리가 어찌 물위에만 놓이라는 법은 없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세월이 겹겹이 흐르면서 산길과 물길이 바뀌고 자연스럽게 돌다리 밑으로 흙과 돌이 쌓이고 메워지면서 ‘옛 돌다리’는 지금 보이는 것처럼 넓적바위 형상으로 오늘 우리에게 보여 질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아무 까닭 없이 가교비만 이곳 능선에 홀로 서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기 때문이다. 비가 와서 산길이 흙탕길이 되면 이 넓적바위는 쉼터이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켜주는 ‘돌다리’이며, 인간과 자연,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통로일 것이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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