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영산 '태백산'은 크고 밝은 신령스런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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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영산 '태백산'은 크고 밝은 신령스런 산
  • 이은성 기자
  • 승인 2011.03.1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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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25구간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동출신ㆍ홍성고 20회ㆍ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1년 3월 5일~6일
구간 : 도리기재-구룡산-곰넘이재-신성봉-차돌배기-깃대배기봉-부쇠봉-태백산-호방재
도상거리 : 24.6km
산행시간 : 10시간 40분 소요


백두대간 23차구간인 소백산에서 예상치 못한 추위를 만나 많은 사람들이 동상에 걸려 고생하였고, 아직도 2명은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이다.

빠른 쾌유를 빌면서 대간길에 나선다. 잠실을 출발한 버스가 03시 10분경 도리기재에 도착하여 준비를 마치고 03시 30분 구룡산을 향해 출발한다.

도리기재 주변은 춘양 고을이다. 분수령 서북쪽은 춘양면 우구치리다. 이곳 역시 민초들이 대대로 불 놓고 화전으로 살던 곳이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때 삼동산(1,178m)을 중심으로 금광이 생겨나면서 첩첩산골로 외지인들이 몰려들었다. 광산이 한창 번성했던 1930년대엔 인근 마을에 2000~3000 세대가 넘게 살았다.

춘양은 소나무의 고장이다. 1950년에서 1970년 사이엔 영남 북부와 강원 남부 산간지대에서 벌목해 영동선 춘양역에서 실리는 소나무를 춘양목(春陽木)이라 해서 최고 품질로 인정했다. 또한 정감록을 비롯한 여러 비결서에서도 춘양은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반드시 꼽히고 있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사대부들과 서애 유성룡의 형 유운룡이 모친을 모시고 이곳으로 피난한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또 조선시대에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태백산 사고(史庫)를 지은 것만 보아도 춘양의 지리적 여건을 알 수 있다.

봉화는 영암선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고을이다. '남한 최후의 오지'라고도 불리는 봉화가 그나마 조금씩 세상에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도 철도가 아니면 불가했을 것이다. 특히 승부역이 있는 승부마을은 1998년부터 환상선 순환열차가 운행됨으로써 일반인에게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지금도 열차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렵다는 낙동강 상류의 깊은 산골 마을이다. 여기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영암선 개통기념비󰡑가 서 있다. 1955년 12월 석탄 등을 수송하기 위해 순수한 우리 기술로 험준한 산줄기를 뚫어 33개의 터널을 뚫고, 험한 강변에 55개의 다리를 놓아 만든 영암선을 기념하려 세운 것이다. 시발지인 영주역이나 종착지인 철암역이 아니라 이 승부역에 세우게 된 것은 이 부근의 공사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역무원이 써 놓았다는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이란 글귀는 온종일 사람 그림자 만나기 어려웠을 오지의 간이역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도리기재를 지나면 백두대간은 이제 온전히 태백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된다. 작은 금정골을 지나 쭉쭉 뻗은 금강송과 인사하다 보면 어느덧 구룡산(1,346m)에 도착한다(06 시00).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정상은 헬기장이다. 영월의 상동골을 휘감고 태백산으로 흘러가는 백두대간 분수령과 주변 산세는 구룡(九龍)의 용트림처럼 장하다. 태백산 너머로는 화령재와 함백산의 부드러운 자태도 두 눈에 들어오고, 민족의 영산인 태백산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지만, 지금은 하늘엔 초롱초롱 별빛만이 가득하다. 구룡산에서 내려가는 길은 부드럽지만 눈길이라 매우 미끄럽다. 고직령을 지나 곰넘이재에서 아침식사를 한다(07시20분). 신(神)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곰(검신)님'이라고 불렸다. '신에게 나아가는 고개' 혹은 '신의 고개'라는 뜻이다.

태백산 폭격장 때문에 설치한 방화선이 신성봉 직전의 안부까지 뚫려 있으며,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오르면 신성봉(1,300m)에 도착한다(08시30분). 정상에는 정상 표지석은 없고 묘만 있다. 명당을 찾아 이곳까지 모신 후손들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신성봉에서 내려서면 차돌배기 갈림길이다. 서민들이 자주 먹는 차돌배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다. 백두대간 분수령은 여기서 산줄기 하나를 남으로 내주며 품을 넓히니 조선시대 태백산사고의 수호 사찰이었던 각화사를 품은 각화산(1,176m)이다.

 

 

 

 



조선 5대 사고 중 하나인 태백산사고는 1606년(선조39년)에 지어진 후 1913년까지 약 300여 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 왔다. 현재 태백산사고는 일제 때 불타 없어졌으나 여기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각화사(覺華寺)는 686년(신라신문왕6년)에 원효가 창건하여 한때 800여 명의 승려가 거주할 정도로 대찰이었으나, 지금은 아담한 도량일 뿐이다. 차돌배기 삼거리에서 태백산 정상은 지척이다. 옛날 태백산에서 천제를 올릴 때 봉화에서 접근하는 이들은 이 산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1174봉을 지나 깃대배기봉(1,370m)에서 부터는 한결 여유롭다. 깃대배기봉에서 태백산 직전의 부쇠봉(1,546m)까지 이어진 분수령의 동쪽으로 길게 펼쳐진 계곡은 한반도 최남단 열목어 서식지로 유명한 백천동계곡이다.

 

 

 

 

 

 



구룡산에서 신성봉 - 깃대배기봉 - 부쇠봉 - 태백산으로 이어진 백두대간능선은 커다랗게 반원을 그린다. 양백지간답게 큼지막한 철쭉나무가 빽빽하다. 때마침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상고대와 어우러진 눈꽃 터널을 지날 때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와~하는 탄성이 터진다.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미약하다. 위대한 자연의 섭리 앞에 할 말을 잊을 뿐이다. 아름다운 눈꽃 터널을 지나면 부쇠봉(1,546m)에 도착한다. 부쇠봉에서 방향을 서남으로 틀면 봉화와 헤어져 온전히 강원도 땅이 된다. 이내 주목 군락이 펼쳐지면서 태백산(太白山.1,567m) 정상이다(11시40분).

태백산은 강원 태백시 문곡동, 영월군 상동면, 경북 봉화군에 걸쳐 있으며, 예부터 삼한의 명산이라 하여 󰡐민족의 영산󰡑이라 일컫는다. 신라 때 태백산(북악), 토암산(동악), 계룡산(서악), 팔공산(중악)과 함께 󰡐신라 오악(五嶽)󰡑으로 추앙받았다. 태백산 정상에 태고 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 있다. 천제단은 둘레 27m, 폭 8m, 높이 3m의 자연석으로 쌓은 20평가량의 원형 돌 제단이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이 사각형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동양 사상 때문이다.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강화 마니산의 참성단도 역시 '천원지방'이다.

태백산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민족의 영산으로 추앙되어 왔다. 그 까닭은 환인(桓因)의 아들이자 단군(檀君)의 아버지인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곳이라는 옛 기록에서 유래한다. [삼국유사 고조선편]에는 "환웅께서 무려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 나오는 태백산이 현재의 태백산은 아니다. 일연은 태백산 옆에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달았고, 지리적이나 역사적 의미로 봤을 때는 북한에 있는 백두산이 바로 당시의 태백산이라는 게 정설이다. 결국 우리 민족에게 '신령스런 산'이라는 의미의 태백산은 백두산이나 묘향산인 것이다. 태백산의 한자 이름 이전에 순수 우리말은 '한배달'ㆍ'한밝달'ㆍ'한밝뫼' 등이었다. '크게 밝은 산'이란 뜻이다.

그런가 하면 태백산은 무속(巫俗) 신앙의 성지로도 여겨진다. 천제단 바로 아래엔, 죽어 태백산신이 되고 싶다던 단종의 유언을 받아들여 태백산의 주산신(主山神)으로 모셔 놓은 단종의 비각이 있고, 망경사 용정(龍井)엔 동해의 용왕신이 거주하며, 동쪽의 문수봉 자락에도 수많은 신장(神將)들이 머물고 있다. 단종비각(端宗碑閣)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고을 추익한(楸益漢) 전 한성부윤(前漢城府尹)이 태백산의 머루, 다래를 따서 자주 진상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산과(山果)를 진상 차 영월로 가는 도중 곤룡포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르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추익한이 이상히 여겨 영월 땅에 도착해 보니 단종이 그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1457년 영월에서 승하한 뒤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 주민들이 매년 음력 9월 3일 제를 지내고 있다. 지금의 비각은 1955년 망경사 박묵암 스님이 건립하였으며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太白山端宗大王之碑)'라고 쓴 비문이 안치되어 있다. 비문과 현판 글씨는 오대산 월정사 단허 스님의 친필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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