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자신을 비워 사람을 살리고, 사람은 탐욕으로 산을 허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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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자신을 비워 사람을 살리고, 사람은 탐욕으로 산을 허문다
  • 유태헌 본부장
  • 승인 2011.05.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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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29구간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시 : 2011년 4월 30일~5월 1일
산행구간 : 백봉령 - 자병산 - 생계령 - 고병이재 - 석병산 - 두리봉 - 삽달령
산행거리 : 18.5km
산행시간 : 6시간 50분


낮동안 멈췄던 비가 저녁이 되면서 천둥번개와 함께 제법 많이 내린다. 내일은 황사 경보까지 발령 된다고 하니 대간길이 가볍지만 않다. 출발 시간이 되면서 다행히 비는 멈춘다. 서울을 벗어난 버스가 영동고속도로, 동해고속도로를 통과해 백봉령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3시경 이다.

현재 42번 국도가 지나는 백봉령(白福嶺)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꽤 큰 고갯길이었다. 삼척에서 한양으로 오가는 사람과 물자는 강릉의 대관령을 넘지 않는 한 대부분 이 백복령을 지나야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 한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라와 영월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을 의지하여 살았다. 백봉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 백봉령은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엔 한자로 엎드릴 복(伏)자를 써서 ‘白伏嶺’이라 되어 있고, 현재 이것이 공식 지명으로 쓰이고 있으나, 옛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자 표기가 달랐음을 알 수있다. 대동여지도엔 백복령(白福嶺)이요, 택리지엔 ‘하얀 봉황’이라는 뜻의 백봉령(白鳳嶺)이라 했으며, 산경표엔 맨 앞 글자를 흰 백이 아니라 일백 백으로 쓴 백봉령(百福嶺)이라 기록하고 있다. 한편 중보문헌비고엔 백복령(百福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고 있는데,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복을 바라는 고개’로 해석이 가능한 희복현(希福峴)이라는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보이는 지명이다.

한자로 쓰이는 지명은 이처럼 제법 복잡하지만, 현재에 널리 쓰이는 백복령(白伏嶺)은 일제 때 제작자에 의해 고의든 실수든 잘못 기록되면서 전해 온 것이다.

백복령(白福嶺)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꽤 큰 고갯길이었다. 한 국가의 역사성과 문화성을 상징하는 지명조차 도적놈들에게 왜곡할 기회를 줬던 힘없던 과거의 아픔을 되새기며 3시10분 백봉령을 출발한다.

과거의 아픔을 되새기며 고개길에 오르니 이내 자병산(紫屛山.872.5m)이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흐르던 백두대간 장엄한 마루금에서 자병산은 흰색 뼛가루만 휘날리며 사라졌으니...., ‘자주빛 울타리’ 라는 어여쁜 이름이 무색할 뿐이다. 사람들의 욕심 탓이었다. 생명의 가치보다 재화의 가치를 우선시 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당연한 결과 였다. 자병산의 정상 봉우리는 이미 싹둑 짤려져 나갔고, 서쪽 산사면은 파헤쳐져 본래의 모습은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지도에 표기된 해발 872.5m 정상은 이미 60m 정도 낮아진 상태며 이후 추가 개발사업이 끝나면 정상부는 150m 가 더 낮아진다. 결국 나중엔 자병산은 조물주가 주신 원래의 높이보다 200m 이상 낮아져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형이 파괴된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단지 마루금의 변형이나 표고의 변화 같은 지형적인 데만 있는게 아니라, 바로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데 있다.

자병산 주변은 한반도 산림 생태의 근간인 백두대간에서도 주요지역으로으로서 빼어난 자연경관과 풍부한 동식물상을 자랑하던 구간이다. 숲 속에는 삵과 고슴도치가, 맑은 계류에는 수달 등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또 백리향, 산개나리, 만병초, 금강애기나리, 한계령풀 같은 희귀 식물이 계절마다 화사하게 꽃을 피우는 곳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자병산은 해발고도 1000m에 못 미치는 비교적 낮 은 산이지만, 석회암 지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상습적인 안개와 함께 남방 식물과 북방 식물이 교차하는 현상이 나타나 학술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휘귀 지형’ 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자병산 일대의 식물상이 한반도 석회암 지역 중 가장 탁월해 학술적, 자연 자원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은 지역이라는 설명이다.

백두대간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이며 소통의 장소였다. 하늘은 이산줄기를 통해 하늘의 지혜를 얻었을뿐 아니라 생존을 위한 재화도 얻었다. 그뿐아니라 이어진 하나의 산자락에 함께 몸기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동질감을 느끼며 살아 왔다. 그런 백두대간이 끊어졌다는 것은 소통이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간의 소통이 끊어지고,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이 É끊어 졌으며,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할 모든 생명들과의 소통도 É끊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너진 자병산은 소통끊어져 단절된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 아프다.

산은 자신을 비우며 사람을 살리고 있는데, 사람은 탐욕으로 산을 베고 허물고 있었다.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흔히 두 번의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한번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진부령에서 더 이상 북으로 갈 수 없는 분단의 현실에 울고, 나머지 한번의 눈물은 여기 자병산 구간을 지나면서 운다고 한다.
백두대간 마루금이 아닌 자병산 시멘트 시추로를 따르며 45번 철탑을 지나면 분수령은 생채기를 딛고 서서히 수목으로 단장하여 일어서기 시작한다. 조금씩 내리던 비도 멈추고 신선한 바람이 뒤척여 흐트러진 마음을 추슬러 준다.

숲으로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생계령을 지나니 강릉 서대굴 안내판이 보였다. 강원도 기념물 제36호인 이 굴은 ‘범록굴’ 이라는 다른 이름도 지니고 있다. 산계리 석병산 중복 벼랑에 있어 생계령에서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석회암 동굴이다. 약 250m 까지는 탐사되었으나 그 이상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동굴은 세로로 땅 속 깊이 뻗어 있다. 동굴 안에는 작은 공간들이 발달해 있고,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동굴 바닥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그리고 꽃모양의 석화(石花) 등이 둘러싸여 있어 매우 아름답다. 동굴 안이 위험하여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한 피해가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서대굴을 지나면 산길에 고사목이 쓰러져 길을 막기도 하고, 주변에는 엘리지 야생화가 화려하게 바람에 한들거린다. 엘리지 꽃이 만발한 너른 안부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산길 지나며 암벽 사이로 바라보니 운무에 산자락이 보일듯 말듯 한 폭의 산수화처럼 다가온다. 산죽 숲길을 지나 931봉에 오르니 멀리 대관령이 보인다. 대관령이 품에 안길 듯하였다. 경상남도 산청군 중산리에서 첫 걸음을 뗀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강원도의 산줄기를 지나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걸어 이곳까지 온 것이다. 제 발로 이 땅을 느끼며 걸어온 길이다. 몸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정직하다는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으니 말이다.

끝 없이 펼쳐진 엘리지 꽃길을 따라 산길을 지나 촘촘히 가지를 뻗은 숲길을 지나고 나니 바람이 시원했다. 강릉 산계리와 정선 임계리를 잇는 고개인 고뱅이재에 도착한다.(7시30분) 일명 골뱅이재라고도 불리워지며 우측 옥계 석회동굴로 내려갈 수 있다. 헬기장을 지나고 성황뎅이삼거리를 치고 오르면 오늘 구간 중 제일 높은 석병산(石屛山.1.055m)이다.(8시30분)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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