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벽에 갇힌 ‘광개토대왕의 기개’ 동방의 피라미드 ‘장수왕릉’
상태바
유리벽에 갇힌 ‘광개토대왕의 기개’ 동방의 피라미드 ‘장수왕릉’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1.09.22 12: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민족의 역사, 애환 서린 만주벌 1만5000리 대장정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3>


우리민족의 역사와 애환은 광활한 중국대륙의 만주벌에 그대로 숨 쉬고 있다.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의 발상지로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투쟁의 본산지로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아픈 역사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찬란했던 우리의 고대역사가 짓밟히고 있는 흔적이 역력했다. 이곳 항일독립투쟁의 역사현장을 지난 8월 9일부터 20일까지 11박 12일의 일정으로 홍성지역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항일 사상과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중국 대장정에 나섰다. 충청남도와 홍성군, 홍성교육지원청이 주최하고, 한국스카우트충남연맹(연맹장 조기준) 홍성지구회(회장 이상근)가 주관한 청산리 전투 승전 91주년 기념 백야 김좌진 장군 청산리 역사 대장정은 홍성지역 중·고등학생 65명과 교사, 임원 등 83명이 함께했다. 본지는 중국 동북3성(길림성·요령성·흑룡강성) 일대에 산재된 우리의 역사유적과 독립투쟁의 현장 등 민족의 영토와 삶의 현장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길림성 집안(集安)현에 도착, 점심식사를 위해 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파트 주변으로 성돌이 시야를 끈다.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던 국내성터다. 우연일까, 북한식당인 평양식당 앞쪽에 지금은 재현해 놓은 국내성돌이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구려는 2대 유리왕 22년(AD 3)에 졸본(환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했다.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425년 동안 국내성은 고구려의 수도였다. 이 지역에는 평지가 매우 적은데, 가장 큰 평지의 동서 길이가 약 30리, 남북이 약 10리가 되는 집안평야라고 한다. 집안평야는 3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그 중앙에 석성으로 된 국내성터가 자리하고 있다. 또 집안에는 왕릉급 무덤 20여기를 포함하여 모두 1만2000여기의 고구려 고분이 있다고 한다. 가히 고구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국내성은 본래 토성이었으며, 축조연대는 기원전 5~4세기경으로 전해진다.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겨온 후, 본래의 토성을 그대로 이용하다가 고국원왕 12년(342)경에 토성 위에 석(돌)성을 쌓았다고 한다. 국내성은 평면이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으로 네 벽의 길이는 동벽이 554.7m, 서벽이 664.6m, 남벽이 751.5m, 북벽이 715.2m, 성의 둘레는 2686m에 이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파트 단지에 둘러쌓인 국내성 성벽


고구려 역사의 한 단면, 광개토대왕비 
집안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으로는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 환도산성 등이 있는데, 고구려 초기의 문화와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유물은 역시 광개토대왕비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의 역사를 집약하면서 고구려 역사와 문화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광개토대왕비는 아쉽게도 ‘호태왕비’라는 간판을 달고 방탄유리 안에 갇혀 있었다. 만주 벌판을 넘나들던 광개토대왕의 광활한 꿈과 역사가 유리벽에 갇힌 것 같아 마음을 울적하게 했다.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라고도 부르는 광개토대왕비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AD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웠다는데, 한반도를 통틀어 가장 큰 비석이라고 한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은 폭이 1.35m, 제3면 폭이 2m, 제4면이 1.46m이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비면에 가로와 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775자로 통상 알려진 이 비문은 상고사 특히 삼국(한·중·일)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귀중한 비문이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은 그 내용에 따라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1면 1~6행)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동명왕), 유류왕(유리왕), 대주류왕(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대왕의 행장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1면 7행~3면 8행)는 광개토대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을 연도에 따라 적고 그 성과(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를 기록하고 있다. 셋째(3면 8행~4면 9행)는 광개토왕 생시의 명령에 근거하여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 연호의 수와 차출 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을 적은 것이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비는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풀어줄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이다. 정확한 내용의 판독이 이뤄져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이 비석은 1700년의 풍파를 견디고 여전히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유리벽에 갇힌 광개토대왕비



동방의 피라미드, 장수왕릉(장군총) 
대왕릉과 마주 보는 그리 멀지않은 곳에는 장수왕릉<사진 위>이 웅장한 자태로 서있다. 413~49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수왕릉은 피라미드 형태로 만든 고구려의 대표적인 적석묘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이 무덤은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이다. 높이는 12.4m, 한 변의 길이는 31.58m, 밑면적은 약 960㎡, 윗 면적은 270㎡ 이다. 7단 계단식 사각형 피라미드 형태의 능은 1100여개의 화강암을 정확한 규격(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m)으로 잘라 쌓아 고구려인들의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매 층에는 잘 다듬은 화강암을 3~4개씩 포개 쌓았고, 밑돌은 위에 포개 놓은 돌보다 얼마간 나오게 하고, 홈을 파서 밀려나가지 않도록 맞물려 놓았다. 이 수법은 고구려에서 많이 쓴 축조양식으로 성건축에서도 널리 적용되었다. 보통 돌 한 개의 무게가 15톤, 묘실 정상부를 덮은 통돌의 면적은 60㎡에 무게만도 50톤에 이른다고 한다. 장수왕릉의 사방에는 엄청난 큰 돌을 3개씩 기대어 세워 놓았는데, 북쪽 가운데 것이 없어져 지금은 11개만 서있다. 한 개가 없어진 북쪽 벽은 조금씩 밀려나오고 있는 듯 보였다. 또 한 면에 3개씩 12개를 세워 12지처럼 보호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총으로도 불리는 장수왕릉의 계단은 7단이며, 1단은 4겹으로, 2단 이상은 3겹으로 쌓았다. 위로 올라갈수록 계단의 너비와 높이는 점차 줄어드는데, 7단 위에서는 너비가 13.6m의 중심부로 1단의 절반도 못 된다. 7단 위에는 중심부로부터 비스듬하게 강돌과 회를 섞어서 다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빗물이 무덤 안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붕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무덤의 석재는 노령산맥의 오녀봉 채석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오녀봉은 집안에서 통화 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5개의 험준한 산봉우리가 솟아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에 어떻게 저렇게 큰 규모의 석재를 운반할 수 있었을까. 봄부터 가을까지 돌을 캐서 다듬고, 겨울이면 얼음과 눈판으로 운반을 했다고 한다. 흙을 쌓고 통나무 위로 돌을 굴려 올리는 방법으로 거대한 능을 쌓았다고 하니, 고구려인의 번뜩이는 지혜가 실감나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왕릉과 가까운 곳에는 고분벽화가 새겨진 5기의 석벽화 고분이 있는데 이를 오회분이라고 하며, 다섯 번째 묘가 바로 오호묘이다. 그중 내부를 공개한 묘는 오호묘가 유일하다. 6세기 중반~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호묘는 높이가 8m, 무덤둘레가 약 180m로 벽화의 내용은 7세기의 전형적인 벽화양식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와 각종 문양 등이 벽면에 짜임새 있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인류문명발달에 기여한 신들을 형상화하여 풍부한 설화성을 지니고 있다. 돌 위에 직접 동식물, 광물의 염료를 사용해 벽화를 그려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내부에는 세 개의 석관이 나란히 있는데, 이는 왕인 남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는 부인과 첩의 관으로 추정된다. 유적지 주변은 공원처럼 깔끔하게 정리됐지만 사신도가 그려진 오호묘 고분 벽은 방수처리를 하지 않아서인지 벽면에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편 광개토대왕릉의 석관은 관광객들이 마음대로 밟고 다녀서인지 군데군데 훼손된 흔적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고구려 역사를 직접 접하고 보니 가슴은 뿌듯했지만 ‘고구려는 동북지역에 있던 소수민족의 정권’이라고 선전하는 중국의 의도된 행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은 역사왜곡이란 허망함 때문인지 우리의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 명치끝이 시리도록 저려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장군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