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고현읍성, 남해안의 수군 진영에 이웃한 요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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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고현읍성, 남해안의 수군 진영에 이웃한 요새지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10.2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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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17
거제읍성(고현성)의 북문인 계룡루. 본래 누각의 이름은 아니고 복원을 하면서 시민들의 여론조사로 선정된 이름이다.
거제읍성(고현성)의 북문인 계룡루. 본래 누각의 이름은 아니고 복원을 하면서 시민들의 여론조사로 선정된 이름이다.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축성방식 보여주는 전형적인 평지읍성
1451년 가을부터 1453년까지 고현성을 건설했다는 기록이 남아
성벽 길이 818m, 높이 2m, 너비 5.5m 성안 경작·주택지로 사용
6·25한국전쟁 때 훼손 현재 600m의 성벽만 남아, 북문지 복원돼


지금의 거제읍성(고현성)이 있는 거제시 중심지인 고현동은 1432년부터 1664년까지 거제현의 읍치였다. 고현동에 있는 고현성(古縣城)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고정부곡’으로 불리다가 부곡이 폐지된 후에는 ‘고정리(古丁里)’로 명칭이 바뀌었다. 1432년 거제현의 치소가 옮겨오고 본격적인 고현성 축조가 끝난 이후부터 ‘고현(古縣)’이라는 현재 명칭을 사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찰사 하연(河演, 1376~1453년)의 글에 의하면, 대마도 정벌이 끝난 다음, 1419년(세종1년) 세종과 태종 두 임금께서 거창군에 있던 거제현을 거제도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거창 진주에 있는 거제현민을 8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주 시켰다. 사등성에서 임자년 1432년(세종 14)에 고현으로 치소를 옮겼고(거제부읍지 1759년, 신증동국여지승람), 1449년 현령 이호성이 부임해 1451년 가을부터 1453년까지 고현성을 건설했다(조선왕조실록)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보흠(李甫欽)의 축성기에는 우찬성 진양 좌상 정분(鄭苯)공에게 음양을 살피고 샘물을 찾아보아 치소를 옛 관아 남쪽 10리쯤에 옮기도록 허락했다. 하도민 2만여 장정들로 하여금, 영천 군사 정차공, 진양 판관 양연, 곤양 군사 최성로, 청도 군사 이의, 사천 현감 장우, 진해 현감 김한진, 등이 그 역을 위해 분감을 관리했다. 또한 거제현령 이호성(李好誠)이 관사와 창고 곳간을 세웠고 여기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모여 성을 쌓는 일에 마음을 다하며, 각기 맡은 바를 다했다. 조선초기 모든 읍성(縣府)에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건물이 있었다. 관청 객관 동헌 향교 등이다. 1453년에 끝난 고현성 축조에 ‘황취루(黃翠樓)’ 누각이 객관과 마주하며 북쪽에 위치했고, 고현성 서문 북쪽 편에 ‘거제향교’가 있었다.

■ 한국전쟁 때 UN군 포로수용소 설치
거제읍성(고현성)은 경상남도 거제시 신현면 고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터이다. 이 성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5년(1423) 당시 관아(官衙)가 있던 사등성(沙等城)이 좁고 물이 모자라 지키기 어려워 새로이 읍성 터를 찾아 경상도민(慶尙道民) 2만여 명을 동원, 9년간에 걸쳐 쌓은 성이다. 둘레가 2㎞, 높이 7m나 되는 이 성은 동·서·남의 세 방향에 성문(城門)이 있었다. 성 둘레에는 해자(垓字)를 두른 조선시대(朝鮮時代) 전기(前期)의 대표적인 축성방식(築城方式)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평지읍성(平地邑城)이다.

세종 14년(1432) 성안에 40여 칸의 건물을 지어 사등성에 있던 관아를 이곳으로 옮겨 읍성을 삼고, 적의 침입 때 인근의 주민이 들어와 지키도록 했던 곳이다. 선조(宣祖) 25년(1592) 5월 일본군(日本軍)에 의해 함락된 때도 있었으나 남해안의 수군(水軍)의 진영에 이웃한 요새지(要塞地)였다. 현종(顯宗) 4년(1663) 관아를 지금의 거제읍(巨濟邑)으로 이건함에 따라 읍성의 기능을 잃게 됐다. 6·25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원형(原形)에 가까운 옛 성벽이 보존돼 있었으나 UN군에 의해 포로수용소가 설치될 때 성의 일부가 헐려 현재는 서남쪽 부분 600m 정도만 옛 모습의 성벽을 남기고 있다.

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가는 큰 섬으로 동쪽으로는 부산 가덕도(加德島)가 있으며, 북쪽은 진해만(鎭海灣)에 면하고, 남쪽은 현해탄(玄海灘)을 사이에 두고 대마도(對馬島) 북안(北岸)과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이보흠(李甫欽)의 축성기에 따르면, 고려 말 왜구를 피하여 거창으로 피난 갔던 거제도민이 조선조 세종 때에 돌아와 처음 수월리(水月里)와 사등성(沙等城)에 머물렀으나 주민이 너무 많고 성이 비좁아 다시 고현성(古縣城)을 크게 쌓아 옮겼으며 현종 때까지 거제군의 치소(治所)로 사용됐다.

고현성의 축성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이 달에 경상도 거제현성을 쌓았다.”(문종 원년 11월조)거나, “겸지병조사(兼知兵曹使) 김순우(金淳于)를 경상도에 보내 거제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단종 원년 8월조) 등의 기사를 고려해 보면 고현성은 문종 원년(1451)부터 단종 원년(1453) 사이에 축성됐던 것으로 보인다. 성곽의 형태와 구조는 계룡산 기슭의 동쪽으로 뻗은 설상대지(舌狀臺地) 위에 평면이 배 모양으로 축조된 석축성으로 삼문(三門)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과 치(雉);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해자(垓字);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구비한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읍성구조를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함락된 뒤 1663년(현종 4)에는 거제면으로 치소를 옮긴 다음 곧 폐허가 됐고, 6·25한국전쟁 때 UN군 포로수용소가 이곳에 설치됨으로써 그 파괴는 극에 달했다. 현재 상태 파악이 가능한 성벽은 길이가 818m인데 평균 높이가 2m, 너비는 5.5m 가량이다. 축조수법은 외벽의 경우 구릉사면을 ‘ㄴ’자형으로 절개하고 그 생토 층에 자갈을 깔아 다진 다음, 장대석을 일렬로 배치해 기단석으로 삼고 그 위에 성 돌을 쌓았다. 내벽의 경우는 당시의 지표면을 50∼60cm로 파서 그 속에 할석을 채워 기단부를 보강하고 그 위에 사람머리만한 할석으로 조잡하게 쌓아 올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3038척이고 높이가 13척이라고 기록했는데, 그 크기는 남해안의 읍성 가운데 중간 정도에 해당되며 높이는 큰 편에 속한다. 이 성은 1991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됐고, 1991년에 그 보고서가 간행됐다.

거제읍성 성곽 돌은 네모 반듯한 돌도 있지만 대부분은 모가 적은 돌들로 축성됐다.
거제읍성 성곽 돌은 네모 반듯한 돌도 있지만 대부분은 모가 적은 돌들로 축성됐다.


■ 경상도 백성 2만여 명 동원 축성
거제읍성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거제현(巨濟縣)은 지금의 거창에 해당하는 가조현과 함께 진주목으로 이전했고, 조선 초기 1422년(세종 4) 거제현이 복군되면서 신현읍 수월리로 옮겼다가 식수가 부족하고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지금의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에 해당하는 사등성으로 옮겨진다. 이후 1432년(세종 14) 지금의 거제시청이 위치한 고정부곡(古丁部曲)에 거제읍성을 축성하게 된다. 이후 1489년(성종 20) 거제부로 승격됐으나, 임진왜란으로 거제읍성이 무너지고 1664년(현종 5) 거제현을 현재의 거제면으로 이전하고, 거제읍성을 고현성(古縣城)이라 칭하게 된다.

경상남도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의 대지 위에 평면의 배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현종 4년(1013)까지 거제군의 관아로 사용됐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기록에 따르면, 둘레가 3038척(921m), 높이 13척(4m)이라 했으나,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성벽의 길이는 818m, 높이는 2m이다. 동·서·남의 3곳에 성문을 내었으며, 성문 앞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은 성 하나씩을 쌓았다. 또한 성문 위에 낮은 담을 설치하고, 성 둘레에 못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하는 등의 방어시설들을 마련해 놓았다. 이 성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 때 왜군에 함락되기도 했으나, 남해안 수군의 진영에 이웃한 요새지로 쓰였다. 그 후 관아를 거제읍으로 이전하면서 읍성의 기능을 잃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UN군에 의해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대부분이 파괴됐고, 현재는 서남쪽 600m 정도만이 옛 모습의 성벽을 유지하고 있다. 고현성은 조선시대 전기 때 사용한 읍성으로 사등성이 좁고 식수가 부족해 고현성으로 옮기게 됐는데, 이때가 단종 1년(1453년)이다. 고현성에서 차후 거제면으로 거제관아가 옮기게 됐으며, 거제관아가 있었던 곳은 읍성이 없었기에 현재 거제시에서는 고현성이 거제읍성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거제읍성(고현성) 축성 당시에 경상남도 육읍(六邑)의 백성 2만여 명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있다. 2년 동안 2만 명이나 동원됐으니 1년에 1만 명의 엄청난 인원을 동원해 만든 읍성이다. 결국 고단한 백성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 읍성이다. 경남도지정 기념물 46호인 경남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고현성의 북문지 문루(門樓) 복원공사가 3억5000여만 원의 예산으로 지난 2006년 7월 복원됐다. 복원된 문루는 기단을 포함해 높이 5.8m로 넓이는 15평가량 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성벽이 보존돼 있었으나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상당부분 훼손돼 현재 600m 정도의 성벽만 남아있다. 거제시청과 거제시의회 등을 안고 있는 거제읍성(고현성)의 일부는 현재 주로 경작지나 주택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머지는 거제시에서 시민공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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