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금당실마을 돌담길 7km, 초가집과 한옥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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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금당실마을 돌담길 7km, 초가집과 한옥을 잇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한지윤·이정아 기자
  • 승인 2019.11.1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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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담길의 재발견-22
예천 금당실마을의 돌담은 강이나 밭에서 나온 돌로 비교적 높게 쌓아올렸다.
예천 금당실마을의 돌담은 강이나 밭에서 나온 돌로 비교적 높게 쌓아올렸다.

조선시대 정감록에 ‘천하명당 십승지’로 꼽았던 금당실의 땅
대과 급제 15명, 진사·생원은 헤아릴 수 없었던 선비의 고장
한옥과 초가 등 고택과 어우러진 마을의 돌담 7.4km 이르러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 있는 금당실마을의 이름은 금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마을 앞쪽을 지나는 시냇물이 금곡천인데, 그곳에서 사금이 생산됐다. 그래서 ‘금당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용문면사무소 앞에는 힘찬 필체로 ‘용도천문(龍跳天門)’이라 새긴 커다란 비석이 놓여 있다. ‘용이 하늘 문에서 뛰어 논다’는 뜻이니 마을에 대한 자부심도 하늘을 찌른다. 금당실마을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과 함께 정감록을 인용해 ‘천하명당 십승지’임을 알리는 비석도 세워져 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함부로 무시할 곳이 아니라는 은근한 자랑이다.

금당실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반서울’이다.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을 정할 때 금당실마을도 그 후보에 올랐다. 비록 물이 부족해서 조선의 도읍이 되지는 못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금당실마을이 서울이 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도읍이 되지 못한 금당실마을은 조선 후기에 안락한 마을의 대표주자로 새롭게 명성을 얻었다.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서 십승지지(재난을 피할 수 있는 10곳)로 선택 받았기 때문이다. 난리를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장소를 십승지로 꼽았는데, 다섯째로 꼽은 곳이 바로 금당실 마을이다. 정감록의 기록에 ‘예천 금당실의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마을을 돌아보며 만난 어르신께 십승지라서 정말 전쟁을 피했는지 여쭤보면 정말 마을에는 임진왜란이며 한국전쟁 때 아무런 피해가 없었단다. 지금은 도로가 좋아져서 통행이 불편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워낙 깊은 골짜기여서 처음에는 전쟁이 난 것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에도 낙동강까지 밀려내려 간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다시 북진을 하는 길에는 잠시 들리기도 했지만, 마을 주변에서 전투는 없었다고 한다.

■ 세월의 이야기 켜켜이 쌓은 돌담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지역에는 ‘금당·맛질 반서울’이란 말이 전해온다. 금당실과 맛질(이웃 마을)에 예로부터 서울 버금갈 정도로 선비들이 들끓었던 데서 비롯한 말이라고 한다. 400여 년간 대과에 급제한 인물만 15명에, 진사·생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배출됐다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 들끓던 선비들의 높고 곧은 정신과 자세가, 깊고 서늘한 그늘을 드리운 낡은 한옥과 초가들에 그대로 전해온다.

금당실 마을은 옛 선비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고택들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정겨운 돌담길이 살아 있는 전통마을이다. 낡았으나 아름다운 한옥 12채와 흙벽으로 새 단장을 한 초가 8채가 미로처럼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이어진다. 한옥들이 밀집한 여느 지역 전통마을과 달리, 고택들이 현대식 주택이나 폐허가 된 집터 등과 뒤섞인 채 자연스럽게 낡아가는 모습이다. 번듯하게 수리·복원된 유명 한옥마을과 다른 그윽한 향기가 여기서 뿜어져 나온다. 무려 7㎞에 이른다는, 담쟁이덩굴 줄달음치는 돌담 안팎엔 호두나무·자두나무·밤나무들이 푸르고, 울타리뿐인 빈 집터엔 망초 꽃들이 마음껏 우거져 키 자랑을 하고 있다.

금당실마을은 정말로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흙을 섞어 깔끔하게 마무리한 담장이 있는가 하면, 돌을 생김새대로 올려놓은 담장도 많다. 돌담 위에는 늙은 호박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담장 아래는 채송화 백일홍 맨드라미 봉숭아 등이 예쁘게 피어 어디를 걸어도 고향집 어귀에 들어선 듯 정감이 넘친다. 담쟁이와 능소화 넝쿨이 돌과 담을 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덮어 마을 전체가 정원이고 식물원이다. 구석구석까지 마을을 가꾸고 다듬는 데 정성을 들인 주민들의 손길이 서려 있다.

 


한옥과 초가 등 고택과 어우러진 마을의 돌담을 돌아보면 살랑거리는 바람과 조잘거리는 새들도 돌담과 함께 소곤거리는 듯 했다. 그리고 돌담을 따라 유유자적 걷는 여행자들도 그 돌담과 각자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이러한 금당실마을의 돌담은 7.4km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돌담을 쌓은 형태나 돌의 크기와 모양 등이 모두 같은 형태의 돌담이 아니라 다양한 모양이라 더 즐겁고 호기심이 생기는 이유다. 특히 화사한 꽃이 돌담과 가지런히 서 있는 돌담이 있고, 담쟁이가 칭칭 감아 올라가 돌담의 흔적을 아주 완전하게 감춰버린 돌담도 있다. 돌담은 호박이 자라는 지지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고택과 고택, 초가집과 한옥을 잇는 7.4km의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사색하기도 좋은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단연 끝없이 이어지는 소박하고 투박한 돌담길이다. 돌담길은 마을 입구인 용문면사무소 옆 당산나무에서 시작돼 방사 형태로 뻗어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어 마치 미로와 같기도 하다. 이렇게 길이가 7.4km에 달한다는 돌담의 특징은 제주도의 돌담이 현무암으로 낮게 쌓은 담이라면 금당실의 돌담은 강가나 밭에서 나온 돌로 담장을 높게 쌓아 올렸다. 제주도보다 두 배 정도 높은 편이다. 옛날에는 한 번 들어서면 출구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돌담 사이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화를 보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일상 속 쉼표를 찾은 기분이 저절로 든다.

돌담길을 따라 마을의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반송재 고택을 만난다. 조선 숙종 때 도승지, 예조참판을 지낸 김빈이 낙향해서 살던 집이라고 한다.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주택의 가옥 배치법을 따르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구한말에 가세가 기울어진 자손들이 집을 팔려고 내놓자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이유인이 매입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이유인은 명성황후의 단골무당으로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라고 한다. 신령군의 치맛바람으로 벼락출세를 했던 인물이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아 양주목사, 경상감사, 한성판윤, 법부대신 등의 요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유인은 금당실에 99칸의 저택을 마련할 만큼 막대한 자금을 가진 재력가였으나 집을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을 반강제적으로 노역에 동원해 원성을 사기도 했다. 반감을 품은 일꾼들은 집의 기둥을 거꾸로 세워 집을 지었는데, 그 때문인지 이유인의 후손에 이르러서는 이 집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지금은 집터와 돌담 일부만 남아있지만 그 흔적만 보더라도 구한말 권력가의 높은 세도를 엿볼 수 있는 현장이다.

■ 홍수 막아주는 보배로운 소나무 숲
특히 이 마을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마을 서쪽에 빼곡하게 우거진 울창한 소나무 숲(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이다. 주민들은 이 숲을 ‘금당실 솔둥지’라 부른다. 한 주민은 “일부 언론에 이 숲을 ‘금당실 쑤’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우린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며 “대대로 솔둥지라고 불러왔다”고 말했다. 마을 서쪽에서 드는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조성한 비보림으로, 거센 서풍과 홍수를 막아주는 보배로운 숲이다. 용문중학교에서 용문초등학교까지 800m에 걸쳐, 구불구불 자라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본래는 2㎞가 넘는 길이의 대규모 솔숲이었다고 한다. 구한말 러시아 금광업자가 마을의 진산 오미봉에 금광 개발을 하려 하자, 주민들이 이를 결사적으로 막는 과정에서 금광업자 앞잡이 두 명이 죽었는데, 이 사건을 해결하느라 소나무를 베어 팔면서 송림 규모가 줄었다고 한다. 숲은 지금도 아름다워 봄가을 일교차가 큰 날 아침이면, 안개 자욱한 솔숲 풍경을 찍으려는 사진작가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마을 구석구석에 고인돌도 수두룩하다. 농경지 개발 과정에 묻히고 훼손된 것 말고도 집들 안팎에 고인돌 10여 기가 남아 있다. 금당실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선조들이 깃들어 살아온 곳임을 증명하는 유물이다. 소나무 숲과 마을의 굽이치는 돌담길을 한눈에 내려다보려면, 진산인 오미봉에 오르면 된다. 정자에 앉으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금당실마을 주민들은 고택 숙박체험과 밀랍초만들기·염색·솟대만들기·천연비누만들기·흑백사진인화 등 다양한 체험행사를 마련해놓고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주변에는 병풍바위와 연못(옛 하천)이 아름다운 정자 병암정, 국내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권문해가 세운 정자 초간정(죽림리), 내지리에 있는 고찰 용문사, 능천리의 초정서예연구원 등이 있다. 초정서예연구원은 대한민국 제5대 국새의 인문(글씨 부문)을 맡은, 서예의 대가 초정 권창륜이 후학을 가르치며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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