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강골 상징,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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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강골 상징,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지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08.1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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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21〉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은 1879년 8월 29일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 박철마을에서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萬海)다. 아명은 유천(貞玉)이며 용운은 출가 했을 때 은사 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다. 만해의 호적상 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형제로는 형 한윤경이 있었다. 

만해 한용운은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의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의 후손이었다. 몰락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한응준은 홍주(현재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으며, 집안은 몹시 가난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해의 집안은 형 한윤경이 일시적으로 가세를 일으켜 토지를 마련했지만 만해가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고 전해진다. 만해(卍海)는 일제강점기 시절 반일 강골 중에서도 지독한 강골이었다. 1940년 이후 일제의 폭압적인 상황에서도 창씨개명을 반대했고 조선인 학병출정을 끝까지 막으려고 했다.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을 조선총독부가 꼴 보기 싫다해 북향(北向)으로 자리했을 정도다. 이렇듯 만해는 죽을 때까지도 오롯한 독립정신을 지키며 일제에 저항했다.

유년시절에 관해서는 만해의 술회도 없는 편이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섯 살부터 성곡리의 서당골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아홉 살에 문리를 통달해 신동(神童)이라며 주변에서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열네 살이 되던 해인 1892년 풍속에 의해 홍주 학계리 지주 집의 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가정에 소홀했다고 전한다. 열여섯 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 만해는 홍주읍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을 낳았으나 만해는 출가했다. 후일 한보국이 부친인 만해를 보러 왔을 때 만해는 아들을  외면했다고 전한다. 

만해는 1894년에 가출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다. 그런데 만해의 아버지는 홍주감영 관군의 중군이 돼 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참여한다. 1895년 또는 1897년에 고향 홍주를 떠나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1896년(건양 1년)에 만해는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후일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자신의 술회에서 “나의 고향은 충남 홍주였다. 지금은 세대가 변하여 고을 이름조차 홍성으로 변하였으나…한양 가던 길을 구부리어 사찰을 찾아 보은 속리사로 갔다가 다시 더 깊은 심산유곡의 대찰을 찾아 간다고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까지 가서 그곳 동냥중, 즉 탁발승이 되어 불도를 닦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인 홍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일어났던 것으로 미뤄볼 때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운동이 실패한 뒤 한동안 오세암에 은신해 있다가 다시 고향 홍주로 되돌아왔다. 오세암에 머물면서 만해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 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했다. 1896년 하산해 더 큰 세상을 배우고자 시베리아 행을 결심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을 고비를 모면하고 1897년에 귀향했으나 거처가 없던 만해는 1901년 처가에서 2년간 은신하다가 가출한 이후 나중에 다시 재출가를 한다. 

1905년 을사조약 직후 홍주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아버지 한응준은 의병들에 의해 살해됐다. 그해 무작정 가출해 재입산, 백담사에 가서 김연곡(金連谷)을 은사로 해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됐고, 만화(萬化)에게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만해(萬海 또는 卍海)라 했다. 

현재 홍성의 만해 한용운 생가 터에는 바로 이러한 만해 선사의 어릴 적 삶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1992년부터 한용운 생가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을 사적화하기 위해 복원을 시작했다. 생가인 초가 외에 사당, 삼문, 관리사, 화장실 등을 건립했다. 한용운 생가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초가다. 방 2칸, 부엌 1칸으로 구성된 일자형 구조로 한용운이란 문패가 걸려있다.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댓돌과 툇마루도 정겨운 생가는 낮은 야산 잠방산을 등진 양지에 있다. 집 뒤 야산 언덕배기에 오르면 적송을 볼 수 있다. 방 안에는 한용운 영정과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있을 뿐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무소유의 삶’을 나타내는 듯한 분위기다. 부엌 옆은 장작을 쌓아두는 헛간, 사랑방 옆은 절구통과 맷돌이 보관된 헛간이다. 생가 앞에는 독립선언문을 들고 있는 한용운의 동상이 있고 사당과 민족시비공원, 만해문학체험관도 있다. 

충청남도는 1989년 12월 29일 만해 한용운 생가를 충청남도기념물 제75호로 지정했다. 홍성군에서는 홍성 12경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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