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역사문화도시 홍주,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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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역사문화도시 홍주,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비전
  • 취재=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0.09.0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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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역사를 담은 땅,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를 묻다 〈1〉
천년 홍주의 역사문화를 함축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홍주아문 전경.

 일제에 강제로 빼앗긴 고유이름 ‘홍주(洪州)’ 되찾기 운동 지속돼야
‘홍주’이름 되찾기, 1991년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논의만 계속돼
 홍주의 항일독립운동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외세침범에 대항한 정신
 지역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시민사회 중심 활발한 운동 전개돼야

 

천년역사문화도시 홍주의 정체성과 미래비전을 말하면서 우선 제기되는 것이 바로 지명(地名)과 관련된 정체성의 문제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탈당한 우리 민족의 주권과 생존권을 되찾고자 일어난 항일운동, 즉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출발점도 홍주라는 지역에서는 정체성의 본류라 하겠다. 바로 항일의식의 표출이 홍주의병(洪州義兵)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우선 지명(地名)이라는 것은 지역의 정서를 포함한 정체성을 담고 있다. 사람에게 이름이 중요하듯, 지명에는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오롯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홍주라는 지역에서 지명과 정체성의 문제는 홍주라는 고유지명을 지금까지 되찾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빼앗긴 고유한 지역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전국의 목사고을 가운데 단 한곳, 홍주만이 본래의 고유지명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지금까지도 ‘홍성에서 홍주로 지명을 바꾸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으나 홍성군은 시로 승격하는 시점에 홍주로 이름을 바꾸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실적으로 홍성군의 시승격 전환이 무산되면서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결단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홍주’이름 되찾기 30년 동안 논의만 
‘홍주’이름 되찾기 문제는 지난 1991년 1월 이상선 군수가 부임하면서 홍성군을 홍주군으로 바꾸자는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당시 홍성군은 그해 4월 3일 향토유적보호위원회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잃어버린 옛 고유이름인 홍주를 되찾자고 합의하면서 촉발됐다. 홍성군은 1992년 1월까지 홍주군으로 바꾸겠다는 안을 홍성군의회에 상정하기도 했다. 당시 군의회는 7월 25일에 ‘홍주이름되찾기검토특별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주민들은 찬반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해 7월 13일 ‘홍주지명 고찰을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홍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결성의 역사성을 계승하기 위해서라도 홍성 이름을 계속 써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시 절충안으로 홍성읍을 홍주읍으로 바꾸자는 주장도 제기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홍주이름 되찾기 사업은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던 것으로 알려진다. 1991년 9월 5일 결성면 주민 200여 명은 홍성군 명칭보존을 위한 결의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후 ‘홍성군명보존회’를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홍성군이 홍주군으로 바뀌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홍성이 시(市)로 승격될 때 홍주시로 옛 이름을 되찾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후 1991년 11월 9일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가 홍성군청 대강당서 충남도민과의 대화를 갖는 자리에서 이상선 군수는 홍주군으로의 지명 변경을 건의했다. 배석한 최인기 내무부차관은 “군민의 의사가 합의되고 군과 도에서 건의하면 홍주 이름을 찾기 위한 행정구역조정에 관한 법률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할 용의가 있다”고 긍정적 답변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993년 1월 13일 이상선 군수가 홍성군수직을 떠나면서 홍주지명 변경운동이 시들해졌다. 이후 11개월 15일 만인 1994년에 이상선 군수가 다시 부임했지만 6개월 만에 정치적인 이유로 충남도로 발령이 나 떠나면서 지명변경 논의는 유야무야 됐다.

이후 2012년 말 충남도청이 이전해 오고 충남의 행정기관이 홍성시대를 맞았지만 홍성군의 지병변경과 관련된 문제는 변한 게 없다. 조선시대 홍주(洪州)는 충청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경기 평택에서 서천까지 22개 군·현을 관할했던 행정, 교통, 문화, 군사 분야의 중심도시였지만 1914년 일제가 실시한 전면적인 행정구역 개편과 지명말살정책으로 홍주라는 본래의 이름을 잃게 됐다. 잃게 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일제에 의해 강제로 빼앗겼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최근까지도 지역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홍주지명 되찾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는 점이다. 지난 2014년 발족된 홍주지명되찾기 범군민운동본부는 홍성이라는 지명이 일제의 잔재로 천년 역사를 간직한 홍주로의 지명변경을 위해 ‘홍주지명되찾기 학술세미나’를 열고, ‘10만인 서명운동’ 등 본래의 고유지명인 ‘홍주’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했으나 현재까지는 답보상태다. 일제 잔재의 청산과 지역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홍주이름 되찾기 운동’이라는 핵심 현안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돼 지역의 정체성을 다시 되찾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 홍주의 항일독립운동은 국가의 정수
홍주의 항일독립운동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외세의 침범에 대항해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홍주의병은 1895년 10월의 ‘민비시해사건’과 11월의 ‘단발령’ 공포 직후 봉기했다. 홍주에서는 세 번의 의병 궐기가 있었다. 1895년의 을미봉기와 1905년의 을사외교권 박탈 때, 1907년의 한국군 해산때의 봉기가 그것이다. 1906년에는 홍주의병이 일본의 정규군과 맞서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의병이 당시 일본군 진지인 홍주성을 탈환한 것도 유일하며, 의병 대다수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도 바로 충청도 홍주였다.

일제는 을사조약을 늑결하기 1년여 전부터 한국의 주권을 빼앗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1904년 일본공사 임근조는 이른바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했다. 이는 50년간 우리나라 전국토의 3할에 달하는 진황지의 개간과 정리, 척식 등 일제의 경영권과 기타 모든 권리를 넘기라는 것이었다. 이는 의병봉기의 단초가 됐다. 이렇듯 홍주(洪州)는 반외세 투쟁이 처음 발발하고 그 성과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연속성을 갖고 있어 한국민족주의의 본향 내지는 발현의 고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산증거로는 기록된 역사가 있고, 유허지로는 홍주구백의병의 묘인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이 있어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어떻게 해서 그 많은 국토의 편린 중에서 충청도 홍주가 의병의 발상지가 되었을까. 충청도를 시발로 일어난 의병투쟁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 전면적인 전쟁상태를 선포하게끔 해 우리의 민족사를 살아있게 했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무력항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민족저항사의 원류가 되게 한 것도 의병이다. 의병은 국권이 강탈당한 이후에도 간도나 연해주로 옮겨가 항일투쟁을 벌이는 독립군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이는 1940년 중경의 임시정부가 광복군 창설 때 발표한 ‘한국 광복군총사령부 설립보고서’에서 의병이 바로 광복군의 시초라는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한 1918년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의군부의 ‘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서도 의병의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3·1운동의 원동력이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의병정신을 통해 독립투쟁사나 민중저항사의 시원지가 충청의병, 즉 홍주의병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홍주정신의 정체성과 사상을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홍성군에서는 지난 3년여 동안 홍주 지명 사용 1000년의 해를 맞아 기념사업을 했다. 2018년까지 67억 원의 예산을 들여 학술세미나 개최, 홍성을 빛낸 인물 발굴, 읍·면 대표놀이 발굴 등의 사업을 진행하면서도 정착 홍주지명 되찾기와 관련된 사업은 쏙 빠졌다. 홍주정신의 정체성과 사상을 외면한 일이다.

국가와 민족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고자 자발적으로 무장항쟁을 한 민병으로서 죽음을 각오하고 봉기했던 국가의 정수(精髓)인 의병정신과 항일 독립운동의 계승은 홍주지명 되찾기 운동과 더불어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비전인 홍주정신의 정수다.

근대성이 지향하는 창조적 파괴는 기존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형성되는데 중요한 원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이란 생활공동체이면서 문화공동체라는 점에서 혈연에 의한 분류인 종족과 다르고, 또 단순히 국가 소속원인 국민과도 다르다. 민족 구성원의 자각의식을 민족의식이라 하고, 그 민족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행동논리 또는 행동철학을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식은 대내적 동질의식인 동시에 인류의 평등이념으로도 연결되는 것이다. 결국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비전에는 인간의 삶, 즉 지역의 이야기와 역사, 사람살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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