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역사와 문화·명품 관광도시, 천년고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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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역사와 문화·명품 관광도시, 천년고도 진주
  • 취재=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0.10.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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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역사를 담은 땅,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를 묻다 〈6〉
비봉산에서 바라본 옥봉과 진주시 전경.

진주를 진주답게 만든 것은 진주의 역사와 정신문화가 정체성
동네마다 골목마다 샘솟은 이야기에서 진주의 ‘정체성’ 찾아야
진주성·유등축제, 진주대첩이라는 가장 치열했던 전투서 발원  
불의와 외세에 저항하고 인권 존중하려는 정신 지키고 살려야

 

사람에게 개성이 없다면 세상이 어떨까. 세상에서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어떨까.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개성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에게 개성이 있다면 지역에도 개성이라는 것이 있을 것인데, 바로 그것이 정체성(Identity)이다. 그래서 “진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신을 귀중하게 여기는 역사문화도시를 진주의 정체성으로 삼아야 하겠다.”

진주를 진주답게 만든 것은 바로 진주의 역사와 정신문화다. 고려시대에 발생한 노비의 난, 임진왜란의 진주성 싸움, 논개의 투신, 조선말의 농민전쟁 그리고 형평운동 등 이러한 사건 그리고 운동과 함께 흐르는 남명정신이 진주를 진주답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 개발과 발전, 황금만능의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진주를 진주답게 지킨 것은 눈에 보이는 고분과 유적이 많아서도 아니고 무형문화재가 많아서도 아닐 것이다. 바로 천년의 역사와 문화 속에 흐르는 불의와 외세에 대한 저항정신 그리고 인간에 대한 권리를 지키려는 인권 존중 정신이 도도히 흘렀기 때문이다.
 

진주시 전경.
진주시 전경.

■ 진주대첩과 유등축제, 진주의 ‘정체성’
임진왜란 때 최경회·김시민·고종후 장군들은 시민과 의병 3만 여명으로 그 몇 배나 되는 왜군에 맞서 싸웠다. 전라도에서 고경명 장군이 전사하자 뒤를 이어 최경회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로 왔고, 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다. 2차 싸움에서 고경명 장군의 큰아들 준봉 고종후는 전라도에서 의병 400여명을 이끌고 와 진주성에서 목숨을 바쳤다. 최경회의 후처(관기가 아니다)였던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축하잔치에 참여했고 적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꾀어 같이 남강에 뛰어들었다.

진주시민과 의병은 왜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임금부터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판에 나라를 지킬 의무도 없었던 시민이, 약삭빠르게 셈하여 그냥 항복하는 게 목숨도 구할 수 있었는데, 왜 그들은 목숨을 걸었을까.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가 버텨준 결과 왜군이 전라도를 통해서 북으로 가려는 계획에 크게 차질을 줬고, 조선이 망하지 않는데 큰 구실을 했던 것이다. 진주성 싸움에 성 안팎이 소통하려고 강에 등을 띄운 것에서 지금의 ‘진주유등축제’가 시작됐다고 전한다. 유등축제가 전국 최고의 축제로 자리 잡고 다른 나라에도 수출하는 명품 축제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데에는 이런 역사가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이 진주이고, 진주다움이며, 진주의 정체성의 한 단면이라 하겠다.

진주는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선조가 살아 면면히 이어온 역사성, 그 역사성이 삶에 배어 있어야 진주답지 않겠는가.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강조하면서 현대의 삶을 포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삶 속에 진주의 전통이 살아 있는 것, 다른 지역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게 하는 도시, 그것이 진주의 정체성이고 자부심일 것이다. 진주성과 유등축제는 모두 ‘진주대첩’이라는 임진왜란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에서 발원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 국민에게 ‘진주’란 진주대첩의 그림자에서 벗어 날 수 없는 도시일 수도 있겠다. 물론 진주대첩은 영광스러운 전투다. 진주의 백성과 김시민 장군이 똘똘 뭉쳐 몇 곱절에 달하는 왜군을 내쫓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전한 슬픔도 진주대첩과 함께한다. 이 영광과 슬픔을 함께 간직한 진주성의 역사는 ‘진주’의 이미지가 돼 진주와 함께 성장해 왔다. 하지만 ‘진주대첩’ 하나로 진주라는 도시를 정의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진주는 오래된 도시인만큼 영욕의 역사와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동네마다 골목마다 샘솟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진주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때까지 ‘진주대첩’이라는 역사적 기반을 통해 여러 산업을 쏟아냈지만, 더 풍성한 진주의 내일을 위해 다른 주춧돌들을 찾아야 할 시점이라는 설명이다.

■ 천년 동안 지켜온 진주다움의 정신
진주는 예로부터 경상남도의 물류중심지였다. 잠사업이 발달한 주변 지역에서 비단을 생산해내면 진주에서 소비됐고, 이는 ‘실크산업’을 진주의 중심으로 꽃 필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유등축제 또한 진주대첩 당시 통신수단으로 띄웠던 유등에 기인하며, 개천예술제 또한 뛰어난 예인들이 닦아놓은 진주문화의 역량을 바탕으로 발전해왔다. 이렇듯 진주를 대표하는 축제와 산업들은 모두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나온 것이며, 갑자기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산업들은 진주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 파워’를 잘 이용한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현재 실크산업과 개천예술제는 예전만큼의 활약을 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진주가 가지고 있는 ‘실크’나 ‘예술’을 보완하고 재정비하는 과정은 꼭 필요하지만, 진주를 대표할만한 새로운 소프트 파워를 찾아내는 일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진주에는 오래전부터 봉황에 대한 수많은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지금의 비봉산은 원래 대봉산이었다. 이름 그대로 봉황이 있던 산으로 고려 때 세력을 떨쳤던 진주 출신 인사들의 기운이 봉암(鳳巖)에 기인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진주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대봉산(大鳳山)을 봉황이 날아가 버렸다는 뜻으로 날 비(飛)자를 넣어 비봉산(飛鳳山)으로 바꾼 뒤 진주 진산의 기운을 날려 보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뿐만이 아니다. 진주엔 봉황을 상징하는 문화재와 관련된 전설이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누구도 진주와 봉황을 연결 짓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야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주 시민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적한다.

다른 지자체들은 ‘소프트 파워’를 길러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는데 진주는 갖고 있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가 많은 곳임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제 진주가 새로운 진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남강에서, 역사에서, 문화재에서, 동네에서 미래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주춧돌을 발견하고 다듬어야 할 것이다. 진주의 정체성을 키우는 ‘소프트 파워’를 기르는 일이 선행돼야만 진주의 미래 산업과 문화, 역사의 튼튼한 기반을 다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진주는 천년 동안 지켜온 진주다움이 사라져 가고 있다. 진주를 진주답게 만드는 방법은 불의와 외세에 대해 저항하고 인권을 존중하려는 정신을 지키고 살리는 것이다. 민선 7기 진주시는 문화예술의 도시 명성에 걸맞게 누구나 두루 찾는 매력적인 역사문화 관광도시로의 힘찬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13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진주의 강점은 남강과 진양호 등 천혜의 자연환경과 다양한 역사문화자산이다. 진주는 이러한 역사문화자산을 바탕으로 진주만의 독창적인 킬러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비거테마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비거’를 문화관광 콘텐츠로 관광자원화 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목적도 있지만 망경공원을 장기미집행 도시공원 일몰제에서 해소하기 위해 진주시 망경동 산 29-3번지 일원에 5년간 총 700억 원의 예산을 투입, 망경공원 101만 2000㎡을 매입해 100억 원의 사업비로 도로개설·주차장 조성·공원조성 부대시설 등을 조성하게 된다. 야심차게 계획하고 있는 비거테마공원은 망경공원 면적의 15%정도에 복합전망대, 유스호스텔, 모노레일, 비거형 짚라인 등을 건립하고 소요되는 470억 원은 공공·민간투자유치로 충당할 예정이라고 한다. 진주는 부강 진주 3대 프로젝트(진양호 르네상스·구 진주역 철도재생·원더풀 남강 프로젝트)와 더불어 역사문화와 관광이 함께하는 명품 비거테마공원이 조성되면 진양호와 진주성, 남강변 일대가 관광벨트화 돼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 관광산업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 일부에서 비거를 관광자원화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이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비거’는 바람을 타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수레로 정의된다. 구전돼 오다가 1800년대 이규경 선생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된 이후로 역사서, 교양도서, 백과사전, 어린이 책, 국립과천과학관, 공군사관학교박물관, 논산백제군사박물관 등에 게재·전시돼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앞으로 스토리텔링을 통해 비거를 진주의 새로운 문화·관광콘텐츠로 개발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함께 문화·관광도시로서의 품격을 더욱 높여 나갈 계획이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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