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솜리·춘포마을, 근대역사문화 품고 부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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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솜리·춘포마을, 근대역사문화 품고 부활하다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2.05.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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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보존·관리할까 〈5〉
일제강점기 당시 동이리역을 거점으로 농장을 경영했던 대교농장의 사택이다.

‘솜리’는 전북 익산의 옛 이름, 10호 정도 거주 한적한 마을
근대역사박물관, 1922년 건립 삼산의원 건물 절단·해체 이전
익산근대역사문화 여행출발점 춘포역, 익산·전주 연결 전라선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 10개 시설·건축물 문화재 등록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주현동·인화동 일대 2만1168.2㎡)은 1899년 군산항 개항, 1914년 동이리역 건립 등을 거쳐 번화했던 솜리시장 일대다. 광복 이후 형성된 주단과 바느질거리 등 당시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건축물이 모여 있다. 1919년에 4·4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이 공간 내 ‘옛 대교농장 사택’과 ‘옛 신신백화점’ 등 근대도시 경관과 주거 건축사, 생활사 등에서 문화재 가치가 뛰어난 10건은 별도의 문화재로 등록됐다.

백제와 마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문화도시 익산의 ‘익산 근대역사박물관’은 1922년에 건립된 삼산의원 병원 건물로 100개의 조각을 내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 삼산의원은 2층 건물로 건축 벽면에 수평의 띠 모양을 돌출시킨 코니스 장식을 두르고, 건물 입구의 포치와 1, 2층 창문은 모두 아치형을 이루면서 중앙부에는 다양한 문양을 장식해 당시로써는 파격적이고 멋진 건물로 꼽혔다. 이 건물의 역사적 가치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서양의 고전적 건축양식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건축 구성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어 건축양식사적 가치가 있다. 해방 이후 한국무진회사, 한국흥업은행, 국민은행으로 그리고 식당으로 사용했다. 삼산의원의 가치를 평가해 지난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건물 보존을 위해 조적 건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절단 해체해 이전했다.

‘솜리’는 전북 익산의 옛 이름으로 10호 정도가 거주하는 한적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899년 군산항이 개항한 이후 마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군산과 전주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작은 시장과 마을이 형성됐다. 또 1914년 동이리역이 생기면서 번화한 솜리시장이 들어서기도 했는데, 이곳이 발전해 현재 남부시장 일대를 이루고 있다.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광복 이후 형성된 주단거리, 바느질거리 등 삶의 모습과 당시의 건축물이 집중 분포돼 있어 과거 지역의 역사문화와 생활사를 엿볼 수 있어 보존과 활용가치가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2020년부터 5년 동안 문화재 보수정비, 역사경관 회복 등 다양한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 익산 근대 여행의 출발점, ‘춘포역’
익산의 근대역사문화 여행의 출발점인 ‘춘포역’은 일본인들이 붙인 ‘오오바역(大場驛)’이라는 이름으로 개통해 당시 ‘이리’였던 익산과 전주를 연결하는 전라선 보통역으로 출발했다. 주요 목적은 쌀 수탈이었고, 일본은 이곳에서 수탈한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 나르거나 수탈을 위해 필요한 물자들을 이 춘포역을 통해 들여 왔다. 역 이름은 대장역으로 불리다 1996년 춘포역(春浦驛)으로 개칭했다. 춘포역 일대는 익산의 근대 이야기의 보고(寶庫)다. 1914년에 지어진 춘포역은 켜켜이 쌓인 시간만큼 공간에 얽힌 사연이 깊다. 오래도록 ‘대장역’이라 불렸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춘포역 주변은 드넓은 평야로 이뤄졌다. 남쪽으론 호남의 젖줄인 만경강 물줄기가 이어진다. 비옥한 땅은 벼농사 짓기에 최적이었고, 토지 조사를 마친 일본인들은 지금의 춘포면 일대에 대규모 농장을 건설·운영하며 그들만의 세상으로 삼았다. 수탈의 역사부터 춘포역을 통해 익산 섬유공장으로 통근하던 여공들이 많아 ‘딸촌’이라 불렸다던 이야기까지, 춘포역 이야기를 담은 자료들이 역사 안팎에 전시돼 있다. 슬레이트를 얹은 맞배지붕의 춘포역사는 일제강점기 소규모 철도역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등록문화재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驛舍)이기도 하다.

춘포역이 있는 춘포마을은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흔적과 해방 이후 근대 농촌 지역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산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 호소카와 농장 주임관사, 익산 춘포리 옛 일본인 농장가옥(등록문화재·에토 가옥)과 춘포도정공장(옛 대장도정공장 또는 호소카와 도정공장)은 100여년 전 이야기를 ‘소환’한다. 일본인 농장가옥 등은 일본인 대지주 호소카와 가문이 농장 운영을 위해 지은 곳이다. 2층 목조건물은 1920년대 일식 가옥의 원형과 당시 쓰였던 자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골목 안쪽엔 108년 세월을 이고 지고 온 양철 지붕의 ‘춘포도정공장’이 있다. 이 역시 호소카와 모리다치가 세웠다. 지상 1층, 연면적 3852㎡의 큰 규모로 해방 직후 ‘신한공사’로 시작해 소유자만 몇 차례 바뀌었을 뿐 주로 정부양곡도정업을 해오다 1998년 문을 닫았다. 한동안 방치돼 있던 이곳은 몇 해 전 새 주인을 만나면서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세 곳 모두 사유지인 데다 시설 보존을 위해 전면 개방하지는 않지만, 춘포도정공장의 경우 전시나 문화 행사가 진행되는 기간에 한해 탐방이 가능하다. 춘포마을엔 1902년 첫 예배를 올린 ‘대장교회’를 비롯해 ‘대장미용실’ ‘대장촌 중국집’ 등 여전히 ‘대장’이라는 옛 지명을 사용한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일제강점기 당시 ‘오오바역(大場驛)’이라는 이름으로 개통했던 ‘춘포역’.

■ 익산 솜리·춘포마을 근대역사문화공간
익산 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옛 대교농장 사택(등록문화재 제763-1호)’과 ‘옛 신신백화점(등록문화재 제763-2호)’ 등을 포함해 근대도시 경관과 주거 건축사, 생활사 등에서 문화재 가치가 뛰어난 10건은 별도의 문화재로 등록됐다. 옛 대교농장 사택은 주거·숙박시설이다. 일제강점기 동이리역을 거점으로 농장을 경영했던 대교농장의 사택이었다. 옛 신신백화점은 옛 대교농장 사택에서 한복거리로 직진 1분 정도 거리다. 1960년대 건립된 2층 건축물로 보석판매점을 거쳐 지금은 한복 판매점과 다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익산 평동로 근대상가주택 다섯 동(평동로 근대상가주택1, 등록문화재 제763-3호;최초 양은공장 현 금풍상회, 평동로 근대상가주택2, 등록문화재 제763-4호;형제상회, 평동로 근대상가주택3, 등록문화재 제763-5호;서울양행, 평동로 근대상가주택4, 등록문화재 제763-6호;고전방, 평동로 근대상가주택5, 등록문화재 제763-7호;현 영재식품 건강환), 익산 보화당한의원(등록문화재 제763-8호, 옛 건조창고), 익산 옛 이리금융조합(등록문화재 제763-9호), 익산 인북로 근대상가주택(등록문화재 제763-10호, 신광닥트 함석공사) 등 10개 시설과 건축물은 별도의 문화재로 등록됐다.

익산근대역사관에는 1896년 대장촌의 ‘이마무라 농장’을 시작으로 1918년까지 이리에만 무려 13개의 농장이 세워진 이유와 도시 변천사가 자료 형태로 전시돼 있다. 군산항 개항으로 일본인들이 군산, 전주, 익산지역으로 이동하며 대농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수확한 쌀을 보다 효율적으로 일본에 '빼돌리기 위해' 전라선과 호남선 철로를 건설하게 된다. 익산은 경주, 부여, 공주와 함께 우리나라의 4대 고도 중 한 곳이지만, 익산역이 개통되고서야 열 가구 남짓하던 익산의 인구가 늘면서 근대도시로 성장했다.

일본의 농업수탈로 대표되는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토지를 수탈한 뒤 일본인 빈농들을 이주시켜서 그 밑에 한국 소작농을 두어 농장을 경영하는 방식을 취했다. 1926년까지 무려 30만 명의 한국인이 농토와 경작지를 빼앗기고 만주로 쫓겨 갔으며 일본인 농민은 1만 호 가까이 늘어났다. 1922년에는 한국 근대농업의 한 획을 그은 이리농림학교가 개교를 했다. 이리농림은 수원농림, 진주농림과 함께 조선의 3대 명문이었다. 이리농림은 근현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1920년대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에 힘입어 익옥수리조합이 결성되면서 대간선 수로가 건설됐다. 100여 년이 가까워져 오는 지금까지도 농업용수와 산업용수로 쓰이고 있다. 어마어마한 쌀이 생산되니 일본인들은 큰 마당이라 대장(大場)이라 부르며 군산의 쌀 저장고인 장미동(藏米)까지 보내느라 굉장히 번화하고 융성한 동네였다. 철도 노선을 두고 벌인 당시 일본인 농장주들의 암투로 김제에서 삼례를 통과하기 원했던 동산농장의 이와사키와 대야를 통과하길 원했던 군산농장의 오쿠라의 대립으로 그 중간인 솜리(이리)로 열차가 통과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아무튼 솜리·춘포마을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지정을 계기로 익산과 군산, 전주의 근대문화유산 인프라를 연계, 역사문화관광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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