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의 중심이자 상징, 아흔아홉 암자 번성했던 ‘가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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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 중심이자 상징, 아흔아홉 암자 번성했던 ‘가야산’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7.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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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5〉
서산과 예산에 걸쳐 있는 ‘가야산’

충남 서산과 예산에 걸쳐 있는 가야산(伽耶山, 678m)은 백두대간 속리산 천왕봉(1058m)에서 뻗어 나온 금북정맥 상에 있으며, 충남 서북부의 북·남 방향으로 덕산도립공원에 속하는 소규모 가야산맥이다. 규모는 작지만 주변에 많은 역사문화유적을 간직한 명산으로 꼽힌다. 주봉인 가야봉을 중심으로 원효봉(元曉峰, 605m), 석문봉(石門峰, 653m), 옥양봉(玉洋峰, 593m) 등의 봉우리가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 56)은 저서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 내포(內浦)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했다. 내포는 서산과 예산의 경계를 이루는 가야산(伽耶山)이 품은 열 고을을 이르는 말이다. 홍주, 서산, 해미, 태안, 면천, 당진, 덕산, 예산, 신창 등이 그곳이다. 이중환은 “이곳(내포)의 땅은 기름지고 평평하면서도 넓으며, 소금과 물고기가 많아서 대를 이어서 사는 사대부가 많다”고 평했다. 그만큼 문물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곳이란 의미다.

이곳에 펼쳐진 가야산은 내포의 중심이자, 내포를 상징하는 산으로, 옛날엔 아흔아홉의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야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지내던 중사(中祀)의 대상 중 하나였다. 중사는 국토의 네 방위에 있던 명산에 지내던 제사인데, 서쪽 명산이 가야갑악(伽耶岬岳), 즉 가야산이다. ‘가야’라는 이름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부다가야(Buddhagaya) 인근 가야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야산’은 ‘상왕산(象王山)’으로도 불리는데, 원래 가야산과 상왕산은 서로 맞닿은 다른 산이지만, 예로부터 두 산을 아울러 가야산이라고도 불렀다. ‘가야’라는 이름이 불교에서 유래했듯, ‘상왕’이라는 이름도 불교에서 기원했다. 가야산 주변에는 상왕산, 원효봉 등 불교와 관련 있는 지명이 여럿 남아있고, 가야사지, 보원사지, 원효암지, 백암사지, 개심사, 일락사,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등 여러 불교 유적과 유물 등이 있다. 흔히 가야산을 ‘호서불교의 성지’라고 부르는 것도 ‘가야’와 ‘상왕’이라는 이름의 두 산과 그 품에 자리한 수많은 불교 유적과 유물 때문일 것이다.

내포문화숲길은 내포의 역사와 문화, 생태를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서산시와 당진시, 홍성군과 예산군 등 4개 시·군이 함께 개설한 국가숲길이다. 내포문화숲길은 ‘원효깨달음길’과 ‘내포천주교순례길’, ‘백제부흥군길’과 ‘내포역사인물동학길’ 등 4개 테마길로 나뉘는데, 그중 ‘원효깨달음길’ 제5코스는 예산의 덕산도립공원 주차장에서 가야사지(伽耶寺址)와 보원사지(普願寺址),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거쳐 용현계곡 입구에 이르는 10km 거리의 숲길이다. 예산 덕산면 상가리 덕산도립공원주차장에서 출발해 800m쯤 오르면 가야사의 옛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발굴조사 이후 한곳에 모아둔 석조 부재와 안내문이 이곳이 절터임을 알려줄 뿐 절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신라 때는 가야산사를 짓고 중사(中祀; 나라에서 지내던 제사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덕산현감이 봄과 가을, 고을 관원을 시켜 제를 올렸던 곳이다. 능선을 따라 피어있는 진달래와 억새풀 등 경치가 수려하다. 덕숭산(德崇山, 495m)과 함께 1973년 3월에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제 때 상왕산(象王山)이라 불렀는데, 신라통일 이후 이 산 밑에 가야사를 세운 뒤 가야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가야산은 북쪽으로는 일락산(日樂山, 521m)·상왕산(象王山, 307m)·아미산(峨嵋山, 350m), 남쪽으로는 삼준산(三峻山, 490m)·결봉산(202m)에 이어진다. 편마암으로 구성된 가야산맥은 충남의 서북부를 남북으로 달리면서 내포(內浦)와 태안반도(泰安半島)의 경계를 이룬다. 동사면을 흘러내리는 물길은 삽교천(揷橋川)을 통해 아산만으로 배수되고, 서사면의 물길은 천수만(淺水灣)으로 흘러간다.

가야산 정상의 북측은 2∼3m 크기의 토어(tor)와 3∼4m 크기의 암주들이 발달해 있고, 가야산 정상의 남측 급사면에는 35m 규모의 암벽(岩壁)이 있는데, 이곳에 2m 내외의 토어들이 집단적으로 나타난다. 가야산에서 석문봉에 이르는 능선은 대부분 두꺼운 토양층으로 형성돼 있지만, 차별침식과 풍화에 비교적 저항력이 강한 암석들이 토양층 위로 노출돼 있다. 부분적으로 20m 정도의 높이와 폭으로 된 암석단애들이 발달했으며, 단애의 상층부에는 절리의 형태에 따라 각진 모습의 토어들이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석문봉은 가야산 봉우리 중에서 가장 바위가 많은 봉우리로, 가야산 쪽으로는 암릉을 이루고 서남쪽은 단애를 형성했다. 

가야산 자락의 덕산면 상가리에는 조선조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충청남도기념물 제80호)가 있는데, 1868년 5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E.J.)가 아산만을 거쳐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해 도굴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가야산에는 백제시대 마애석불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국보 제84호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한 보원사지, 개심사, 일락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국보 1점, 보물 6점, 기타문화재 4점 등 각종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내포문화권의 핵심지역으로 꼽히는 곳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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