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면천읍성 복원, 역사문화·관광도시로 ‘면모 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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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면천읍성 복원, 역사문화·관광도시로 ‘면모 일신’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8.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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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10〉
당진 면천 ‘면천읍성’
지난 6월 면천읍성 복원 마무리 사업으로 완공된 면천객사.

당진의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서해안권 내포지역의 대표적인 정치, 군사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던 600년 역사를 간직한 읍성(邑城)이다. 

면천은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당진에 맞먹는 중요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예당(예산과 당진)평야의 중심에 있어 당진, 신창, 덕산, 예산을 잇는 교통의 중심 요충지였다. 당진은 서산, 태안 등과 더불어 옛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바닷길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과의 통상에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방상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면천읍성은 고려시대 충렬왕 16년(1290)에 세워졌다고 하나 실은 백제 초기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면천읍성은 세종 21년인 1439년에 조선시대 당진지역의 중심지였던 면천군의 치소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동, 서, 남, 북의 4대문까지 갖춘 성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면천에 읍성이 있었던 것은 이곳이 1914년까지 당진에 버금가는 주요 군소재지였기 때문이다.
 

면천읍성 전경.


■ 면천지역, 동학운동 근거지로 이름 높아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당진지역의 중심지였던 면천군의 치소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이 분명하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비변책인 청야입보방책에서 벗어나 국가적인 역점사업으로 시행된 연해읍성 축조과정에서 축성됐다.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축조된 둘레 1336m의 정방형에 가까운 방형 평면을 가진 평지성으로 문헌 기록과 일치하게 읍성을 축조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기능을 유지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파괴됐다.

면천읍성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1797년부터 3년간 면천군수로 재직하며 실학사상과 농업을 전파하고 천주교를 보호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내포지역 동학운동의 근거지이자 항일의병활동의 무대였다. 특히 3·10 면천학생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

면천읍성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은 면천주민들의 민족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전투라고 할 수 있다. 면천지역은 동학운동의 근거지로 이름이 높다. 

특히, 1894년 10월 면천 승전목에서 일어난 ‘승전목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게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면천지역뿐 아니라 동학농민운동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는 전투로 남았다. 

또한, 면천지역은 항일의병의 무대로 최구현 의병장이 활약한 장소다. 1906년 5월 10일 최구현 의병장은 면천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막혀 소난지도로 패퇴하게 된다. 이후에도 의병활동이 꾸준히 진행됐으며, 이 과정에서 면천읍성은 의병과 일본군의 주요 접전지역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면천읍성은 지난 1993년 충청남도기념물 제91호로 지정돼 보존·관리되고 있다. 당진시에서는 오래전부터 면천읍성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에 주목하고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지난 1999년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면천읍성 연구의 기본 토대를 마련한 것을 시작으로 2004년 서벽구간 서치성 60m를 정비했다.

지난 2007년 이후에는 내포문화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면천읍성정비복원기본계획’을 수립해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2012~2014년 남벽(135m)과 남문(46.45㎡)를 복원했고, 2015년까지 읍성 내 영랑효공원 조성을 완료했다. 2017년부터는 성안마을조성사업을 추진하고자 성안마을 대상지를 발굴조사를 통해 2018년까지 장청과 성안마을 1차분 조성을 완료했다. 

계속해 2019년부터는 서남치성과 관아 복원 등을 위해 철거한 서남치성 구간과 철거한 면천초등학교 문화재 조사를 거쳐 서벽과 남벽 구간을 잇는 서남치성(130m) 복원을 2020년 마무리했고, 객사복원을 진행했다. 올해(2022년)에는 남동치성과 동벽 구간도 복원했다. 
특히 충청유교문화권 광역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2020년 문화재 발굴과 수차례의 문화재위원 자문을 거쳐 관아시설 중 가장 중요한 객사 복원을 마무리하고 지난 6월 16일 준공식을 가졌다. 
 

면천관아의 문루였던 누각 풍락루.


■ 읍성, 2012년부터 10년동안 복원
객사는 지방관아 건물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 중 하나다. 객사는 중앙에 정청과 좌우에 익헌이라는 건물로 구성되는데 정청은 임금의 궐패와 전패를 모셔놓는 곳이고, 익헌은 중앙관리나 사신을 모시는 곳이다. 

특히 고을 수령이 정청에서 초하루와 보름날 왕궁을 향해 향망궐배를 했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정통성이 깃든 공간이며, 중앙집권과 지방행정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면천객사는 1433년(세종 15)에 처음 세워진 이래, 다섯 차례 중수를 거쳐 1622년에 다시 지어졌으며, 1911년 일제 강점기 면천공립보통학교로 사용되다가 1972년 면천초등학교가 현대식 건물로 확장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특히 면천지역에서 객사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바로 3·10 면천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면천공립보통학교가 위치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의 정신문화를 말살하고 식민지 교육을 위해 우리의 문화유산을 일본식으로 개조해 사용했는데, 면천읍성의 객사도 일제가 1911년 개조해 면천공립보통학교를 세웠다.

당진시는 지난 2007년부터 내포문화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면천객사 복원을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했으며, 2013년 교육청과 면천초등학교 이전협약 체결, 2018~2019년 매입·철거, 2020년 발굴조사를 거쳐 올해 6월 준공함으로써 마무리했다. 논의가 시작된 2012년부터 10년에 걸쳐 객사가 준공됐다. 새롭게 복원된 면천객사의 규모는 정청 3칸, 서익헌 3칸, 동익헌 5칸 등 11칸으로 면적은 총 207㎡다. 객사의 복원은 1969년 당시 면천 주민들의 소망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면천읍성 복원공사와는 별도로 문화재청 생생문화재 사업 등이 공모사업으로 선정돼 면천읍성에서 다양한 문화공연과 체험교육 등이 함께 추진되고 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역사문화 체험, 면천향교 활용프로그램, 면천군수 연암 박지원과 골정지, 향교에서의 예절교육, 문화재 활용사업 등 다양한 콘텐츠가 진행된다. 특히 성안마을 한옥스테이, 전통음식점 등의 조성, 활용사업을 더욱 활성화해 면천읍성을 통한 새로운 역사문화·관광도시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복안이다.
 

면천읍성 둘레길.
면천군지 표지석.
면천 군자정.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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