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부흥운동 최후의 격전지 ‘임존성’ 백제정신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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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운동 최후의 격전지 ‘임존성’ 백제정신 지켰다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9.1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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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14〉
예산 대흥·홍성 금마 사이 봉수산 ‘임존성’
백제시대 성터 둘레의 흔적이 남아있는 봉수산의 모습.

내포문화숲길 백제부흥군길에는 백제시대 성터 둘레의 흔적이 남아 있는 봉수산이 펼쳐져 있어 역사의 숨결이 오롯하다. 백제부흥군길에서는 물안개가 피어나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예당호반이 한눈에 들어오며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는 백제의 혼이 담겨있는, 백제 부흥운동군의 최후 격전지였던 임존성(任存城, 사적 제90호)이 펼쳐져 있는 봉수산(鳳首山, 일명 대흥산·484m)이 있다. 

1300여 년 전 백제인들이 밟았던 성벽 돌이 아직도 옛 아픈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옛 성벽 돌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주기 위해 새로 보수한 2.5㎞에 이르는 성벽 둘레 길을 트레킹하면서는 옛 백제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아직까지도 아픈 역사의 산이다. 

이 산은 산세가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봉수산으로 불린다. 예산군 대흥면과 홍성군 금마면 사이에 솟은 봉수산에 쌓은 임존성은 퇴메식 석성이다. 일부 복원된 구간을 제외하면 무너져 내린 옛 성곽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백제 유민의 한(恨)과 투혼, 그리고 배신과 좌절이 겹겹이 서리고 맺힌 성이다.

지금의 봉수산은 보수된 임존성의 성곽길을 따라 높지 않은 둘레길 코스가 아기자기해 오히려 심신을 달래는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있고 전망도 빼어나다. 정상에 서면 내포의 땅이 내려다보이며 예당저수지와 예당평야, 금북정맥의 산줄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서쪽의 성곽은 최근 복원해 옛 모습이 사라졌다. 동북쪽과 북서쪽의 나머지 구간에서는 무너져 내린 옛 성곽의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임존성은 새롭게 복원해서 오히려 길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듯하다. 백제부흥의 한이 서린 역사의 터전인 이곳에 옛스러움이 사라지니 감동도 쇠락하는 것일까. 복원한 임존성의 계단식 성곽길을 잠시 오르면 널찍한 잔디밭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옛 우물터가 발굴됐다. 또 이 근처 성벽 밑에는 축성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바로 ‘묘순이 바위’에 얽힌 얘기다.

옛 우물터 근처의 성벽 아래쪽에는 ‘묘순이 바위’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도 어떻게 보면 한이 서린 채 앉아 있다. 사연인즉 ‘옛날 대흥현 고을에 엄청난 힘을 가진 장사인 묘순이 남매가 쌍둥이로 태어나 살았다고 한다. 그 시대에는 남매 쌍둥이 장사가 함께 살 수 없었던 시대로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하는 운명이어서 남매는 목숨을 걸고 시합을 했다고 한다. 누이인 묘순이는 성을 쌓고, 남동생은 천릿길인 한양에 다녀오는 시합이었다. 그래서 묘순이는 남동생을 이기기 위해 열심히 성을 쌓았고, 이제 성돌 하나만 올려놓으면 성이 완성될 무렵 묘순이 어머니는 한양에 간 아들이 시합에서 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시간을 늦추기 위해 묘순이가 좋아하는 종콩밥을 해서 먹이기로 했다. 종콩밥을 거의 먹을 무렵 남동생이 성 가까이 온 것을 본 묘순이는 깜짝 놀라 마지막 바위를 옮기다가 그만 그가 옮기던 마지막 바위에 깔려 죽었다’는 애절한 전설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묘순이 바위’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애절하도록 서글픈 사연이 깃든 ‘묘순이 바위’가 임존성의 성돌 밑에 받쳐져 있는 모양새다. 지금도 묘순이 바위를 돌로 두드리면 “종콩밥이 웬수다”라며 흐느끼는 듯한 울림의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여자보다는 남자를 더 생각하는 남존여비 사상의 대표적인 서글픈 전설이 설화로 전해오고 있다.
 

임존성 백제 복국운동 기념비.


■ 백제 부흥운동 최후의 격전지
임존성은 주류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지이자, 백제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성이었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무릎을 꿇은 660년, 흑치상지와 의자왕의 사촌 복신, 승려 도침이 임존성에 백제 유민을 이끌고 모여 3년 반에 걸쳐 결사 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당나라 소정방 군대도 신라 김유신 군대도 “군사가 많고 지세가 험해서 이기지 못하고”(삼국사기) 퇴각해야 했던 성(城)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말은 허무했다. 복신·도침·풍왕자의 대립과 유혈극, 흑치상지의 당나라 투항에 이은 역공으로 성은 함락(663년)돼 백제 부흥운동은 여기서 끝이 난다. 우리 역사에서 한 번 망한 왕조(王朝)가 재기한 사례는 없다. 멸망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후삼국 시대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전해지며, 삼국유사 등 일부 문헌의 기록으로는 ‘백제의 첫 도읍지’란 주장도 있어 주목되는 점이다.

임존성의 남서쪽 일부 성곽은 최근 복원해 옛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봉수산 동북쪽과 북서쪽 나머지 구간에서 무너져내린 옛 성곽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봉수산 등산로는 봉수산 휴양림 쪽으로 오르는 코스와 대련사 쪽 코스, 마사리(광시면) 쪽으로 오르는 임도 등 5개 코스가 있다. 마사리 쪽에선 굽이 심한 임도를 따라 차로 성벽 밑까지 오를 수 있다. 성곽은 봉수산 정상 남동쪽 사면에 동서 방향의 길쭉한 타원형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깥쪽만 성돌을 쌓고 안쪽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퇴뫼식 석성이다.

복원한 성벽 아래쪽에선 옛 수로의 모습만 보이고, 성안 쪽 바위 밑엔 꽤 많은 물이 고인 샘터가 있다. 왼쪽 성곽을 따라 오르다가, 중앙부의 숲길을 관통해 북쪽 성곽을 오른 뒤 북문 터를 거쳐 서남쪽 성곽을 타고 내려올 수 있다. ‘웬수산’(원수산). 임존성 남쪽에 바라다보이는 내성산(384m)의 별칭이다. 이 산에 오르면 임존성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나당연합군이 이를 활용해 임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 산을 ‘웬수’로 여기게 됐다고 한다. 산이 그곳에 있었던 게 죄는 아닐진대, 진짜 ‘웬수’ 흑치상지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을 산에 풀었던 건 아닐지 모를 일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 땅이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내포 땅이 바로 지금의 충남 예산 땅이고, 홍성 땅일 것인데, 이곳에는 삼국시대 백제 부흥의 꿈이 좌절된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1300여 년 전 백제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되면서 의자왕은 무릎을 꿇었고, 백제 유민들과 왕자는 전리품으로 당나라에 끌려갔다. 하지만 당시 백제 유민들은 신라와 당나라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 백제 ‘복국운동(復國運動; 부흥운동이라고도 함)’의 중심세력은 바로 지금의 충남 예산 땅이고, 홍성 땅인 임존성(任存城)이었고, 마지막 장소도 바로 봉수산을 둘러싸고 있는 ‘임존성(任存城)’이었다. 백제 유민의 한과 투혼, 그리고 배신과 좌절이 겹겹이 서린 백제인들의 한(恨)이 맺힌 성(城)이다.

임존성(任存城)의 결사 항전은 백제 멸망사의 일대 반전이었다. 부흥(복국)군을 이끌고 있던 지수신(遲受信)은 모든 사람이 배반을 했어도 끝내 무릎을 꿇지 않았다. 지수신의 의지는 5000결사대와 함께 산화한 황산벌 계백 장군의 투혼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당에 항복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 등에 의해 임존성은 마침내 함락됐고, 지수신이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끝이 났다. 결국 백제정신을 지킨 것은 ‘임존성(任存城)’이었다.
 

작은 사진은 임존성 ‘묘순이 바위’.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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