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옛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유산이 즐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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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옛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유산이 즐비하네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2.09.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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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보존·관리할까 〈10〉
영해장터거리 근대기 건물.
영해장터거리 근대기 건물.

옛 영해장터거리, 100년 전 근대역사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어
2020~24년 450억 원 투입 국내 최대 근대역사문화관광지 조성
옛 영해금융조합, 영해양조장 등 근대도시 경관·주거건축·생활사
지역 언론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인 ‘영해언론인협회 지국’ 눈길

 

근현대 문화유산은 현대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멸실되거나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1970년대 들어 근대화 과정에서 긍정적인 시각과 사고,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근대건축물 등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시작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1990년대 이후에는 언론과 학계, 시민단체 등에서 근대건축물에 대한 보존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문화재의 보존과 사유재산권 보호 사이의 조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등록문화재 제도가 도입되기도 했다.

결국 근현대 문화유산을 평가하는 목적은 ‘남길 것과 부술 것’을 가리기 위함일 것이다. 역사가 짧은 근현대 유산은 대체로 다시 쓸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유물처럼 박제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등록문화재 취지 자체도 ‘일상생활에 맞게 다양하게 활용해 문화재를 적절히 보호한다’(문화재청)는 데 있다.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관광자원화’나 ‘지역자산화’도 강조된다. 근현대 유산이 ‘돈이 된다’고 손짓하는 셈이다. 하지만 수십년 된 건축물을 새로운 용도로 쓰는 데는 여러 제약이 따른다. 건축물 본래 용도를 바꾸려면 내부 구조가 바뀌어야 하고, 처음 지었을 당시와는 필요한 주차공간이나 설비 조건도 다르다. 현실적 요구에 맞춰 개량하다 보면 고유의 정체성을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현대의 다양한 문화유산이 현대와 잘 조화된 모습으로 원형을 잘 보존하기 위한 일환으로 근대역사문화 재활성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근현대 역사문화유산 등에 대한 역사문화 자원을 보존하고 활용해 지역재생 활성화 모델을 창출하기 위해서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의 옛 영해장터거리에 가면 100년 전의 근대역사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또 3000여 명이 울부짖는듯한 만세의 함성이 들리는 곳이다. ‘영덕 영해장터거리’가 문화재청의 3·1 만세운동과 지역의 장터거리로 인정받아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확산사업에 선정됐다. 따라서 5년간(2020~2024년) 450억 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해 국내 최고의 근대역사문화관광지로 조성된다. 지난 2019년 11월 문화재청이 ‘근대역사문화공간 문화재;로 등록한 영해장터거리는 일제강점기 동해안 최대의 만세운동인 영해 3·18 만세 시위가 벌어진 현장이기도 하다.
 

영해금융조합건물,영해3·18만세운동이 처음 발생한 곳.

■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 지정
경북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1만 7933㎡의 영해장터거리는 3·18 만세 시위 당시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일본 경찰주재소(현재 경찰 파출소 자리)와 옛 영해금융조합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우렁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던 곳이다. 이 지역에 지금까지 있는 옛 영해금융조합, 영해양조장 사택 등 근대도시 경관과 주거 건축사, 생활사 등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난 10곳은 별도의 문화재로 등록됐다.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762호로 지정된 영덕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조선시대 읍성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기 한국인의 장터거리로 당시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특히 1919년 3월 18일 지역 주민 3000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곳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1919년 3·18 만세운동뿐만 아니라 이곳은 1871년 최초의 농민운동인 이필제 영해동학혁명과 평민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항일투쟁 등이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영덕군은 영해장터거리 중에 3·18 만세운동의 시위경로를 따라 사업구역을 정하고 공모사업을 신청했다. 근대역사문화공간 내 별도로 지정된 10건의 문화재 역시 근대 문화재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영해양조장.

‘옛 영해금융조합’은 1935년 건립된 영해지역 금융조합 건물로, 당시 농업을 비롯한 이 지역의 산업과 경제 분야 전반에 관련된 근대사의 중심 건물로 당시 유행했던 모더니즘 건축양식을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농협은행의 지점 영업장으로 활용되는 등 지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또한 근대의 양조 시설의 특성을 볼 수 있는 ‘옛 영해양조장과 사택’ 건물은 막걸리 생산시설과 이를 위한 준비공정과 관리시설, 관리자의 거주 영역까지 유기적으로 구성돼 있다. 생산에서 판매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과 이 지역 양조 시설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또 한옥과 근대기 조적조 건물이 혼합돼있는 등 당시 시대상과 함께 변화상도 볼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기도 하다. 과거 영해의용소방대로 사용된 ‘영해의용소방대’ 건물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다.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등 지역의 역사적 흔적을 증명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옛 영해신발가게.

이밖에도 ‘영해장터거리 근대상가주택’은 5곳이 문화재로 지정됐다. 과거 영해장터거리에서 푸줏간이 있었던 근대상가주택, 영해지역 부호의 경제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신흥상회라는 상점이 있었던 한옥 상가주택, 고무신 가게로 사용됐던 한옥 상가주택, 소금상점으로 사용됐던 상가주택, 목구조의 모습에서 전통적 기법을 잘 보여주는 신발가게로 사용됐던 한옥 상가주택 등도 등록문화재가 됐다. 특히 신발가게로 사용됐던 상가주택은 한국전쟁 중에는 인민군 본부로 사용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로에 면한 공간을 상가로 활용하기 위해 증·개축하는 등 영해지역의 공간구조와 장터거리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5개의 상가주택은 근현대 시기 상가주택의 건축적 특성과 기법, 증·개축 과정에서의 변천 과정 등을 통해 근현대 시기 생활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지역 언론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영해언론인협회 지국’ 역시 눈길을 끈다. 194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50여 년간 ‘신문지국’과 함께 ‘영해언론인협회 사무실’로 사용된 건물로 2동의 한옥으로 구성됐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변형과 증축은 있었지만 전체적인 건물의 구조체나 공간구성은 원형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특히 당시 지역 언론의 모습 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 영해장터거리 3·18만세운동 현장도 문화재로 지정돼
흔히 3·1운동만 아는 경우가 많지만 3·18 만세운동은 한강 이남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었다.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된 영해장터거리는 3·18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다. 3·18 만세운동은 고종의 장례에 참례해 3·1운동을 직접 보고 귀향한 김세영이 구세군 참위 권태원과 기독교 인사들에게 3·1운동을 알리며 추진됐다. 권태원을 비롯해 뜻을 모은 이들은 영해읍 성내동의 장날인 3월 18일에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이 일대의 향반과 유지들에게 참여 약속을 받아 낸다.

3월 18일 당일 영해주재소 앞에는 3000여 명의 인파가 몰려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000여 명의 인파는 영해공립보통학교와 영해공립심상소학교, 영해면사무소, 영해우편소 등을 차례로 파괴하는 성과를 거둔다. 만세 시위는 인접한 병곡면까지 이어져 경찰주재소와 병곡면사무소를 파괴했으며, 다시 영해읍으로 돌아와 밤이 새도록 시내를 누비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 시위는 3월 19일에도 이어졌으나, 헌병대와 일본군 80연대의 기마병이 동원돼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된다. 만세운동 주동자 임창목·최재곤·이해술 등 8명이 순국하고 16명이 부상을 당한다. 이틀간의 시위로 180여 명이 검거됐으며, 주동자로 지목된 정규수는 징역 7년, 박의락·서삼진 등은 징역 4년, 남효직·남교문 등은 징역 3년, 김세영·권태원·김원발 등은 징역 2년, 김학이·권영만 등은 징역 1년 6월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후에 이들에게는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만세운동 현장도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와 관련 영덕군은 지난 2020년부터 5년간(2020~2024년) 국·도비 등 450억 원 규모의 사업비로 문화재 보수정비, 역사경관 회복 등 종합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영덕군 관계자는 “근대역사문화공간 등록은 영덕 근현대 시기 영해가 가지는 역사적 중요성을 문화재 등록을 통해 잘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여기에 스토리를 발굴하고 체계화해 영덕이 문화역사도시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포부를 밝혔다.
 

영해부관아.
왼쪽영해면사무소 오른쪽 영해부관아.
옛 영해버스터미널(노루표페인트·왼쪽 공사중인 건물)영해양조장, 영해양조장 사택(오른쪽).
옛 영해버스터미널(노루표페인트·왼쪽 공사중인 건물)영해양조장.
옛 영해소금상점.
옛 영해의용소방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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