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 시량리의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충의사·도중도’
상태바
덕산 시량리의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충의사·도중도’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0.01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16〉
예산 덕산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충의사·도중도’

내포문화숲길의 역사인물동학길에서 만나는 예산 덕산 시량리의 ‘윤봉길의사기념관’ 일원은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충의사)과 생가인 광현당, 농촌부흥운동을 했던 부흥원, 성장한 집인 저한당, 그리고 유물을 전시하고 교육·체험시설을 갖춘 윤봉길의사기념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기념관 내부 또한 관련 사진과 다수의 유물, 포토존, 체험관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돼 있어 나라사랑정신 함양장소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이곳 시량리에는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과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의사’가 자리하고 있다. ‘섬 속의 섬’이라는 도중도에는 태어나 4세까지 성장한 생가인 ‘광현당’과 4세부터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민족운동을 하던 ‘저한당’이 있고, 마을을 부흥시킨다는 뜻으로 체계적인 농촌부흥 운동을 한 ‘부흥원’이 위치 하고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인 광현당과 저한당 등 도중도 일원의 윤봉길 의사의 유적은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229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8년 당시 애국충혼이 서린 충절의 성지로 삼자는 의도로 현충 사업이 진행됐다. 윤봉길 의사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현충 시설이다. 윤봉길의사기념관에는 윤 의사의 유품인 보물 제568-2호와 제568-3호 등 윤 의사의 정신과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물·유품 27종 51점이 전시·보관돼 있다.

덕산에는 윤봉길 의사가 남긴 뜻을 함께 기억하고자 하는 다양한 모임이 활성화돼 있다. 매년 추모의 행사를 열고 있으며, 이밖에도 윤봉길 마라톤대회, 윤봉길 평화축제, 윤봉길 체육관 등 윤봉길 의사의 이름은 시대의 변화를 발맞춰 예산군민은 물론 지역 주민들과 국민들에게 독립투쟁에 대한 자부심과 화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윤봉길이 태어나고 자란 ‘섬 속의 섬 도중도(島中島)’에 오롯한 흔적
윤봉길이 태어나고 자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의 ‘도중도(島中島)’는 ‘섬 속의 섬’이라고 윤봉길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에서 흘러내린 하천과 용봉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합류하면서 작은 섬을 이룬 특이한 지형을 이룬 곳이다. 일제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섬 속의 섬이라는 뜻을 내포한 명칭일 것이다. 사방이 하천이라 수시로 범람하는 땅이었으나, 조부 윤진영이 이곳 도중도를 개간해 농토를 만들었고, 아버지 윤황이 물려받았다.

1908년 6월 21일, 윤봉길은 이 도중도에서 태어났다. 광현당에서 태어나 4세까지 자랐으며, 4세 때 도중도 바로 옆의 저한당으로 이사를 해 살았다. 이 집들은 1974년에 보수하면서 광현당(光顯堂, 빛이 나타난 집이란 뜻으로 윤봉길의 탄생을 높인 말), 저한당(抯韓堂, 어려운 한국을 건져낼 집)이란 이름이 붙었다.

윤봉길은 1919년 12살이 되던 해, 3·1만세 운동 당시 예산지역의 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서당에 다니며 개인적으로 공부를 한다. 식민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인식이 이미 10대 때에 싹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짧은 25년의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간 우리들의 영원한 불꽃 청년이 있으니 바로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이다.  1926년부터는 야학을 개설하고 독서회 활동으로 지속적인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도중도의 광현당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부흥원에 야학을 개설하고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매달 애국 강연회를 열었다. 처음에는 저한당에서 시작했지만,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부흥원을 새로 짓고 본격적인 활동을 한 곳이다.

이곳에서 윤봉길은 야학 교재로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면사무소에서 등사기로 프린트해서 펴내기도 했다. 현재 제1권은 유실됐고, 제2권과 제3권의 일부만 남아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고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데에 자극을 받은 데다 그가 운영하던 야학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자 윤봉길은 망명을 결심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식민지하에서의 농촌 운동은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유서 남기고 독립운동 위해 중국 망명
1930년 3월 6일, 윤봉길은 아내에게 “물 좀 한 그릇 주오.”라고 말하고 받아 마신 다음 고향 땅을 떠났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만의 선택이었다. 윤봉길은 몰랐을 터이지만, 그때 아내는 둘째 아들을 임신 중이었다고 한다. 윤봉길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란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윤봉길의 삶의 터전이자 이상촌 건설을 위해 힘썼던 짧은 젊은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 도중도. 윤봉길은 자신이 생각하고 세웠던 목표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더 큰 뜻을 품고 미련 없이 정든 고향을 떠난다. 하지만 오늘날의 도중도는 윤봉길의 생가가 있는 유적지로 잘 가꾸어져 작은 섬의 편안한 풍광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 도로 옆의 충의사와 기념관보다는 윤봉길의 흔적과 철학이 깃든 이 도중도에 들어와 숲길을 걸으며, 농촌계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 정도로 뛰어난 사상가였던 윤봉길의 더 깊은 의미와 가치를 짚어보는 이유다.

윤봉길 의사는 중국으로 망명하고 2년 후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입단했다. 1932년 4월 29일에는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제의 천장절(일본 국왕 탄생일)겸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장을 폭파하는 의거를 거사했다. 흔히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폭탄이었다고 한다. 윤 의사는 당시 도시락·물통 폭탄 2개를 갖고 있었는데,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윤 의사의 의거는 당시 침체됐던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의거 현장에서 카와바다 상해거류 일본인 민단장과 시라카와 사령관이 죽고 수뇌급 수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여러 나라에 보도됐고, 세계만방에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알리는 일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항일투쟁 의지도 높여주는 계기가 됐다.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말하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윤 의사의 나이 25살, 아름다운 20대 젊은 꽃다운 나이에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나이든 부모님과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홀로 실행한 거룩한 뜻이 너무나 숭고해 우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결국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30분, 먼 이국땅 일본으로 끌려가 가나자와 육군작업장 인근 골짜기에서 총살형으로 장렬히 삶을 마감, 순국했다.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한 주력 부대 제9사단 본부가 있는 가나자와를 윤봉길의 사형 장소로 결정했고, 그 골짜기로 끌고 가 십자가의 형틀에 묶은 다음 거적대기에 무릎을 꿇린 채 굴욕적인 자세로 형을 집행했다고 전해진다. 사형 집행 직전, 형 집행을 담당한 검찰관이 유언이 있는지 물었을 때 “사형은 이미 각오한 바, 하등의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가나자와시 공동묘지 한구석,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땅을 파고 묻은 뒤 아무런 흔적이나 표시도 남기지 않았다. 수 많은 사람들이 윤봉길 의사의 유해 위로 지나가며 밟으라는 의미였다고 하니…. 

이후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우리나라에 안장된 것은 1945년 해방이 되고 1년이 지나서다. 당시 광복회 이강훈 회장이 1946년 일본 가나자와로 건너가 윤 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서울 효창공원에서 국민장으로 안장했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에 속박된 우리나라를 건져내기 위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지식을 몸으로 보여주며 실천한 사상가요, 독립운동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