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리 마애석불과 용봉사를 지키고 있는 마을 ‘개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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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리 마애석불과 용봉사를 지키고 있는 마을 ‘개천말’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0.0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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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마을공동체 스토리 〈8〉 - 홍북읍 신경리 신리마을

홍주일보사는 충남미디어포럼과 2022년도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연합사업)의 지원을 받아  마을공동체의 의미와 가치, 역사와 문화, 함께 누리는 행복한 삶, 함께 만드는 희망이야기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톺아본다. 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터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 행복하고 희망이 가득한 공동체 마을의 스토리를 홍주신문에 10회에 걸쳐 소개하고 영상으로도 담는다.  <편집자 주>

용봉산 자락 아래에 자리한 충남도청신도시 건설 이전의 신경리 신리마을(2009년).

 홍북 신경리 신리마을은 백제 때는 마시사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이산군에 속했다. 조선 초엽에는 홍주군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에는 홍주군 치사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리와 자경리, 택리, 대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해 신리와 자경리의 이름을 따서 ‘신경리’라 하고 홍북면에 편입됐다.

신경리는 ‘개천말(신리)’이라고도 불리며, 홍북읍(사무소)행정복지센터에서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남동쪽에는 자경동마을, 동쪽으로는 주촌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의 북서쪽에는 용봉산과 용봉사가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는 청송사(靑松寺)와 영봉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충남도청이전 신도시 건설사업으로 용봉사 입구(절골 입구)쪽 일부만이 원형을 지키고 있으며, 나머지 지역은 신도시에 편입됐다. 신리마을은 84세대 211명이 신도시 편입으로 이주했다. 신리마을에는 인동장씨 집안사람들이 일찍부터 입향해 살아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확한 입촌 시기와 입향과정은 확인할 수 없지만, 신도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마을에 절반 가량이 인동장씨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등도 거주했다.

신리마을은 개천 옆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개천말’이라고 불렀다. 한편 ‘개장마을’이라고도 불렸는데, 마을에 개가 1000마리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옛날에 용봉사 아래 절골 입구 쪽에 암수 호랑이가 종종 나타나 눈에 불을 환하게 키고 앉아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가곤 했는데 이 자리를 ‘호랑이자리’라고 한다. 이 ‘호랑이자리’ 앞에 개가 1000마리가 있어야 호랑이가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 ‘개천말’이 됐다고 전해진다. 용봉산은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의 형국이라고 전해진다. 따라서 홍북지역을 비롯해 홍성지역에서는 ‘용봉산을 향해 묘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묘를 써서 용봉산의 기운을 이기면 장군이 나오지만, 그렇지 않으면 대(代)가 끊긴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용방치기’ 고개는 개천마을에서 상하리 용방치기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고개 왼편에 상초나무 2~3그루의 서낭이 있었다. 홍성장에 다닐 때 돌이나 동전을 놓고, 나뭇가지에 헝겊을 매 놓고 정월 보름께는 시루떡을 해 놓고 서낭을 위했다고 하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개천말 서쪽에 자리한 마을을 ‘절골’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용봉사가 있으며 옛날에는 ‘청송사(靑松寺)’와 ‘영봉사’라는 절이 있던 마을이라 해서 절골이라 불렀다. 청송사는 송락암(松落庵)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과거 용봉산에는 99개의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노색시바위’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신리(개천말)마을의 지금은 충남도청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신리천을 중심으로 아파트(상록·효성·경남아너스빌·한울마을모아엘가 등)단지와 홍북읍주민복합지원센터, 신리체육공원, 신리한옥마을 등이 조성됐거나 건립되고 있다.
 

1962년 신경리 신리마을 전경.

■ 용봉사와 마애불, 신경리마애석불 지키고 있는 신리마을
신경리 신리마을 서쪽의 용봉산에 있는 용봉사(龍鳳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필봉산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유물로 볼 때 백제 말기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용봉사에 1690년(숙종 16)에 조성한 괘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사찰이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괘불은 영산회상도로 제작연도가 분명하고 기법도 뛰어나 보물 제1262호로 지정됐다. 본래 절 서쪽의 조금 높은 곳에 있던 옛 절이 명당임을 안 평양조씨(平壤趙氏)가 절을 폐허화시키고 그 자리에 묘를 썼다. 현존하는 사찰은 1906년에 새로 중건했다. 18세기 후반 무렵 폐사됐으나 1906년 중건했고, 1980년에 중수했다. 1986년에 요사채를, 1988년에 축대를 완성하고, 1992년에 대웅전을 건립했으며, 1998년에 지장전과 삼성각을 건립했다.

옛터에는 보물 제355호로 지정된 신경리마애석불과 절 입구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마애석불 1위가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되는 등 많은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옛 절터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2호로 지정된 장방형 석조(石槽)와 절구, 거대한 맷돌이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8호로 지정된 부도 등이 있다.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 주위에는 백제 때의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에서 가져갔다는 유물들이 홍성 읍내의 건양각(乾陽閣)과 홍성여자중학교 정원에 있다. 건양각에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좌불이 있는데, 일본인들이 옮겨온 것으로 상체에 걸친 법의의 주름이 특이하다. 처음 옮겨올 때 용문(龍紋)을 조각한 대석(臺石)이 있었으나 다리 공사를 할 때 사용됐다고 한다. 홍성여자중학교 정원에는 3층 석탑 1기가 있는데,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됐으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들 유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이 절이 수덕사 못지않은 대사찰이었다는 구전(口傳)을 믿을만하다. 

용봉사에서 50여m 오르는 지점에는 돌출된 암반에 조각돼 있는 ‘신경리마애석불(新耕里磨崖石佛; 국가지정 보물 355호,1963년 1월 21일 지정)’을 만날 수 있다. 이 마애석불은 높이 4m, 폭 1.4m 내외인 자연암석의 탄탄한 앞면을 파서 감실(龕室; 법전 안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의 모형으로, 작은 금동불이나 목불을 모시는 집)을 만들고 이에 부조(浮彫)한 여래입상인데 정남향을 했으며 정면이 앞으로 10도가량 기울어 있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있고 보안(寶顔)은 풍만한 편으로 이마에는 백호(白毫) 자리가 있다. 가느다란 눈과 은은하게 미소를 지은 입, 어깨까지 길게 내려온 귀가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이다. 손 모양은 오른손을 내려서 다리에 붙이고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임으로써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평안을 주는 모양을 하고 있다.

불상의 배면에 조각한 광배(光背)는 전면을 유선형으로 움푹하게 파낸 다음, 신광(身光) 가으로는 3줄의 음각선을 새겨 두 개의 돌기선을 나타냈고, 두광(頭光)도 같은 수법으로 2줄의 원형 돌기선을 조각했다. 불상의 하단에는 다른 돌로 만든 연좌대가 있는데, 대좌의 옆면은 복엽의 연판을 조각했고, 상면에는 두발을 돌출시켰다. 마애불의 정상부에는 별석의 지붕형 개석이 있는데 전면 밑부분에 3개의 연화문을 음각했다. 조식(彫飾)된 연꽃은 끝이 약간 반전된 단판 8엽에 중방(中房)이 있다. 불상 밑의 지형은 한 단이 낮고 평탄한데 주위에서 옛날의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건립된 마애불(磨崖佛)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용봉사 일주문을 지나 절과 중간지점 왼편에 ‘용봉사마애불(충남유형문화재 제118호)’이 서 있다. ‘노색시 바위’라 부르는 이 마애불은 바위나 절벽의 평평한 면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바위 면에 일정한 구획을 한 후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입상이다. 

육계는 민머리 위에 팽이를 엎어놓은 모양처럼 솟아있고 얼굴은 타원형이다. 눈과 입은 미소를 머금는데, 가늘고 긴 눈은 거의 일자형이나 끝부분이 치켜져 올라가 있다. 코는 오똑한 편이며, 좌우 광대뼈 부분은 약간 도드라지게 튀어나와 있다. 입은 얼굴 크기에 비해 작고 얇으며 턱은 살이 붙어 이중으로 겹쳐져 있다. 귀는 목 부분까지 길게 늘어지게 표현했다. 어깨는 둥글게 처리됐다. 의습은 통견으로 U자형의 옷 주름은 무릎까지 내려오고 있지만, 얇게 표현돼 있어 불상을 평면적으로 보이게 한다. 이 마애불은 신라 소성왕 1년(799)에 조성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계란형 얼굴에는 미소가 희미하다. 귀가 어깨에 닿을 만큼 길게 조각됐다.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불은 높이가 2.3m(현재 높이 2.1m)로 거대한 절벽의 바위 면이 세모꼴로 떨어져 나간 곳에 감실형으로 쪼아 부조를 새긴 불상이다. 오른쪽 어깨 옆의 바위 면에는 3행 31자의 불상조성기(銘文)가 새겨져 있다. 

또 이 불상은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부조한 반면 하체로 내려가면서 얕게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 특징이다. 얼굴이 큰데 비해 손이 유난히 작고, 눈이 가늘면서 입 주위를 움푹 들어가게 조각해 파격적 미소를 띤 얼굴을 표현했다. 하지만 발목 부분이 불분명해 우열의 수법이 공존하는 독특한 조각이다. 머리 정상부는 선각으로 구획한 육계(肉髻)가 솟았는데 큼직한 팽이형으로 육계와 머리는 선으로 구별 짓고 있을 뿐이며, 머리칼은 소발이다.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꽤 풍만한 편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입 좌우를 들어가게 하여 만면의 미소를 표현했다.

눈썹은 반달형으로 코는 좁고 오뚝한 편이며, 입은 폭이 좁고 작아서 인상적이다. 입은 코끝에서 턱을 이루면서 반달 같은 보조개를 이룬 표정과 함께 만면한 미소를 띠고 있다. 더구나 눈을 가늘게 만들어 눈웃음을 짓게 한 표현과 더불어 파격적으로 미소 짓는 얼굴 모습을 이루게 했다. 이로써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신체는 원통형인데 어깨는 비교적 자연스럽고 가슴은 양감 없이 밋밋하게 표현됐다. 하체의 처리 또한 상체와 비슷해 두 다리는 굴곡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무릎 아래 하반신의 표현이 불분명하고 발은 나타내지 않았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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