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생가지, ‘그리운 것은 다 님’ 독립지사로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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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생가지, ‘그리운 것은 다 님’ 독립지사로서의 길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0.1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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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18〉
홍성 결성 ‘만해 한용운 선사의 생가지’
결성면 성곡리의 만해 한용운 생가.
결성면 성곡리의 만해 한용운 생가.

한용운(萬海, 1879~1944)은 조선왕조 붕괴와 외세의 침탈 한가운데 혼돈의 와중에서 1879년 홍주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아버지로부터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만해 한용운은 승려이자 시인이며 3·1만세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이은 유명한 공약삼장을 작성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의 생가지는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에서 결성면 방향으로 7k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무궁화꽃이 길게 늘어선 도로변에서 만해로로 접어들면 아늑하게 느껴지는 얕트막한 산등성이 아래로 초가집 두 채와 사당, 기념관 건물 등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이 바로 만해 한용운 선사의 생가지이다.

생가지는 생가와 생가 앞에는 독립선언서를 든 동상이 서 있으며, 공약삼장비를 비롯해 문학체험관으로 명명된 기념관과 사당, 시비공원을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도록 구성·조성돼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한용운은 어릴적부터 부친으로부터 의인의 삶과 기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위인들의 삶을 본받고자 노력했으며, 붓을 통해 자신의 뜻을 세상을 향해 밝히고자 했다. 생가에서 왼쪽으로 100여m 지점에는 사당인 만해사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매년 8월 선사의 탄신일을 맞아 제향과 추모 행사 등이 열린다.

생가지 일원에서 독특한 점은, 생가 옆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 오솔길에 위치한 민족시비공원이 조성돼 있으며, 시비공원에는 한용운을 비롯해 이육사, 심훈, 윤동주 등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민족시인 20여 명의 대표 시(詩)가 각기 다른 모양의 돌에 새겨져 있어, 시를 감상하며 산책도 할 수 있도록 주변이 잘 정리·조성돼 있다.
 

■ 만해, 민족의 선각자이고 시인·독립운동가
“조선의 7000 승려를 다 합해도 만해 한 사람은 당해내지 못한다.”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는 한용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선각자였고,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독립운동가이자 스님이었던 만해 한용운의 고향은 홍주(홍성)이다. 지금의 홍성에서는 고려 말의 장군 최영과 고승 보우, 사육신으로 잘 알려진 성삼문과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 등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만해 한용운도 1879년 홍주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만해 한용운은 여섯 살부터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 교육을 받았고, 아홉 살에 ‘기삼백주’와 ‘서상기’를 읽고 한 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아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한용운의 유년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고향인 홍주를 떠나 전국을 돌아다닌 것은 분명하다. 한용운이 만 15세가 되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이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한용운이 살고 있던 홍주에서도 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 이후로 한용운은 아이들을 가르쳤으나, 1897년에 돌연 부모와 아내에게도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집을 떠났다.

전언에 따르면 출산한 아내를 위해 미역을 사러 장에 간다며 집을 나선 이후 홀연히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한용운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당시 한용운의 목적지는 서울이었으나 길을 아는 것도 아니요, 뚜렷한 목적이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정처 없는 여행에 지쳐가며 서울로 가던 길목에서 어떤 사람에게 설악산 백담사에 법력 높은 도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강원도로 발길을 옮겼다고 한다. 하지만 도사는 만나지 못하고 오세암에 머물며 대장경을 접하고 불교 수행과 공부를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장경을 읽으면서 한용운은 불교에 귀의(歸依)했다. 오세암에 80여 년 동안 있었던 대장경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와 불교 유산이 민족 유산 역할까지 한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백담사 암자인 오세암에 팔만대장경 인경본(印經本)이 봉안된 지 30여 년이 지난 1897년 충청도 홍주 사람인 한용운이 오세암에 들어왔으며, 오세암의 팔만대장경 인경본은 만해 한용운을 스님으로, 시인으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키워준 역사의 출발점이 됐던 것이다. 
 

결성면 만해마을에 위치한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지 사당인 만해사.

한용운은 스물일곱이던 1905년에 백담사에서 출가하고 오세암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만해의 깨달음은 무아와 유심에 대한 철저한 자기 확인이었고, 선은 산속의 선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의 선이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정신 수양의 대명사다.

한용운은 경전공부는 물론 선방 생활도 하면서 세계사적인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생사를 오가며 블라디보스톡, 일본, 만주를 여행하기도 한다. 1911년 서른한 살이 되던 해 한용운은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체결한 한일불교동맹을 분쇄하고자 조선임제종 관장에 취임한다. 1913년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습을 타파해 불교를 쇄신하고자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내는데, 이 책에서 불교의 이념을 평등주의(平等主義)와 구세주의(救世主義)에서 찾는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 등의 저서를 통해 ‘시대의 대세에 맞춰 조선불교개혁의 역사적 필연성을 통감하고 여기에서 어긋나는 장애를 유신(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용운이 진단한 당시의 불교는 근원적으로 병이 들어있었고, 근본적 개혁을 위해 유신이 불가피하며, 또 이를 위해서는 파괴가 전제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한용운이 내세운 유신의 대상은 ‘낡은 교단의 조직화, 선교의 일체화, 승려의 자생력 확립, 포교 방법의 현대화, 사찰의 도시 진출, 청년 교육의 중시, 각종 의식의 개혁’ 등 여러 방면에 걸친 것들이었다. 이처럼 ‘조선불교유신론’은 급진적이었고 과격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도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담겨져 있다. 만해 한용운은 1944년 서울 자택인 ‘심우장(尋牛莊)’에서 입적하기까지 40여 년간 ‘조선불교 유신론’과 ‘불교대전’을 비롯해 ‘십현담주해’ 등을 집필하고 민족의 독립운동에 온 힘을 쏟았다. 특히 화엄경 등 불경을 한글로 해석했고, 안심사에 있던 한글 경전 인출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만해의 불교사적 업적과 문학사상이 싹 틔워진 것은 오세암에서 대장경(大藏經)을 만났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고, 1919년 3·1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돼 3년 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도 ‘조선독립의 이유서’를 썼고, 대다수 민족 대표들이 변절했음에도 끝까지 독립지사로서의 길을 간다. 우리 민족과 만해의 자존(自存)이다. 만해가 47세 때 남긴 ‘님의 침묵(1924년)’은 바로 중생제도의 길이기도 하며 고통을 껴안는 강인한 자존의 길이기도 했다. 만해는 ‘그리운 것은 다 님’이라 했다.

“조선 땅이 감옥인데 방에서 편히 지낼 수 없다”며 늘 냉방에서 지내다 염원했던 광복을 목전에 두고 1944년 심우장에서 중풍과 영양실조로 숨을 거뒀다. 심우장에는 만해의 친필 원고, 유품, 연구 논문집, 서화, 초상화, 옥중 공판기록 등이 남아 있었다. ‘심우(尋牛)’는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만해 한용운은 삶 자체가 시적이다. 설악산 오세암에서 1917년 어느 날 바람에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은 후 오도송을 읊었다. ‘한 소리로 삼천세계를 깨트리니, 눈속 복사꽃 송이송이 날리네.’ 눈보라가 몰아치는 모진 현실 속에서 진리를 상징하는 붉은 복사꽃을 찾았다는 시적인 문구다. 만해는 서울로 올라와 ‘유심(唯心)’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시를 썼는데, 시는 불교의 깨달음을 전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만해는 일제의 사찰령에 맞서 임제종 운동을 벌였는데, 이 운동으로 불교계 대표 종단인 조계종의 선맥(禪脈)이 이어졌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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