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노 화백의 혼이 숨쉬는 ‘수덕여관’과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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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 화백의 혼이 숨쉬는 ‘수덕여관’과 암각화
  • 취재·사진=한관우·한기원·김경미·최진솔 기자, 협조=홍주일보·홍주신문 마을기자단·수덕사
  • 승인 2023.06.1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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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신도시 주변마을 문화유산 〈2〉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일주문 옆쪽에 자리잡고 있는 수덕여관(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 자락,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 옆 내 건너에 자리하고 있는 ‘수덕여관’은 본래 비구니 스님들의 거처였다고 한다. 지난 1944년 홍성 출신의 고암 이응노 화백이 매입하고 문화재(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돼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이곳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곳이다. 

이곳을 거쳐 간 예술가들인 김일엽, 나혜석, 이응노의 삶처럼 말이다.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전쟁의 아픔, 사회적 편견 등에 시달리면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과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한국 근현대 예술계를 대표하는 세 명의 예술가들의 인생 배경에는 수덕여관이 있다.

근대 한국화의 거장인 고암 이응노(李鷹魯·1904~1989)와 수덕여관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본래 수덕사 비구니 스님의 거처였던 수덕여관은 1930년 이혼한 나혜석이 1937년께부터 1943년께까지 말년을 보내면서 작품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화가 나혜석이 수덕사를 찾았던 때는 1937년이 저물어 가던 연말쯤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4년 전에 출가한 김일엽을 만나기 위해서 수덕사를 찾았다고 전해지는데, 김일엽과 나혜석은 1896년생 동갑내기 친구다. 이들 김일엽과 나혜석의 공통점은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뛰어난 재능과 예술적 감각을 지녔다는 점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서로 교류했고, 남녀평등과 자유연애의 기치를 내세우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여성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세상은 시대를 앞서간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김일엽은 몇 차례의 사랑과 이별을 거듭하다가 홀연히 1933년 수덕사로 출가했다. 나혜석 역시 가부장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심신이 피폐해져 갔던 상황에서 선택한 것이 출가였다. 일엽을 통해 수덕사의 만공 스님에게 귀의를 요청했지만 만공 스님은 “임자는 중이 될 재목이 아니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이런데도 미련이 남았던 나혜석은 수덕여관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김일엽·나혜석·이응노, 파란만장한 삶과 예술혼
김일엽은 1896년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이화여전(지금의 이화여대)를 나와 일본에 유학한 조선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었다. 여성 해방과 자유연애 주의를 그의 작품 뿐 아니라 삶 속에서도 행동으로 나타냈다. 

몇 번의 결혼 또는 동거, 그리고 이별을 되풀이 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주체적으로 소화해 나갔다. 그래서 김일엽은 당시 최초의 조선 여류 서양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나혜석과 윤심덕 등 세 사람과 함께 ‘3대 신여성’으로 꼽힐 정도였다.

김일엽은 이름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지식인이다. 여성 문학의 선구적 작가인 동시에 최초의 여성잡지 주간이었던 김일엽은 1920년대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기자, 소설가,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가 1933년 파란만장한 삶을 정리하고 수덕사로 출가해 만공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비구니가 된다.

김일엽은 개인주의가 퍼질수록 타인의 권리도 존중받게 될 것이라 주장했는데, 어느 강연에서는 “자기의 생명 가운데 남의 생명을 발견하며, 남의 인격 가운데 나의 인격의 존엄성을 보게 되는 거인적인 개인주의의 시대가 올 것을 믿는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김일엽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늘 자기 삶의 주체를 꿈꾸며 출가 전에는 여성 해방과 자유연애의 상징으로써 봉건적 인습에 갇힌 조선 여성을 구하고자 했고, 출가 후에는 한국 비구니의 정신적 지주가 된 그녀는 시대의 선객이었다. 

30여 년의 은둔 세월 후 발표한 종교적 산문들은 스님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갖는 인간적인 욕망과 고뇌, 모든 것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아름다운 문체로 전해 당대 유명인사들이 김일엽을 찾아 수덕사로 몰려올 만큼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나혜석은 오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여성을 안타깝게 여긴 선각자였다. 도쿄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재학 중에 ‘여자도 사람’이라는 내용의 최초 여성해방평론인 ‘이상적 부인’을 발표했다. 국내 최초 페미니즘 소설 ‘경희’를 발표한 문학가인 동시에,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이자 한국 여성 화가로서는 최초로 개인 유화전을 연 화가였다. 3·1독립운동에 가담해 감옥살이를 하는 등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여성이다.

나혜석은 소품전 실패와 경제적 궁핍, 아들의 사망으로 방황하던 끝에 수덕여관을 찾았다. 비구니가 되기 위해 수덕사를 찾았지만 김일엽의 만류와 만공 스님의 거절에 결국 스님은 되지 못한다. 대신 만공스님의 배려로 그녀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그녀를 찾아온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수덕여관에서의 생활을 계속한다. 

이때 찾아온 학생 중에는 이응노도 있었는데 훗날 이응노가 파리로 훌쩍 떠난 데에는 나혜석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이때 홍성이 고향인 고암 이응로가 선배 화가인 나혜석을 만나러 오가면서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응노는 나혜석으로부터 세상과 예술을 배우고 파리의 낭만을 동경하게 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덕여관 마당의 고암 이응노 화백의 암각화.

■수덕여관, 문화사적 가치 인정 충남도문화재로
이응로가 고향을 등지고 상경한 것은 19세 때다. 서울에서 미술학원과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사군자와 산수화를 배웠고, 제10회 ‘조선미전’에 출품한 ‘청죽’이 특선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응노는 1938년 미술 공부를 하러 갔고, 일본에서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 문하에서 서양화와 동양화를 뒤섞은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또 일본에서 요미우리신문 보급소를 운영하며 모은 돈으로 해방되기 전인 1944년 아예 수덕여관을 인수했다. 

1944년 수덕여관을 매입, 화실도 꾸미고 주변 자연 풍치를 화폭에 담았다. 6·25 한국전쟁 때는 수덕여관에서 피란을 했다. 

이응노는 예술가로는 일가를 이루지만 평지풍파의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다. 북한 공작원의 꼬임으로 납북된 아들을 만나려고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을 찾았다가 1967년 소위 ‘동백림 간첩 사건’으로 구속돼 수감생활을 하다 1969년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1977년에는 배우 윤정희 부부 납치 미수에 얽히며 이응노는 공산주의자라는 글자가 따라다녔다. 1969년 사면으로 풀려난 이응노는 수덕여관에서 몸을 풀고 휴양을 했다. 이때 부인 박귀희 여사가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이응노는 그림을 향한 지독한 열정과 불굴의 의지로 기록되어 있다. 수덕사 인근에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9살 산골 소년이 유럽을 뒤흔든 화가가 되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익숙한 그의 이름은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실험으로 한국 회화의 독창성과 정체성을 완성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예술가, 전통성과 현대성을 함께 갖춘 현대 한국화단의 증인이자 거목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응노는 1958년 부인 박귀희를 수덕여관에 남기고 파리로 연인인 대학 제자 박인경과 함께 떠났다. 파리에서 제자와 결혼했고 박귀희와 이혼했다. 

이응노는 파리 세르누시미술관과 합작으로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여는 한편 그림은 반추상과 문자추상으로 새 경지를 열며 화사하게 꽃피웠다. 이응노는 그렇게 전쟁과 분단이 낳은 비극을 몸으로 받아내고 파리로 떠난 뒤 살아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조강지처인 박귀희가 꾸리던 수덕여관 옆 바위에는 이응로가 새긴 문자추상 작품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의 곡절 많은 삶을 증언하고 있다. 

이응노가 남긴 암각화는 글자 모양 같기도 하고 사람 모양 같기도 한 것이 역동적으로 표현돼 있다. 무엇을 그린 것이냐는 물음에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라고 했다는 말만 전해지고 있다. 박귀희가 세상을 떠난 이후 방치되던 수덕여관은 1996년 문화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충청남도문화재 기념물(제103호)로 지정됐다.

김일엽은 1971년 수덕사에서 입적했고, 나혜석은 수덕여관을 떠나 여기저기 전전하다 1948년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했다. 이응노의 첫 번째 부인 박귀희는 홀로 수덕여관을 지키다 지난 2001년 세상을 떠났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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