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전국 최다 의병·최대 접전지 호남, ‘호남의병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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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전국 최다 의병·최대 접전지 호남, ‘호남의병기념관’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08.0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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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2〉
‘남도 의병 역사박물관 국제설계공모’ 당선작 ‘은유의 장소’.

부지 5만㎡·총사업비 377억 5000만 원, 호남의병기념관 건립 추진 
1909년 교전 의병수 전남 1만7579명(45.5%), 전북 5576명(14.5%)
호남의병, 구국충혼을 기리고 역사 정립·기억 위한 노력 본격화돼야
박산의병마을, 충신과 효자와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양씨삼강문’

 

호남 의병은 외세가 우리 국토를 유린할 때 절의정신으로 무장하고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특히 한말 전국 최다 인원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이끌었으며,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항쟁 최후의 불꽃으로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호남은 충절과 정의를 중시하는 의향으로 거듭났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은 광주 74명, 전남 904명, 전북 368명 등 총 1346명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전남 나주가 117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남 장성이 100명, 전북 남원 90명 등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민선 7기 문화정책 10대 성과 분석 등을 통해서도 ‘호남의병기념관’ 건립사업에 대한 추진의지를 보이고 있다. 광주광역시의 경우 광산구 어룡동 어등산(293m) 일원은 한말 호남 의병의 중심 근거지였다. 호남 의병을 이끈 김태원 의병장(1870∼1908)은 1908년 4월 25일 어등산 마당바위 인근 토굴에서 일본 군경과 6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13명의 의병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김 의병장뿐 아니라 광산 출신인 조경환 의병장(1876∼1909)이 이끄는 의병부대도 어등산을 무대로 활약했다. 호남창의대장이었던 조 의병장은 일본군을 습격해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어등산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헌병대의 급습을 받았다. 그는 오른쪽 가슴에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기 직전 왼쪽 품 안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의병 명단을 꺼내 불사른 뒤 순국했다.
 

‘남도 의병 역사박물관 국제설계공모’ 당선작 ‘은유의 장소’.

 

■ 어등산 일원 ‘의병기념관’ 건립 추진
이렇듯 한말 호남 의병 최대 격전지인 광주 광산구 어등산 일원에 ‘호남의병기념관’이 들어설 예정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광주시는 한말 의병 전투지로 지난 2013년 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된 어등산 일원에 호남의병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총사업비 377억 5000만 원을 들여 5만㎡ 부지에 4개 동, 전체면적 5200㎡ 규모로 건립할 계획이다. 주요 시설로는 제향과 참배·기념탑 등 추모 시설, 전시실 체험실, 연구실, 수장고 등 전시관람 시설, 강의실, 다목적실, 숙박 등 문화교육관, 식당과 판매소 등 편의시설 등을 갖추게 된다. 전시 범위는 임진왜란부터 8·15 광복까지로, 제1전시실(임란의병), 제2전시실(한말의병), 제3전시실(독립운동), 의병체험관 등으로 구성된다.

광주시는 사업 추진을 위해 호남의병기념관 건립 타당성 조사와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추진했다. 호남의병기념관의 콘셉트로는 의병기념관을 중심으로 한 가족 단위 체험형 오락공간과 교육관 조성, 게스트하우스와 유스호스텔 등 시설 확보를 통한 체류형 테마파크로 도약, 공연·전시사업과 라이선스 사업 모색 등을 통한 기념사업 기반의 부가사업 등을 제시한 바 있다.

광주시는 전체 예산 가운데 30% 정도(120억여 원)를 국비로 확보하기 위해 보훈처, 문화재청 등 관련 부서와 협의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광주시의 계획대로라면 지난 2020년 2월부터 7월까지 도시관리계획 결정(변경) 용역을 시작으로 내년 말까지 지방재정 및 중앙투자심사와 예산확보, 2021년 1월부터 2022년 6월까지 토지매입과 기본 및 실시설계를 추진할 예정이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난 2022년 7월에 착공해 2024년까지 ‘호남의병기념관’을 완공한다는 계획이었지만 현재까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어등산 자락의 박산의병마을.

■ 한말 의병, 전국 최다 의병·최대 접전지
1895~1896년 조선 고종 때, 단발령과 아관파천을 전후한 시기, 호남지역 최초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기우만이었다. 의병 활동을 벌이다 해산한 이후에도 상소운동을 주도했고, 을사조약을 전후해 다시 거의를 도모하기도 했다. 호남의병의 중추적 역할을 한 기재의 집안은 의병활동을 주도했다. 기재의 아들 기산도는 5적 암살단을 조직해 군부대신 이근택을 습격해 중상을 입히고 체포당했다. 이후 기산도는 의병에 투신했고,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장인인 고광순은 꾸준한 의병활동을 펼치다 무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지리산 피아골에서 장기전을 모색하던 중, 1907년 10월 순국했다. 기삼연은 김익중 등과 함께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해 전남지역의 후기 의병 활동을 주도, 전라도를 한말 의병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고종이 강제 퇴위당한 후 의병항쟁의 불꽃이 전국을 휩쓸었는데, 특히 전라도 항쟁이 가장 치열했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부자의병장·형제의병장 등 부모 형제가 모두 앞장서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다. 실제 한국독립운동사에는 1909년 교전 의병 수가 전남이 1만 7579명(45.5%), 전북 5576명(14.5%)로 전체 절반을 훌쩍 넘어서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교전횟수 역시 전남이 547회(31.5%), 전북 273회(15.7%)로 10번 중 4번의 전투는 전라도에서 치러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일제의 초토화 작전으로 500명 전사, 3000여 명이 체포·투항했으나 호남 의병의 맥은 끊기지 않았다. 고흥 출신의 이병채 등 일부는 해외로 망명해 독립군에 투신했고, 국내에서는 비밀결사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의 반외세·반침략 투쟁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거쳐 수많은 국내 항일운동으로 계승됐다.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과 5·18민중항쟁 등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특히 광주와 전남·북 곳곳에 자리한 호남 의병 관련 265개 유적·유물과 129곳의 유적지 등의 사후관리·보존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더불어 호남 의병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한 서훈 수여에도 관심을 쏟아야 하고, 호남 의병의 구국 충혼을 기리고 역사를 정립·기억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돼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더하고 있다.
 

■ 박산마을, 충·효·열·의 ‘양씨삼강문’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유원지에서 황룡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등산 아흔아홉 골이 감싸 안은 박산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는 제주양씨의 정려 ‘양씨삼강문(광주시기념물 제11호)’과 임류정이 있고, ‘박산의병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 옆쪽에 있는 ‘삼강문’이란 충신과 효자와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旌門)인데, ‘양씨삼강문’은 전국 유일의 국가에서 사액된 정려로 송천 양응정 후손들의 대를 이은 의로움이 모여 있는 ‘삼세구정려’이다. 

송천 양응정의 부인으로 삼양포에서 왜군과 만나 아들, 딸과 함께 순절한 죽산박씨, 송천의 둘째 아들로 군량미를 모아 의병을 돕고 정유재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하다가 삼양포에서 왜적을 만나 어머니 죽산박씨와 함께 바다에 투신해 순절한 효자 생원공 양산룡, 임진왜란 때 김천일 장군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에 진을 친 다음 고경명 장군의 밀서를 가지고 의주행재소까지 가서 선조를 만나 의병의 활동과 적의 동태를 보고하고,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충민공 양산숙, 양산숙의 부인 광산이씨로 정유재란 때 무안 승달산에서 왜적을 만나 항거하다 자결한 송천의 넷째 아들인 효자 처사공 양산축, 송천의 딸이며 김광운의 아내인 제주양씨, 외손자 김두남, 양산룡의 아내 고흥류씨, 김두남의 아내 제주양씨도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1635년 인조 13년에 9명을 포상하라는 왕명이 내려졌으나 생원공 양산룡의 부인 고흥유씨와 김두남의 처 제주양씨가 제외된 채 시간이 흐르면서 ‘삼세칠정려’로 굳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지난 2019년 제주양씨 한림종회에서 양승구 전 회장이 주축이 돼 다행스럽게 2명의 행적과 승정원일기를 발굴해 냄으로써 2명을 추가 배향하고 ‘일문삼강 삼세구정려’의 현판을 새롭게 봉안했다. ‘양씨삼강문’은 왜란이라는 전쟁으로 박산마을의 송천 일가가 풍비박산이 나는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다행히 의모당 고씨(양산축의 부인으로 고경명의 손녀이며 고종후의 딸)만이 바닷속에 뛰어들자 여종들이 살려내 뱃속에 품은 아이가 나중 한림학사 양만용으로 제주양씨의 대를 잇는다. 이들은 학포 양팽손의 후손이다. 이곳은 의병장 공조좌랑 양산숙을 중심으로 할아버지는 기묘 명현 증조부인 양팽손을 이어 대사성 양응정, 양산용, 거오재 양만용 등 4대를 이어 충효열의(忠孝烈義)를 실천했다고 높이 추앙받고 있다. 박산마을은 임진왜란부터 구한말까지 의병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충(忠)’의 고장으로 전국에서 명소로 알려졌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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