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병, “전국의 의병항쟁 선도·을미의병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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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병, “전국의 의병항쟁 선도·을미의병 상징이 됐다”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09.2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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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8〉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제천의병창의지 자양영당에 건립한 제천의병전시관과 제천의병기념탑(사진 오른쪽).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제천의병창의지 자양영당에 건립한 제천의병전시관과 제천의병기념탑(사진 오른쪽).

제천의병전시관, 제천의병의 고귀한 구국정신을 국민정신으로 계승
창의 100주년, 1995년부터 현재까지 연례적으로 ‘제천의병제’ 개최
의암 유인석 유물, 의병의 지도, 칼과 총 등 투쟁 사용 유물 전시돼 
제천의병항쟁 발상지, 국가의 변란에 취할 세 가지 ‘처변삼사’ 제시


“우리는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의병을 소재로 한 어느 드라마의 대사가 말해주듯, 나라가 짓밟히는 고비마다 스스로 일어선 꺼지지 않는 불꽃, 우리는 그들을 ‘의병’이라 부른다. 

충북 제천시 봉양읍 의암로 566-7(공전리 475)에 위치한 ‘제천의병전시관(堤川義兵展示館)’은 제천의병의 고귀한 구국정신을 국민정신으로 계승하고, 개항기 외세의 침입에 치열하게 항쟁한 의병들의 관련 자료를 한자리에 모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지난 1996년 5월에 건립 계획을 확정하고, 1997년 8월에 문화재청으로부터 건립 기본계획 승인을 받았다. 1998년 2월에 실시설계 승인을 받아, 같은 해 6월 5일에 시설공사를 착공해 2001년 10월 26일에 제천의병전시관을 개관했다.

제천시는 ‘자양영당(紫陽影堂)’ 성역화 사업을 위해 40억 원을 들여 자양영당 일대 2만 5000여㎡ 부지 가운데 영당 남쪽에 지하 1층, 지상 2층(연면적 646㎡) 규모의 기념관과 연면적 207㎡ 규모의 전시관을 지난 1997년 착공해 건립했다. 이와 함께 기존 ‘자양영당(紫陽影堂)’(지상 1층, 면적 26.5㎡)과 강당(32㎡)을 각각 보수하고 이 일대 전통민가를 복원하는 한편 주차장 4000㎡와 광장, 매표소, 화장실 등 각종 부대시설도 갖췄다.

제천의병전시관은 상설 전시는 물론, 의병 자료, 영인본 제작, 의병 관련 유물 구입과 의병 관련 유적을 지정 관리하고 있다. 창의 100주년이었던 지난 1995년부터 현재까지 연례적으로 ‘제천의병제’를 개최하고 있다.

한편 지난해에는 화산동 남산 일원에 ‘제천의병공원’과 마을카페를 개관했다. 제천의병공원 인근 남산은 1896년 의암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병이 일제에 맞서 격전을 벌인 곳이다. 제천시는 화산동 도시재생 사업에 ‘의병’이라는 주제를 담아 총사업비 91억 1500만 원(국비 57억 7300만 원, 도비 6억 6400만 원, 시비 26억 7800만 원)을 들여 제천의병공원과 마을창작소 등을 건립했다. 공원 일원 마을창작소 1층에는 AI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는 ‘스마트 카페 화담’이, 2층에는 사격, 양궁, 축구 등 6종의 스포츠체험시설이 운영돼 청소년과 대학생 등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의변전시관에 걸린 유인석의 심의.
의변전시관에 걸린 유인석의 심의.

■ 제천의병전시관, 의병의 역사·생활유물 전시
‘제천의병전시관’에서는 의병의 역사와 생활유물을 볼 수 있다. 제천의병의 주요 인물은 ‘의암 유인석’이다. ‘제천의병전시관’입구에 커다란 동판 부조물이 있다. ‘의(義)’자는 유인석의 친필을 옮겼고, 아래 의병들의 모습은 영국 데일리메일의 당시 멕킨지 기자의 사진을 옮긴 것이다. 상상이 아니라 실사를 바탕으로 했다. 얼굴은 어린 소년부터 중년 남자까지 다양하고 머리도 상투, 두건, 모자로 갓을 쓴 사람은 없다. 붓 대신 총과 칼을 들고 허리춤에는 총알을 둘렀다. 어쩌면 이들 앞에는 곱절의 일본군이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표정은 의연하고 당당하다.

영국 데일리메일의 멕킨지 기자는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는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제천시내 한가운데 아사봉(지금의 중앙공원)에는 펄럭이는 일장기가 밝은 햇살 아래 선명하게 보였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 또한 빛났다. 나는 말에서 내려 잿더미 위를 걸어서 거리로 들어갔다. 이렇게까지 완전히 파괴된 것을 이전에 본 일이 없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번화했던 거리였는데, 그것이 지금 시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있을 따름이다. 완전한 벽 하나, 기둥 하나, 된장 항아리 하나 남지 않았다. 이제 제천은 지도위에서 싹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고 ‘조선의 비극’에 썼다.

한쪽에는 멕킨지 기자가 담은 초토화된 제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다. 일본의 보복으로 제천은 온전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쓰레기 더미와 같은 죽음의 마을이 됐다. 참혹한 사진들은 이어진다. 의병들이 잠시 들렀던 주막은 철저히 파괴됐고, 일본군에 의해 어린 딸을 잃은 어머니는 가슴을 내놓은 채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다. 이밖에도 의암 유인석의 유물, 의병들의 지도, 칼과 총 등 투쟁에 사용했던 귀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제천의병전시관’은 관람 동선을 왼쪽으로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구성돼 있다. 원형의 동선을 채택해 도입부, 전기·후기 의병, 의병장실, 영상·정보 검색으로 구분해 전시하고 있다. 의병 관련 유물 전시장에는 화승총과 장총 등도 전시돼 있고 여러 가지 철제 사슬도 있어서 일제의 고문 흔적들도 볼 수 있다. 원형 기둥 모양의 전시대에 우리나라의 지역별 의병 활동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지역별 의병활동 게시물도 전시돼 있다. 다른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자료들도 전시돼 있다. 또 기증한 독립운동, 의병 활동을 한 분들의 기록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서책이며 교지, 서류, 무기로 시용했던 농기구, 무기류를 비롯해 포수들이 주로 사용하던 장총과 화승총, 의병들이 사용하던 총들도 전시돼 있다.

제천의병전시관은 제천을 중심으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해 위정척사의 깃발 아래 외세의 침입에 항거한 호좌(湖左) 의병의 활동과 전개 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밖에도 의암 유인석이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유림들과 처변삼사(處變三事)를 논의하던 ‘자양서사(紫陽書社)’를 비롯해 충청북도기념물 제37호인 ‘자양영당(紫陽影堂)’과 13도 의병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숭의사(崇義祠)’와 내·외삼문과 사주문, 홍살문 등이 있고, 성재 유중교 거택과 의암 유인석 거택이 있으며, 기념관 옆에는 의병상과 부조가 새겨진 제천의병기념탑이 서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유림들과 저변참사를 논의하던 자양서사.
나라를 구하기 위해 유림들과 저변참사를 논의하던 자양서사.

■ 위정척사사상과 제천의병의 거의 이념
1910년 8월 29일은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이다. 충북 제천은 일본의 침략을 당해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을미의병의 진원지로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닌 곳이다. 유인석을 중심으로 봉기한 제천의병은 전국 의병 가운데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성격이 뚜렷하며, 훗날 미친 영향이 컸으므로 전기 의병을 상징하는 의진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천의 화서학파는 유중교가 1889년에 장담(長潭)으로 이주하고, 그의 제자인 유인석·주용규·서상렬·정화용 등 훗날 제천의병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모여들며 형성됐다.

유중교는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치정(致政), 호는 성재(省齋)이다. 5세 때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 경서에 몰두했으며, 다시 김평묵에게 사사(師事)했다. 1876년(고종 13)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됐으나 나가지 않고, 1889년 춘천에서 제천 봉양면 공전리로 이사해, 후에 자양서사(紫陽書祠)라고 이름을 고친 서당에서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춘천에 살던 유중교는 민씨 정권의 개화정책을 반대해 유인석과 서상렬 등 제자들을 이끌고 장담 마을로 이주했다. 이들이 제천과 충주, 단양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위정척사론을 교육함으로써 장담 마을은 화서학파의 중심지가 됐다. 

성재 유중교는 위정척사론을 이어받은 학자이며, 장담 마을에 자양서사를 세워 유인석과 이소응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21세 때 화서의 지도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을 편수했다.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러시아와 만주지역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유중교는 1915년 74세로 사망했다. 이후 자양영당에 배향됐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이 추서됐다.

자양영당은 지방 유생과 농민이 외세의 침입에 항거해 구국의 가치를 높인 의병항쟁의 발상지이며,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하는 제천의병의 산실이다. 1895년 5월 유인석은 모친상을 마친 후 국가의 변란에 처해 취할 세 가지 일인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했다. △거의소청(擧義掃淸); 의병을 일으켜 적(일본)을 소탕하는 것 △거지수구(去之守舊); 망명해 의(義)와 절개를 지키는 것 △자정수지(自靖遂志); 의와 절개를 더럽히지 않고 순절하는 것 등이다. 죽음으로써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구하려는 제천의병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안승우 등 젊은 유생들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국모의 원수를 갚고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경기도 지평에서 의병을 모아 제천에 의병소를 차렸다. 많을 때는 1만 명에 달했던 제천의병이 봉기한 것이다.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점령하고 중부지역 일대를 장악하는 등 전기 의병기에 가장 큰 전과를 낸 의병이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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