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항쟁의 본산 ‘대정’에 ‘제주의병기념관’ 설립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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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항쟁의 본산 ‘대정’에 ‘제주의병기념관’ 설립해야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10.2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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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12〉
제주지역 의병항쟁과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제주항일의병관.
제주지역 의병항쟁과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제주항일의병관.

제주도민, 항일의병운동 ‘나라의 위태함을 걱정하고 나서지 않으면 불충’
제주도, 1977년 의병 항쟁 뜻 기리기 위해 모충사·의병항쟁기념탑 건립
제주시, 1997년 동광양~연북로길 ‘승천로’ 명명 의병장 고승천 얼 기려
1909 제주의병항쟁, 1918 법정사항일운동, 1919 조천만세운동 맥 이어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이인영 등 유림들이 ‘양왜배척’을 표방하며 의병을 거병했다. 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자 최익현·이재구 등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거사를 단행했다. 1906년 재판소 판사를 겸직하던 종전의 제주목사 제도를 없애고 행정만을 떠맡는 군수제로 바꿨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조종환 목사를 끝으로 1906년 10월 윤원구 군수가 제주에 부임했다.

1907년에는 일제의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났다. 제주 의병 항쟁도 이를 계기로 전개됐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제주목사가 재판소 판사를 겸하던 제도를 없애고, 제주 구재판소에 일본인 판사를 발령했다. 또 제주우편국과 관재서를 설치하는 등 통신과 재정,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장악했다. 

윤원구 군수는 ‘통신과 재정을 장악당하고 치안과 재판권까지 박탈당했으니,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며 1908년 말 군수직을 사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9년 2월 25일 제주의 유림 고사훈(의병장이 되면서 승천으로 개명), 이중심, 김석명, 노상옥, 김만석, 조병생, 김재돌, 양남석, 양만평, 한영근 등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발의해 의병장에 고승천, 이중심, 김석명을 추대하고, 3월 3일 제주성에 입성해 관덕정에 모여 거사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제주 전역에서는 갖가지 풍문들이 돌았는데, ‘제주에 와 있는 왜놈들을 의병들이 모조리 때려죽인다, 육지에서 의병 60명이 협재리로 상륙해 이미 제주 의병과 합세했다, 제주성 밖 광양에는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이 있으며, 삼읍의 장정들이 식량을 걸머지고 속속 제주성으로 집결하고 있다.’ 실제로 창의소와 무기를 제작하는 대장간이 있었던 광양에는 흉흉한 민심을 듣고 피난 떠난 사람들로 집들이 많이 비어있기도 했다고 한다. 

제주 유생 고승천(개명 전 고사훈), 이중심(개명 전 이석공), 김석명(개명 전 김석윤), 조인관, 노상옥 등이 제주 의병의 거사를 의논했다. 1909년 2월 고승천, 이중심, 김석명, 노상옥,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한영근 등은 기병을 결의하고, 의병장에 고승천과 이중심을 추대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3월 3일로 정해 격문과 통고문을 각 마을에 발송했고, 고승천은 병력 동원을 위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고승천, 조인관,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은 대정군 영락리에서 이장을 설득해 장정 20명을 가담시키고, 신평리와 안성리, 광청리 등지에서 장정 300여 명을 모집했다. 

하지만 대정군수 김종하가 마을 장정을 동원해 의병들이 집결하고 있는 광청리를 기습하면서 의병들이 흩어지게 됐고, 민가에 머물고 있던 고승천과 김만석은 3월 1일 체포됐다. 고승천과 김만석은 항복을 권유받았으나 항쟁의 뜻을 굽히지 않아 총살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3월 3일 거사는 물거품이 됐고, 격문과 통고문을 접한 이장들과 주민들도 거사 동참을 결의했다가 흩어졌다. 

 

제주 사라봉공원에 세워진 제주 의병항쟁기념탑.
제주 사라봉공원에 세워진 제주 의병항쟁기념탑.

■ 모충사·의병항쟁기념탑·제주항일기념관 건립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하자 최익현(1873년 제주에 유배됨)과 신돌석 등이 주도하는 의병 항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를 전해 들은 고사훈(승천)은 그들과 같이할 것을 결의해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갔다. 이후 의병장에 추대된 고승천은 조병생,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과 더불어 2월 25일 대정군 영락리와 심평리, 안성리와 광청리 등지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으기도 했다. 

의병 병력 동원을 대정현(이후 대정군)에서 시작한 것은 강제검(姜悌儉)의 난(1862), 방성칠(房星七)의 난(1898), 이재수(李在秀)의 난(1901) 등의 여러 민란이 대정현에서 항쟁 의지가 결집돼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대정군수 김종하는 인근 마을 장정들을 징발해 주야 교대로 의병들의 항거에 대비했다. 대정경찰관 분파소에서는 2월 28일 밤 인근 마을의 장정들을 동원해 의병들이 집결한 동광청리를 기습 공격하고, 민가에 머물던 의병장 고승천과 의병 김만석을 체포했다. 

일본 경찰은 고승천의 인품이 비범함을 알고 일제에 협력한다면 높은 관직에 나갈 수 있다고 회유했다. 이에 고승천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구하고자 함은 국민 된 도리가 아니겠느냐. 지금 나는 구차하게 너희들 감언이설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오직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따름이다.’라고 응수했다. 일제는 3월 4일 아침, 탈출을 시도하던 고승천과 김만석을 대정읍성 밖 안성리 돌동산에서 총살을 했다. 고승천이 서른아홉의 나이로 순국하자, 형제가 가매장한 곳에서 시체를 거둬 제주면 영평 동남쪽 두곡(杜谷)에 안장했다. 유가족으로는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제주시에서는 1997년 동광양에서 연북로로 이어지는 700여 미터의 대로를 ‘승천로’로 명명해 의병장 고승천의 얼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승천로’를 ‘고승천길’로 바꾸고 의병 항쟁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제주 의병과 관련된 유적지 등에 대한 발굴과 관리, 역사적 자료 수집, 보존과 전시, 조사연구, 의병운동 등에 대한 교육과 홍보, 기념사업 등 구체적인 지원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저항의 본산인 대정읍에 ‘의병기념관’을 설립해 오늘날 제주 정신의 근간이 됐던 한말 제주 의병의 본질적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이 반드시 추진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 1977년 의병 항쟁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주시 사라봉길 75에 ‘모충사(慕忠祠)’를 세우고, ‘의병항쟁기념탑’을 건립해 고승천, 김만석, 김석윤, 노상옥 등 의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대정읍 인성리에는 ‘의병기념비’가 건립돼 있고, ‘제주항일기념관’은 조천읍 신북로 303(5만 8582㎡)에 위치하고 있다. 


■ 제주의병항쟁 1909년 거의, 주모자 처형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대에 우리나라 남단의 섬, ‘제주도(濟州道)’에서도 자주독립을 지키려는 의병(義兵)의 활동이 있었다. 제주의 의병 항쟁은 1909년에 거의했으나 거사 직전에 탄로가 나서 주모자들이 처형당함으로써 그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

구한말 일본의 한반도 침탈이 본격화되던 1905년 3월 제주 유생 이응호(李膺鎬) 등 12지사는 ‘왜적의 침입을 단호히 배격한다’는 구호 아래 비밀결사조직인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했으나 대외적인 활동단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일본은 제주도의 행정체계를 개편, 목사를 없애고 3군제(3郡制; 제주군, 대정군, 정의군)를 실시하는 한편 면(面)·리(里)에 존재하던 전통적 직제인 풍헌(風憲), 약정(約正), 존위(尊位), 경민장(警民長), 동장(洞長), 기찰장(譏察將) 등의 제도를 없애고, 면장과 이장을 두도록 하자 주민들의 반일(反日)의식이 더욱 높아져 갔다.

이에 따라 일제는 제주에 목포경찰서 ‘순사분파소(巡査分派所)’를 설치한데 이어 1907년 7월 31일 군대를 해산한 후 그해 가을에 육군 부위(副尉) 데지마(手島半次)를 파견, 제주군과 대정군, 정의군의 군기고와 초소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제는 이어 1907년 순사분파소를 제주경찰서로 승격시키고 도내 15곳에 주재소와 출장소를 설치하는 등 경찰 병력을 증강했다. 위압적인 경찰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통치가 본격화하는 서막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주 유생 고승천(高承天, 별명 고사훈(高士訓)과 고경지(高景志)는 1908년 7월 제주도가 일본인들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제주군수 윤원구(尹元求)로부터 전해 듣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획한다. 고승천(高承天)은 김석명(金錫命), 노상옥(盧尙玉)과 함께 제주 광양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는 한편 비밀리에 의병을 모집해 훈련 시키고 활동자금 마련을 위한 모금에 나섰다. 

동지들을 규합한 고승천(高承天)은 1909년 2월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병생(趙丙生)의 집에서 구체적으로 창의(倡義)를 모의, “나라의 위태함을 걱정하고 나서지 않으면 불충(不忠)”이라는 명분을 걸고 “주권을 강탈하려는 왜적의 무리가 우리 강토를 짓밟고 있는 지금 각 지역에서 국권 수호를 위해 총궐기했으니 제주도민도 죽음으로 왜적을 격퇴해 국운을 회복하자”는 요지의 격문을 작성했다. 창의자들은 의병의 모집 목표를 만인(萬人; 1만 명)으로 정한 뒤 의병에 불참하는 이장(里長)에 대한 대책, 선박의 출입금지 등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해 나갔다.

의병대는 대정군 영락리에서 100여 명, 신평리에서 100여 명을 규합하고 또 대정성(大靜城)의 북문(北門) 밖에 있던 마을에서 수십 명을 규합, 2월 28일 대정군의 중면 광청리에 집결했다. 이들은 다시 이 마을에서 의병 60여 명을 더 모집, 3월 1일 두 개의 해안선을 따라 제주성을 향해 진격하면서 각 마을에서 의병을 규합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제주군 구우면 두모리에서도 이장 김재형(金裁瀅)을 중심으로 출병 준비를 했는데, 각 동별로 도통장(都統將) 1명씩 6명을 선정하고 그 밑에 통수(統首) 41명을 둬 각기 3~11명씩 전체적으로 227명을 지휘했다. 또 제주군 신좌면 대건리에서도 이장 부우기(夫祐基)가 20명을 모아 연판장을 만들어 창의에 대비했고, 이외에도 송당(松堂)과 교래(橋來)에서도 모병 활동과 정보 수집 활동이 있었다.

이밖에 제주군 신우면 어음리와 어도리에서도 이장을 협박, 각 30명씩 6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제주의 의병 항쟁은 애석하게도 거사 직전 일경(日警)에 알려져 좌절하게 된다. 의병장 고승천(高承天)과 김만석(金萬石)은 3월 4일 경찰에 체포돼 총살당했고, 경찰의 진압으로 의병운동에 가담했던 다수의 애국지사와 모병에 직·간접으로 간여했던 많은 도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중심(李中心), 노상옥(盧尙玉), 조병생(趙丙生), 양만평(梁萬平), 양만석(梁萬石)은 모두 도주해 체포를 면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의병운동의 주모자로 고승천 등 13명이 올라있다. 이들은 형을 받은 사실과 죄목, 나이와 직업, 본적과 주소, 형기와 판결법원, 비고 사항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각종 문헌과 기록에 따르면 창의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고승천(高承天)과 김석명(金錫命)이 유생으로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중심(李中心)과 노상옥(盧尙玉), 조병생(趙丙生)도 사회적 지위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한영근(韓永根)은 어도리에 사는 하인 신분이었으며, 양만평(梁萬平)과 양남석(梁南錫)은 신분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곤궁한 주민으로 적혀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뤄볼 때 제주(濟州)의 의병항쟁(義兵抗爭)은 창의 단계에서부터 일반 유생을 비롯해 계급이나 신분에 관계가 없이 구성돼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은 활동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09년 제주의 의병 항쟁은 의병장과 의병들의 인적기록이 전해지는 등 제주만의 독자성을 띠고 있다. 이후 1918년 법정사항일운동과 1919년 조천만세운동으로 맥을 이은 제주적인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으로 계승시킨 점에서도 실로 놀라운 역사적 가치를 지닌 민중운동(民衆運動)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주항일기념관 애국선열추모탑.
제주항일기념관 애국선열추모탑.
제주의병항쟁의 본산 대정현성.
제주의병항쟁의 본산 대정현성.
제주시 사라봉길 75, 모충사(慕忠祠).
제주시 사라봉길 75, 모충사(慕忠祠).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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