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괴석 용봉산(龍鳳山)·수암산(秀岩山)의 품에 안긴 충남도청신도시
상태바
기암괴석 용봉산(龍鳳山)·수암산(秀岩山)의 품에 안긴 충남도청신도시
  • 취재·사진=한관우·한기원·김경미·최진솔 기자, 협조=홍주일보·홍주신문 마을기자단
  • 승인 2023.11.01 14: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남도청신도시 주변마을 문화유산 〈10〉
용봉산(왼쪽 산)과 뫼너미고개(중앙 낮은 곳)을 중심으로 오른쪽 수암산의 병풍에 둘러 쌓인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전경.
용봉산(왼쪽 산)과 뫼너미고개(중앙 낮은 곳)을 중심으로 오른쪽 수암산의 병풍에 둘러 쌓인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전경.

충청남도청이 소재하고 있는 내포신도시(內浦新都市)는 홍성군 홍북읍과 예산군 삽교읍을 중심으로 조성된 신도시이다. 충청남도청 내포신도시를 ‘팔봉산(지금의 용봉산과 수암산)’이 품 안에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지금의 용봉산과 수암산을 합쳐서 ‘팔봉산(八峯山)’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결과적으로 충청남도청 내포신도시는 ‘팔봉산(용봉산과 수암산)’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용봉산과 수암산은 충청남도청의 주산에 해당한다.

충청남도청은 행정구역상 홍성군 홍북읍과 예산군 삽교읍에 걸쳐있으면서 신도시개발구역 명칭을 ‘내포신도시’라고 부르고 있는데, ‘내포(內浦)는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뜻으로 우리말로는 ‘안-개’라 한다. 내포(충남 북서부지역)라는 명칭 자체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처음 등장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내포(內浦)’라는 명칭은 고유의 정식 행정지명은 아니다. 다만 충남도청 신도시개발구역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는 소금과 생선이 흔해 부자가 많고, 임진, 병자 두 난리가 비껴간 곳으로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라 했다. 특히 가야산 동쪽 들판 가운데 ‘큰-개(內浦)’인 유궁진(由宮津)은 밀물 때, 홍주·덕산·예산·신창과 서울을 연결하는 항로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곳으로 평택항을 거쳐 수도권과 연결되는 뱃길의 시작점인 동시에 가야산과 오서산 등 주변의 10여 고을의 물산과 물살이 거칠어 난파가 잦은 안면도 바깥쪽을 피해 전라도 지역에서 올라오는 귀중품들이 서울(개경)로 가기 위해 모여들었던 교역로의 중간 기착지요, 출발지였다는 것이다.

 

■ 팔봉산, 용봉산, 수암산의 명칭 변화와 의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시대 용봉산의 명칭은 팔봉산(八峯山)이었고, 용봉사(龍鳳寺)와 청송사(靑松寺), 영봉사(靈奉寺), 수암사(秀岩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용봉사와 수암만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를 기점으로 팔봉산 내에 존재했던 여러 사찰이 폐사되고 용봉사와 수암만이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팔봉산(八峯山)’이라는 이름이 일제에 의해 ‘용봉산(龍鳳山)’과 ‘수암산(修庵山→水巖山→秀岩山)’으로 두 동강 났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용봉산과 수암산을 모두 합쳐서 팔봉산’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홍성 홍북 쪽 산줄기는 용봉산이 됐고, 예산 덕산 쪽 산줄기는 수암산이 됐다. 그래서 용봉산과 수암산은 일제가 갈라놓은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수암산’이라는 이름은 ‘해동지도’의 덕산조에는 ‘수암산(修庵山)’으로 나오고, ‘1767년 조선팔도지도’에는 팔봉산(八峯山)과 홍주(洪州) 북면(北面)의 용봉산(龍鳳山)과 함께 ‘수암산(水巖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1872년 지방지도’의 덕산에는 ‘수암산(秀巖山)’으로 묘사돼 있다. 또한, 주기에 “관아의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덕산군 현내면 수암산이 둔리(屯里)에 있다”는 내용이 확인되고 있다.

용봉산은 동아시아 최고의 홍북 석택리 선사유적지에서 보듯이 소금을 비롯한 풍부한 수산자원, 예당평야의 막강한 농업생산력, 해상교통로의 경제력(당진으로 들어온 중국 문물이 내륙으로 전해지는 교역로)의 중심에 있었고, 여기에 산이 지니고 있는 신령함이 보태져서 신라의 천년 도읍지인 경주 남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불상을 품고 있기에 정치적으로는 비록 변방에 있었지만 문화적 입장에서는 결코 변방이라고 볼 수 없는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봉산에는 99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불교 문화가 융성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산 하나를 두고 행정구역에 따라 용봉산과 수암산이라 불리는데, ‘용봉산’이라는 명칭은 홍주목사를 지낸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동악집(東岳集; 逢僧江國憶洪都, 龍鳳山光水墨圖, 惆悵十年南又北, 白頭重對八峯無, 師, 洪州人, 住龍鳳寺,)’과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 湖西錄, 甲申秋, 除洪州牧使, 李上舍遊龍鳳山, 投示松落菴詩, 和而奇之)’에 소개되고 있으며, 1767년에 제작된 ‘조선팔도지도’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관련 ‘일제에 의해 용봉산과 수암산이 나누어졌다는 기존의 견해는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도 있기는 하다.

 

용봉산 물개바위.
용봉산 물개바위.

■ 홍성·예산 잇는 용봉산·수암산 ‘기암괴석 
용봉산을 ‘작은 금강산’이나 ‘충남의 금강산’이란 애칭이 붙은 것은 용봉산 장수가 월산 장수와 소향이라는 처녀를 두고 바위와 돌을 던지며 싸웠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수많은 바위와 기암괴석 덕분이다. 용봉산 장수가 월산 장수와 싸우면서 돌을 던진 곳인 ‘투석봉’을 비롯해 투석봉에서 건너다 보이는 최영 장군 활터, 옛날 산 아래 살고 있었던 효성 지극한 효자가 죽은 뒤 봉우리에 큰 바위 하나가 솟아올랐는데 효자의 넋이 바위로 변해 환생한 것이라고 믿었다. 효자는 산소를 지키며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고, 세월이 흘러 3대에 걸친 아버지와 효자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사람들은 삼층으로 솟아오른 바위를 3대 효자의 넋이 변한 바위라 여겨 ‘삼등바위’라 명명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행운바위는 바위 위에 돌을 던져 올리면 행운이 온다는 바위다. 용봉산에는 암벽에서 옆으로 자라는 소나무가 있는데 수령이 100년의 세월이 족히 흘렀다고 전한다. 바위에 붙어 자라는 소나무의 신기한 모습에 시선이 고정되며 생명력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용봉산 정상에 이르면 정상이 온통 바윗덩어리다. 주변 풍광은 금강산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최영 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난 고려 말기의 장군이다. 최영의 묘는 풀이 돋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그의 나이 16세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라고 한다. 산 중턱 높은 곳에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충남도청 내포신도시의 조망은 자연이 빚어 놓은 열두 폭 병풍인 용봉산에 둘러쌓여 사람들이 빚어내는 희망찬 열기와 만물의 번영을 용의 기상으로 뿜어내고 있다.

이러한 희망과 기대는 용봉산의 기묘한 바위들의 이름을 듣고보면 더욱 또렷해 진다. 촛대바위, 악귀봉, 노적봉, 병풍바위, 거북바위, 신랑각시바위, 의자바위, 용바위, 자라바위, 흔들바위, 노처녀바위, 사자바위, 두꺼비바위, 행운바위, 삽살개바위, 물개바위 등등의 기암괴석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물들이고 있다.

용봉산의 용맥(龍脈)에 대해서는 산의 형상이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용봉산(龍鳳山)’이라고 불리고 있다. 용봉산은 발길 닿는 곳마다 신비하고 기기묘묘한 암석들이 널려있으며, 각종 불교문화의 유산들이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용봉산 골짜기에는 절터가 남아 있는 곳이 많아 옛날 불교 문화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골짜기마다 전해오는 전설과 주변의 흔적들은 불교 문화의 보물창고로 불리기도 한다.

솟아오른 용(龍)은 곧장 내달아 용봉사 뒤쪽 용바위와 ‘홍성신경리마애여래입상’에 이르러 틀임을 하며 변화무쌍함을 이룬다. 그 변화의 한줄기는 병풍바위를 이루고 구룡대(九龍臺)에서 평지로 들어간다. 다른 한줄기는 곧바로 내달아 ‘하늘의 음악을 적어놓은 듯한 빼어난 경치가 가히 군자의 마음을 빼앗아 욕심을 일으킬 만하다’는 악기봉(樂記峰)을 만들어내고, 한번 더욱더 기세 좋게 틀임해 노적봉을 지나 최고봉에 이른다.

여기서 또다시 두 줄기로 내리쏟으며 한줄기는 역행하듯 흘러 용방(龍坊; 용이 사는 동네)의 뒷산을 이루고 다른 한줄기는 투석봉에서 갈라져 ‘홍성상하리미륵불’과 옛 청송사(태고 보우의 사리탑을 모셨던)에 이른다. 이때 용방으로 향하는 용맥(龍脈)과 투석봉 사이에 큰 계곡이 형성되는데, 움푹 빠지며 기운을 끌어당기듯 모으는 계곡의 9부쯤 깎아지른 절벽에 물이 나오는 작은 굴이 용혈(龍穴)을 이루고, 좀 더 아래 ‘홍성상하리마애보살입상’을 지나 곧장 달려 내려오며 수직의 ‘용봉폭포’를 만든다. 

병풍바위 능선 아래로 형성된 계곡 입구를 구룡대라 한다. 구룡대를 들어서서 ‘용봉사 마애불’을 만나고 용봉사를 지나 최고봉으로 이르게 된다. 그래서 구룡대는 아홉 마리의 용들이 마지막 하나를 얻어 완성에 이르고자 하는 중생들을 보살피고,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들고나는 입구라는 뜻이 된다. 지금도 구룡대 주변에는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이야기가 떠도는 것도 이 같은 연유가 아닐까.

옛 문헌에 따르면 현재 용봉천(싸라기내)은 미옥천(米玉川)으로 불렀고, 들판으로 길게 내려온 ‘쥐산’과 용봉사 입구 중간쯤에 위치한 ‘용방치기마을’의 방죽(龍坊築)을 지나 덕산으로 왕래하는 길이 있었다고 전한다. 용방축(龍坊築)이라는 용어는 ‘용이 사는 동네의 방죽’이라는 말이고, ‘치기’는 마을 어귀를 일컫는 방언이다. 따라서 ‘용방치기’는 용이 사는 마을의 입구라는 뜻이 된다. 전국에 용과 관련된 용방(龍坊)이라는 동네가 여럿 있다. 따라서 용방축은 물을 막았던 축대로서 예전 이곳에 용과 관련된 큰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방치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옥천의 상류 방향 마을 중간에 용이 태어났다는 용총샘(龍泉)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현재 ‘용방치기 사지(寺址)’가 남아있고, 주춧돌 등은 당시 사찰의 위용을 가늠케 한다.

수암산(秀巖山; 280m)은 예산군 덕산면과 삽교읍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수암은 산 정상에 있는 수려한 암봉에서 유래한 지명이라 전해진다. 남쪽인 홍성 홍북의 용봉산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내리며 예산 덕산·삽교의 수암산 줄기로 이어진다. 아산만으로부터 예당평야를 밀고 들어오는 바다의 기운이 신평리에서 가야산과 부딪치며 불쑥 솟아오르는 곳, 구만리에서 삽교평야를 밀고들어와 세심온천 쪽에서 수암산에 오르면 시작점에 고려 시대 불상으로 보물로 지정된 높이 5.5m에 달하는 ‘삽교석조보살입상(보물 제508호)’이 유궁진을 바라보며 서있다. 손에는 지팡이를 짚었는데, 지팡이를 짚고 중생을 구제하러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아니면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빨리 와서 보살펴 달라는 중생들의 염원인지? 굳게 다문 듯 잔잔한 미소는 자식을 향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다고나 할까. 

수암산 정상부를 감싸면서 만들었다는 ‘수암산성’을 비롯해 수암산 정상에는 전망대와 풍차가 있고, 그 아래 동쪽 기슭에 있는 ‘법륜사’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거북바위’와 ‘할매바위’가 있다. 할매바위 지척에는 ‘5형제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옛날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형제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조정에서 바른말을 하다가 역적으로 누명을 쓰고 그 자리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양으로 향했고, 어머니가 떠난 후에 이곳에 남겨진 오형제는 살길이 막막했다.

하는 수 없이 10년을 기약하고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장남은 자기 집이 내려다보이는 수암산에 초막을 짓고 어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역적으로 누명 씌워 죽인 원수의 첩이 돼 돌아왔다. 장남은 흩어진지 8년 만에 형제들에게 연락을 했다. 오형제는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고 관헌의 눈을 피해 장남의 초막으로 피했다. 그러나 이미 관헌들이 오형제를 체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으므로 스스로 자결을 했다.

관헌들은 오형제가 죽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억수 같은 비가 와 그 자리에 엎드렸다. 한참이 지난 후 주위가 조용해지자 고개를 들어보니 초막과 오형제의 시체는 간곳없이 사라지고, 그곳에 오형제를 닮은 다섯 개 바위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아버지의 원한을 갚고 죽은 다섯 아들의 넋이 바위가 됐다고 해, 사람들은 이를 ‘오형제 바위’라 불렀다”고 하는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수암산에는 또 합장바위, 산신령과 의자바위, 장군바위 등과 산줄기의 서쪽에 있는 내포사색길로 내려가는 길에는 ‘연인바위’ 등이 있어 기암괴석으로 펼쳐진 용봉산과 수암산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암산으로 오르락내리락 재미있게 등산을 할 수 있는 산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수암산에는 ‘타포니(Tafoni, Tafone)’라고 하는 암석이 눈길을 잡는다. 암석이 물리적·화학적 풍화작용을 받은 결과 암석의 표면에 형성되는 요형(凹型)의 미지형을 풍화혈이라고 하는데, 타포니(Tafoni, Tafone)는 풍화혈 중에서도 특히 암석의 측면(암벽)에 벌집처럼 집단적으로 파인 구멍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풍화혈은 해안이나 화강암 산지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비가 내린 후 물이 고이거나 그늘이 져서 주변보다 습하기 때문에 입상붕괴가 선택적으로 촉진될 수 있는 부위에 형성된다고 한다. 또한 역암, 사암이나 석회암에서도 형성되며, 특히 건조지역에서의 발달이 인상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00대 인기 명산인 용봉산(龍鳳山; 381m)은 홍성군의 진산으로 기암괴석이 아름다워 충남의 금강산으로도 불리는 산이다. 예산(禮山)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예당저수지가 있고, 비옥한 예당평야가 있다. 특산물로 사과가 유명하다. 충남도청 내포신도시를 품에 안고, 홍성과 예산을 잇고 있는 용봉산과 수암산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기암괴석(奇巖怪石)의 암산(巖山)으로 발길 닿는 곳마다 신비한 암석(巖石)들이 행운을 주는 산이다. <끝>
 

수암산 오형제바위.
수암산 오형제바위.
수암산 연인바위.
수암산 연인바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