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신례원전투지 ‘다시 개벽, 동학의 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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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신례원전투지 ‘다시 개벽, 동학의 횃불’
  •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24.05.2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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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3〉
예산읍 관작리의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의 기념탑.
예산읍 관작리의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의 기념탑.

내포(內浦)는 바닷물이 내륙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만(灣)의 포구를 의미한다. 충남 서북부 일대에는 이런 포구가 많이 발달해 있어서 이 일대를 내포라고 부르게 됐다. 오늘날 내포는 서천·면천·서산·태안·온양·평택·홍산·덕산·청양·남포·비인·결성·보령·아산·신창·예산·해미·당진을 포괄하는 지역을 일컫는 명사가 됐다. 내포는 충청도 서부지역 동학의 본거지였으며, 그 중심에 예산이 자리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신례원 전투가 벌어졌던 예산 관작리에는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억압과 탐학의 굴레를 벗고 불평등한 사회를 타파하여 개벽 세상을 열고자 들불처럼 일어선 내포동학농민혁명군이 1894년 10월 26일(음) 싸운 전투지이다. “외세침탈 막아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자”고 외치며 “수탈을 일삼고 민중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라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던 ‘예산동학농민혁명 전투 터’이다.

예산 관작리 전투지는 내포지역 동학농민군들이 관군, 민보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지이다. 1894년 10월 1일 서산과 태안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들은 예산 목소리와 덕산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해미성을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는 등 그 세력을 확대해 갔다. 이들은 10월 24일 승전곡 전투에서 일본군, 관군과 싸워 승리하고 그 기세를 몰아 25일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까지 진출했다. 이날 저녁에는 신례원 관작리로 진출해 들판에 포진했다. 홍주목사 이승우가 이끄는 관군과 민보군이 농민군을 공격했다. 기습에 놀란 농민군은 멈칫했으나 불과 3000명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2만 여명의 농민군은 민보군을 포위하고 공격해 백여명을 쓰러뜨렸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관군들이 전사했고 나머지는 도망했다. 매우 의미 있는 농민군의 승전지이다. 2020년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이곳에 동학농민혁명관작리전적지 기념탑을 건립하는 등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예산읍 관작리 산 3-1)을 조성했다.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표지석.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표지석.

■ 예산동학농민혁명공원 조성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담은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탑’은 예산군 예산읍 관작리 전적지에 세워졌다. 예산군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인 지난 2020년 5월 11일 예산동학농민혁명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다시 개벽, 동학의 횃불’을 주제로 한 기념탑은 내포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내포동학운동 최대집결지의 의미를 담았다. 가로 10m, 세로 6m, 높이 7m 규모로 화강석과 청동이 주재료다. 주탑의 형상은 동학농민들의 뜨거운 의지와 피어나는 염원을 표현했으며, 사발과 쌀을 조형화해 ‘민본세상’을 위해 희생한 내포동학농민군의 혼을 담은 것이 특징이다. 기념탑 주변으로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문을 배치했다.

예산군은 지난 2018년 7월 동학농민혁명유족회의 건의에 따라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건립을 민선 7기 황선봉 예산군수 공약사업으로 선정하고 군비 5억 2500만 원을 투입해 정비사업을 벌였다. 이를 위해 지난 2019년 2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실무회의를 거쳐 기념탑 디자인을 확정했으며, 같은 해 8월 착공해 지난 2020년 4월 23일 건립을 완료했다.

당시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인 박성묵 회장은 “충남지역이 그동안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불모지처럼 있었는데, 이제껏 조명하고 발굴해왔던 노력이 오늘 기념탑에 응축된 것 같다”며 “기념탑은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는 것이다. 박제화된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동학이 추구하는 평등사상과 인간의 존엄성, 사회개혁 등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히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대중에게 알리고, 특히 청소년에게 교육의 장으로서 체험프로그램 등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동학농민군의 혼을 담은 ‘사인여천 보국안민’.
동학농민군의 혼을 담은 ‘사인여천 보국안민’.

■ 가장 치열한 전투 홍주성 공방전
1894년 10월 24일 면천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25일 덕산군 구만리 전투에서도 승리한 후 26일 예산 신례원 후평에 도착해 대진을 설치했다.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하자 그동안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도 후평으로 합류했다. 신례원 후평에 대진을 설치한 동학농민군은 27일 새벽 관군과 유회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들은 예산과 대흥, 홍주 지역의 유회군과 예산 관아에 소속된 관병들이었다.

홍주군수 이승우가 토벌군 수십 명과 유회군 4~5000명을 나누어 보내 수십 문의 대포를 쏴 동학농민군을 몰살하려 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이미 10여 개의 군에서 전쟁에 쓸 무기를 모았으며, 숫자도 더 많았다. 반나절 정도 대접전을 벌인 끝에 동학농민군이 승리해 예산에 무혈입성했다. 목소전투 이후 덕포와 예포 중심의 연합전선에서 충남 전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하나의 통합된 조직으로 정비했다. 그러자 대흥 현감과 예산 현감, 부안 수령이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홍주성으로 피신했다. 또 위기를 느낀 유생들이 천안과 홍주 등에서 유회군을 조직했다.
수탈과 탐학의 부패정치를 혁파하고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내포 지역 3만여 동학농민군은 한양으로의 진격을 위해 집결했던 예산 관작리에서 관군과 유회군으로 편성된 관군을 물리치고 1894년 10월 27일 삽교 송산리 역리 일대에 주둔했다. 농민군은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 탄신일인 28일 이곳에서 천제를 지내고 다음 날 홍주성으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무수한 희생자를 남기고 불행하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동학농민군의 자주 평등 자유의 숨결이 서려 있는 삽교읍 송산리 92번지의 우물터는 역리마을과 함께 내포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유적지이다.

당시 홍주성 공략에 나선 동학군의 수는 대략 2만 5000~3만 명에 이르렀다.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10월 27일 예산으로 진입해 관아를 습격한 다음 삽교 쪽으로 이동, 역촌(현재 삽교읍 역리와 송산리) 일대에서 하루를 유숙했다. 

11월 6일이 지역을 지나던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은 “지푸라기가 연달아 깔려있고 빈 볏단도 널려있었다. 불을 피운 자국과 밥 지은 흔적이 수리에 걸쳐 있었다”고 해 동학군의 수가 매우 많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당시 역리 마을 옆에서 주둔하던 동학군들은 취사에 필요한 물을 바로 이 우물에서 길어다 사용했다고 한다. 역리 일대에서 하루를 유숙한 동학군들은 1894년 10월 28일 오후 1시경 홍주성을 향해 진군해 오후 4시경에 홍주성 외곽에 당도했다. 이때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군의 홍주성 공격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저항을 뚫고 홍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동학혁명 당시 내포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전투인 홍주성 공방전이었다.

 

내포동학농민군 추모비.
내포동학농민군 추모비.

■ 관작리전투 승리, 예산관아 점령
예산 신례원 관작리 전투 후 1894년 10월 27일 삽교 송산리와 역리 일대에 주둔했다. 동학군은 동학 창명자 수운 최제우 탄신일인 28일 이곳에서 기도제를 지내고 다음 날 홍주성으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무수한 희생자를 남겼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홍주성 공격에 나선 농민군이 예산에서 홍주로 향하던 중 하루를 유숙하며 주둔한 곳이 삽교읍 역리 125-23 일대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물리치기 위해 반일 항쟁을 결심한 내포지역 3만여 동학농민군은 1894년 10월 27일 ‘관작리전투’를 승리하고 한양 진격을 바꿔 곧바로 예산 관아를 점령했다. 의기충천한 농민군은 ‘天不變亦易不變(천불변역이불변;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이란 대장기를 앞세워 오가를 거쳐 이곳 역리 일대에 주둔 했다. 당시 내포지역 주요 관아는 대부분 농민군 수중에 떨어졌다. 당시 농민군이 사용했던 마을 대동샘(삽교읍 송산리 92일대 동학농민군 우물 터)이 전해지며 중요한 유적지이다.

내포동학농민혁명에서 예산 사람 박인호(朴寅浩·1855~1940)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1883년 동학에 입도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승전곡 전투와 신례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동학이 천도교로 개편된 후에는 제4대 교주가 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교주로서 교단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33인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자금을 지원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1년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에도 신간회 활동과 ‘멸왜기도운동’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애국 독립운동을 펼쳐 해방 이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이밖에도 예산의 박덕칠, 태안의 문장로·함안석, 아산의 이신교 등 많은 동학의 지도자들이 내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내포 동학농민혁명의 특징은 반봉건과 더불어 일본 침략 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국주의 노선이 강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관작리전적지 기념비.
관작리전적지 기념비.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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