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독립운동, 주산 주렴산 국수봉 ‘독립만세운동’ 발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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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독립운동, 주산 주렴산 국수봉 ‘독립만세운동’ 발원지
  • 취재·사진=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주민·학생기자단
  • 승인 2025.10.30 07:11
  • 호수 914호 (2025년 10월 30일)
  •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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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12〉
독립운동가 이철원 생가. 뒤에 보이는 주렴산 국수봉에서 횃불독립운동만세가 시작됐다.

올해(2025년)는 을사늑약 12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단순한 군사적 투쟁이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숭고한 애국정신의 발로였다. 오늘날 우리 후손들이 누리는 자유는 숱한 독립운동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1만 8000여 명이고 현재 생존자는 5명뿐 이라고 전해진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안창호 이봉창 운봉길 유관순 열사 같은 유명 인사도 있지만 이슬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무명의 선열들도 적지 않다.

보령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잔악한 일제에게 강압적으로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치욕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자 잠자고 있던 민족혼이 깨어나면서 자주독립을 갈망하는 우국지사들이 국내외에서 목숨을 바쳐 봉기했던 결과로 나타난다. 국가로부터 서훈된 보령 출신의 항일독립지사 34명과 주산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18명의 추모비를 한데 모아 합동으로 지난 2001년 보령시 지원으로 주산면행정복지센터(보령시 주산면 야룡리 181-1)에 세우고, 민족자존의 가치를 드높였던 항일 애국의 위업을 기리고 있다.

■ 주산 주렴산 국수봉에서 ‘독립만세’ 시작
보령 주산면의 주렴산 만세운동은 지난 1919년 4월 17일 서울의 배재학당을 다니던 이철원이 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을 고향에 알리기 위해 동지 18명과 함께 주렴산 국수봉에 올라가 횃불을 밝히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작됐다. 주렴산(해발 351m)은 보령 주산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근 마을은 주산면 주야1리 마을이다.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이철원을 비롯한 18명이 주렴산 국수봉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독립운동이다. 징을 치며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했고, 마을 사람들도 만세 소리를 듣고 주렴산으로 올라가 합세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웅천 시내 2km 지점까지 행진하다가 일제 경찰의 제지로 주모자들이 연행되면서 시위대는 해산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참가자 중 한 명이었던 박윤화가 홀로 주산면 야룡리 복개봉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이틀간의 시위로 체포된 박윤화·임문호·이철규·이장규·박태현·김양제 등은 각각 태형 90대, 이성규·윤기호·이관규·이성수·이홍규·박성하 등은 각각 태형 60대의 형벌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에 박윤화·임문호·이철규·이장규·박태현·김양제·이성규·윤기호에게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그날의 만세 사건을 기념하고 항일정신을 후세에 영구히 기리기 위해 지난 1997년 5월 주렴산 기미독립만세운동 선양사업추진위원회에서 기념비를 세우고, 해마다 3·1절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주렴산 3·1독립만세운동’이 태동된 곳은 증산리(주산면 증산1리마을, 시루뫼)의 이철원(1900∼1979)의 집(생가)에서 이뤄졌으며, 뒷산인 주렴산 국수봉에서도 행해졌다. 국수봉 정상에도 ‘주렴산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보령시는 이철원 지사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85.6㎡ 규모의 생가를 2020년 12월 복원했으며, 생가 주변 1000여㎡에는 복합문화공간과 어울림마당도 조성했다. 이철원은 이곳에서 태어나 한학과 신학문을 배우다가 서울에 가서 배재학당에 다니던 중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동료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 후 휴교령으로 인해 서울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동지들을 규합하고 모의해 ‘주렴산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곳에 내려온 이철원은 생가 우측에 있던 구옥(소형 초가집)인 고모부 윤용원의 집에서 비밀리에 거사를 계획하고 태극기 등을 준비했으며, 동지들을 규합한 후 거사 당일에는 생가 사랑채에 집결해 뒷산인 주렴산 국수봉에 올라 거사를 실행했다. 거사 후 이철원은 피신해 중국, 미국 등지에서 학업과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해방 후에는 제2, 제4대 공보처장을 역임했다.

‘주렴산 3·1독립만세운동’은 보령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실행된 독립만세운동으로 발원지가 된 곳이다. 이곳에 참여한 대부분의 애국지사도 마을 사람들이거나 친인척 관계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주렴산 3·1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장소가 ‘이철원의 생가’다. 생가는 2020년 8월 안채만 복원·정비했다. 생가 정비 이전의 구옥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포군이 폐지되고 1919년 남포군 청사가 헐리게 됐는데, 헐리는 군청사의 목재들을 이철원의 부친인 이승규(1882~1954)가 가져다가 개축한 것이라고 전한다. 목재들을 웅천천 하구 독곶말까지는 배로 운반하고, 다시 이곳까지(2㎞)는 인부를 동원해 지게로 운반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현재 복원된 본채뿐 아니라 1990년대 말까지는 사랑채도 보존돼 있었으나 사랑채는 없어진 상태다. 본채와 사랑채 개축은 이철원의 거사 직후에 이뤄졌다. 

이 가옥을 개축한 이승규는 1911년 주산에 ‘옥성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복원하고 ‘조선어연구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휘문의숙, 만주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교사, 동아일보 기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교수 등을 역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였다고 전해진다. 

■ 보령지역 유림들이 항일운동에 큰 족적
광복 80주년을 맞아 지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 현장을 소개한다면, 보령의 독립운동가 백관형(白觀亨)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어난 홍주(洪州) 의병에 참가해 유준근(柳濬根)과 함께 참모(參謀)로 활동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유림대표 137명 중 1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보령 출신의 파리장서운동 참가자들은 김지정(金智貞), 김병식(金炳軾), 류준근(柳濬根), 류호근(柳浩根), 백관형(白觀亨), 신직선(申稷善) 등 전국 137명의 유림 중 여섯 명이 서명함으로 보령의 나라사랑 정신과 웅천 집성당을 중심으로 애민, 애향 사상을 최고로 빛나게 했다. 파리장서운동은, 전국의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20일부터 26일 동안 전국의 유림지도자 137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침략국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 조선이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자주독립국가임을 전 세계에 알린 분들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곽종석이 대표로 추대돼 글을 짓고 곽종석, 김복한 등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한 1420자의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파리평화회의에 폭로한 유림의 최대 독립운동이 바로 ‘파리장서운동’이다.

또한 보령시가 선정 추모하는 보령의 5열사가 있다. ‘보령 5열사’는 해방 이후인 1948년 보령지역의 유림들이 항일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유림계 인사인 백낙관, 황재현, 백관형, 유준근, 김복한 열사 등 다섯 명을 꼽을 수 있겠다. 이후 지금까지 보령의 5열사는 보령 지역 항일운동과 관련해 오랫동안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 돼왔던 열사들이다. 

한편 보령 출신으로 경북 출신의 서상돈과 함께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대구광문사 김광제 사장이 있다. 김광제는 1866년 7월 1일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힌 뒤 23세인 1888년 종 9품 영회원 수봉관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랐다. 1905년 동래경무관으로 재직 중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사직 상소를 올려 친일파의 탄핵과 내정쇄신을 요구했다. 

상소의 내용은 대한제국의 위기를 직시하고, 일본의 경제적·정치적 예속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상소를 통해 “밖에서 오는 재난보다 가렴주구하는 신하와 탐학한 관리가 더 두렵다”고 강조하며 “나라를 어지럽히고 도리를 해치는 무리들을 제거하고, 재야의 어진 인재를 등용하며, 교육과 법률 정비, 탐관오리의 척결을 통해 백성을 강하게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소를 올린 결과 고군산도에 유배됐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1906년 대구에서 서상돈과 함께 광문사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대한제국 시기 국권회복운동은 의병항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나뉘어 전개되는데, 국채보상운동은 국민의 관심과 참여 열기가 높아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은 국채를 국민 모금으로 갚기 위해 1907년 1월 29일부터 1908년 7월까지 전개됐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는 목적으로 구화폐를 환수하고 신화폐를 유통했으며, 근대시설 개선과 철도부설 등의 명목으로 각종 차관을 도입했다. 이렇게 도입된 차관은 1907년 1300만 원에 달했으며, 이는 대한제국 1년 예산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국채보상운동은 경제적 자립을 통해 일본의 재정적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적 열망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통감부의 탄압과 내부 조직의 한계로 인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모금된 자금은 후일 민립대학 설립 운동 등에 사용됐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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