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님이 침묵하는 사태로 본 ‘님의 침묵’
1920년대, 우리나라 상황은 결국 일본에 빼앗겨 식민지가 된 상태
문학을 통해 시대 아픔을 노래하고 민족정신 고양시킨 만해 한용운
만해 고향인 충청도 홍주 땅, 민족정신·민족문화의 상징적 중심지로
만해 한용운(1879. 8. 29~1944. 6. 29) 선사의 종교적·사상적 고향인 충청도 홍주(洪州) 땅, 홍성에는 광복 80년을 맞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님의 침묵’의 정신이 오롯이 살아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곳이다. ‘님의 침묵’의 산실은 강원도 인제 땅, 설악산 백담사 계곡이었지만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 땅,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에서 아전 출신인 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유천(裕天) 이었으며,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계명은 봉완(奉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학문적 기초를 다졌는데, 6세 때 ‘통감’과 7세 때 ‘대학’을 읽고 이해할 정도로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였다.
한용운의 아버지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으며, 한용운도 16세에 아버지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한용운은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홀연히 사라져 강원도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14세 때 결혼을 했던 한용운은 고향인 홍성의 처가에 돌아와 2년여 은신하다가 다시 방황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1905년, 26세의 나이에 한용운은 백담사에서 득도, 승려가 됐다. 출가 후에도 만주와 시베리아를 방랑하다가 귀국해 안변의 석왕사에서 참선하는 등 불교적 수행과 함께 방랑 생활을 이어갔다. 1911년에는 만주에서 교포로부터 밀정으로 의심받아 총격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만성요두증(慢性搖頭症)’의 원인이 됐다고 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되는 ‘님의 침묵’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머리에 담아보는 기념비적 시다. 바로 한용운의 작품이다. 한용운은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썼고 불교 개혁을 주장한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 나라 잃은 고통 ‘님의 상실’로 형상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고 버티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붓는”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종교적 믿음을 광복의 의지와 연결해 노래한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뭐니 뭐니 해도 궁금한 것은 ‘님’의 실체일 것이다.
아무래도 ‘님의 침묵’이 출간된 1920년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이 시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님이 침묵하는 사태로 보고 조국 광복에 대한 강한 신념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조국 광복의 신념을 말하는데, 성적 욕망을 암시하는 연시(戀詩)로 보이는 ‘님’을 승려가 그것도 하필 망국의 시대에 끌어들여야 했을까.
한용운은 승려답게 욕망의 동학에 관해 전문가다. 불교는 인생이 고해인 이유는 바로 헛된 욕망에 근거한 집착에 있다고 본다. 그러한 통찰을 역이용하기 위해서 한용운은 일부러 성애의 대상일 수도 있는 ‘님’을 등장시킨다. 무릇 욕망(성욕)은 충족되지 않을 때 가장 강하고, 충족하고 났을 때 가장 약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윤리의식에 비춰 볼 때 문제가 많은 이 서술에서 성욕의 동학을 발견할 수 있다. ‘님의 침묵’에서 늘 조국이 자신의 곁에 함께 했을 때는 애국심이라는 욕망이 약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조국이 건재할 때 애국의 욕망은 약하다. 그렇다면 애국의 욕망은 언제 가장 강할까. 마찬가지로 조국이 멀쩡하지 않을 때, 혹은 갓 멸망했을 때 가장 강하다. 그렇다면 1920년대, 우리나라의 상황은 결국 일본에 빼앗겨 식민지가 된 상태이다. 그렇다고 슬픔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통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새 희망으로 만들자’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1920년대 한국문학은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상상적 대응의 소산이다. 일제는 1910년 강제로 한국을 합병한 이후 10년 동안 식민지 지배의 기반을 확립했다. 그 결과 1920년대가 되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나라 잃은 고통이 구체화 됐다. 1920년대 시에서 나라 잃은 설움은 흔히 ‘고향 상실’과 ‘님의 상실’로 형상화된다. 그 상실감을 각기 다른 측면에서 부각시킨 대표적인 시인이 바로 김소월과 한용운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의 상징적 중심지
만해 한용운은 한국 근대 시사를 빛낸 민족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사상가, 철학자요, 불교의 선사였다. 만해의 시는 어려운 시대를 견디는 서정시의 역설적 힘과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문학의 전통 속에서 불교적 명상과 형이상학적 인식의 자리를 새롭게 찾아준 시인이 바로 한용운이다. 불교사상과 민족, 민주사상과 문학사상이 한용운의 시적 영혼 안에서 미학적으로 빚어졌다는 게 평론가들의 평가다. 한용운은 일제의 강점하에 놓인 식민지라는 잃어버린 시대 혹은 만해 한용운의 비유대로라면 침묵의 시대에 저항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님이 침묵하던 시대를 살면서 님의 부활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님을 위한 사랑의 노래를 불렀던 한용운은 식민지 시대에 민족의 정신을 지킨 민족의 시인이었다.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은 불교를 통해 깨달은 정신의 깊이가 감각적 실체로 탁월하게 변용된 시편으로 짜였다는 평가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침묵하는 님의 주위를 휩싸고 돌며 부르는 시적 화자 ‘나’의 ‘사랑의 노래’이다. 님은 갔다.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다. 그런데 화자는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지향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과 지향 의식이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사랑의 노래를 가능케 하고 있다. 시인으로서 한용운이 살았던 일제강점기는 모순의 시대요, 침묵의 시대였으며, 저항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곧 님이 침묵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침묵한다고 해서 님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만해는 님의 실체를 발견하고, 님을 향한 사랑의 노래를 절절하게 불렀던 것이다.
문학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민족의 정신을 고양시킨 만해 한용운. 일본에 조국을 빼앗긴 현실과 민족을 되찾으려는 끈질긴 극복 의지를 담고 있는 ‘님의 침묵’ 88편의 시(詩)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의 염원을 담아 사랑의 노래로 민족의 저항과 아픔을 형상화한 시집이다. ‘님의 침묵’은 단순한 문학적 성취를 넘어 충청도 사투리와 토속어를 사용, 민족이 처한 상황과 정신을 일깨우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한용운의 삶과 사상은 우리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성, 사회적 책임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만해 한용운은 1944년 6월 29일 조국의 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눈을 감으면서도 “나는 가지만 민족의 혼은 남아야 한다”고 했다. 여전히 억압된 시대에서도 꺾이지 않는 정신의 표본으로 남아 있다.
한용운의 고향인 충청도 홍주(洪州) 땅, 지금의 홍성은 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예로부터 참으로 묘한 동네다. 충절과 충의, 독립과 관련된 인물들의 흔적이 유난히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홍성 홍북읍 노은리에는 고려말 최영 장군의 사당이 이곳에 있고, 조선 시대 사육신을 대표하는 인물인 성삼문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 독립운동을 펼친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와 사당, 기념관 등은 갈산에, 이웃 결성의 박철동에는 한용운의 생가와 기념관, 민족시비공원도 이곳에 있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홍주 땅, 홍성지역에는 지난 2012년 말 충남도청을 비롯한 충남교육청, 충남경찰청 등 충남의 행정기관이 들어오면서 충남의 새로운 행정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곳에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계승하고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의 상징적 중심지로 ‘만해 민족문학기념관·공원’ 등이 제대로 세워진다면…. 단순한 기념시설을 넘어, 독립운동과 문학·사상을 전국에서 모이는 후세들에게 교육하고 세계와 공유하는 문화 플랫폼, 문학정신의 자산으로 확장하기 위한 첫걸음이 시작된다면 어떨까.
‘님의 침묵’이 운명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현실이라면, ‘사랑의 노래’는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리라. 이런 의지를 홍주 땅에서 제대로 실천·실현한다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민족적·정신적 의지인 ‘님의 침묵’이야말로 지금까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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