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지역 지명은 일제의 탄압을 받을 당시에는 현재의 지명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옛 연기군 지역이었다.(*이하 옛 연기군 표기는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지역임)
옛 충남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는 비탈진 자그마한 산을 사이에 두고 ‘음달말’과 ‘양달말’로 나뉘는 곳이다. 볕이 잘 드는 곳은 양달말, 그늘진 곳은 음달말이다. 당시 음달말에 이수욱이라는 열여섯 살 청년이 있었고, 건너 양달말에는 추경춘·득춘 형제가 각각 살았다고 한다. 이들 말고도 전의면 일대에는 신지식에 호기심이 많은 청춘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롭던 마을에 ‘덕고개를 뚫고 경부선 철로가 들어선다’는 말이 마을에 돌기 시작했다. 1905년 일제는 전의면 덕고개를 깎아 철로를 만들었다. 덕고개는 높고 험준한 차령산맥 일부로 천안·목천과 전의면을 연결하는 비교적 지대가 낮은 고개였다. 아무리 낮은 고개라지만 ‘철로를 놓는다’고 하니 마을사람들은 신기한 듯 말을 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는데, 일제가 마을 사람들을 투입,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하면서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삽을 들고 흙을 퍼냈고, 그들의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고 금세 거뭇거뭇해졌다. 고개가 사라진 빈자리는 이수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분노가 점차 채워져 가고 있었다.
이수욱이 서른 살이 되는 해인 1919년 전의역, 그러니까 경부선 개통과 동시에 전의역과 조치원역이 문을 연 지 꼬박 14년이 됐을 무렵 이 두 역을 거쳐 경성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어났다. 새로운 지식에 눈을 뜨기 시작한 마을의 젊은 선구자들이 이화학당 등으로 매일 같이 통학하면서다. 조치원역에 사람이 붐비면서 가로등도 들어섰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수욱도 경성행 전의역 기차를 자주 이용하는 탑승객 중 한 명이었는데, 2월 26일은 평소와 달랐다고 한다. 3월 3일 진행될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수욱이 경성에 도착하고 며칠 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사람들이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전의행 기차에 올라탄 이수욱의 마음에도 독립을 향한 갈망이 점차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이수욱은 벗들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일념이 강해졌을 것이다.
■ 처음 독립만세를 외쳤던 ‘전의장터’
유관순 열사가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면, 옛 연기군에서는 ‘전의장터’에 모인 시민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고, 12일 뒤인 3월 13일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옛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 전의장터에서 이수욱의 주도로 첫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전의장터 만세운동은 연기지역에서 일제의 탄압을 가장 심하게 받은 독립운동으로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수욱은 유림의 집안에서 태어나 조부와 백부로부터 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서울을 왕래하며 신학문과 접하고 당시 정세를 익히며 성장한 인물로 꼽힌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세종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년 기록화사업 보고서’를 보면 당시 이수욱이란 인물과 전의장터 만세운동과 관련한 다양한 증언이 실렸다.
이수욱의 종손자 이규태의 증언에 따르면 “이수욱은 서울을 자주 왕래했고 3·1독립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른 직후에도 고향에서 생활하지 않고 상경해 서울 가회동에서 주로 생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수욱은 서울로 상경해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뒤 3월 6일 귀향해 전의면 신정리의 30대 전후 젊은 청년들을 규합해 만세시위를 결심한다.
이수욱은 귀향 후 바로 추경춘을 만나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뜻을 같이하기로 한다. 다음날인 7일 같은 마을의 박성교의 집에서 추득천, 윤자벽, 윤자훈, 윤상억, 김재주와 회합해 13일 전의 읍내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한다. 8일에는 김병옥의 집에서 정원필, 이장희, 이광희와 만나 13일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나눠줄 태극기 150본을 자택에서 직접 제작한다. 이수욱은 만세운동 당일인 13일 오전 9시쯤 장고개에서 시장을 보러가는 주민들에게 태극기 150본을 나눠 주고, 낮 12시 40분쯤 1000여 명의 군중들에게 연설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주창했다. 사전 약속으로 시장에 모인 추경춘, 추득천, 윤자훈, 윤자벽, 윤상원, 윤상원, 윤상억, 김재주, 정원필, 이장희, 이광희와 시장에서 참여한 이수양, 윤상은, 정상복, 이규영, 이상건은 윤자명·윤자벽으로부터 받아 옷 속에 숨겨 뒀던 태극기를 꺼내 들고 흔들면서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조치원에서 헌병과 철도원호대원 20여 명을 출동시켜 진압하기에 이른다. 이 만세시위로 이수욱 등 15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기도 했다. 전의면의 수형자명부는 공주지방법원에서 7명과 경성복심법원에서 5명, 고등법원에서 3명이 종결돼 모두 15명의 기록이 현존하고 있다.
■ 신정리 이수욱 주도로 첫 만세운동
현재 전의면사무소 앞마당에 위치한 애국지사추모비에는 이들 15명 이외에 윤상억을 포함해 16인이 3·1독립운동 애국지사로 기록돼 있다.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냈던 박은식이 집필, 1920년에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 문헌에 따르면 연기군(현 세종시) 만세운동은 전의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조치원과 연기 일대 등 지역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횃불시위를 포함해 10여 회가 넘는 격렬한 집회가 이어졌고 수천 명의 지역 주민들이 동참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전의장터 만세운동 항일투쟁은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있지만 이렇다 할 연구나 기념사업이 없어 시민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3·1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전의시장에는 현재 장날에만 상인들이 찾아오는 작은 골목길에 ‘만세길’이라는 도로명 표지판이 걸려 있고 전의면사무소 앞마당에는 기념비가 설치돼 있다. 연기지역에서 첫 3·1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 전의면에는 가장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
전의장터 만세운동이 사전 모의된 신정리 음달말길에는 전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처음으로 주도했던 이수욱 열사와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윤상원 열사의 손자 윤혁중 등이 살고 있다. 당시 전의면 신정리 이수욱 열사 자택은 1919년 3월 12일 전의장터에서 군중들에게 나눠 줄 목적으로 목판을 사용해 태극기 150본을 직접 제작했던 곳이다. 맞은편으로 할아버지 윤상원 열사의 자택 두 채가 빈집으로 남아있다. 주변으로 윤상은, 윤자훈, 윤자벽, 박성교, 윤자명 열사의 자택과 집터가 한데 모여 있다.
맞은편 동네인 양달말에는 추경춘, 추득천, 이광희, 이장희 열사의 자택 등 고속철도로 마을이없어진 윤상억 열사까지 포함하면 신정리에는 12명 이상의 독립열사 자택과 독립유공애국지사 이광희, 추득천 기념비가 있다. 이밖에도 이수욱이 1919년 3월 13일 전의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당일 장터에 가는 사람들에게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나눠 줬던 장소인 ‘갈정리 고개’(현재 신정1리)가 있다.
한편 ‘금남면 대평리시장’에서는 임헌규, 임병주, 이덕주, 임순철, 김봉식, 임헌빈이 1919년 3월 23일 대평리시장 장날을 이용해 시장 군중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을 벌였다. 1919년 4월 2일에도 이들이 주도해 대평리시장 장날 군중 300여 명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8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남면 양화리 아월산’은 현재 양화리 마을 뒤 전월산으로 추정되는데, 임덕화, 김봉식, 조의순, 임영복, 임덕문이 1919년 3월 31일 오후 9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임덕화를 선동해 마을 뒤편 아월산 꼭대기에서 주민 100여 명과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알려져 있다.
‘연기면의 이덕민의 집’에서는 김봉식, 조의순, 임영복, 임덕문이 모여 1919년 3월 31일 조선독립를 위한 시위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조치원읍의 중심이며 그 중심에 있는 재래시장인 ‘조치원시장’은 당시에는 헌병분견소와 우시장이 있었던 큰 장터였다. 청주의 강서면 주민들까지 이 시장을 이용했을 정도로 장의 규모가 컸다. 홍일섭이 1919년 3월 30일 정오경,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뛰어다녔고 장꾼들을 선동, 수백 명이 조치원장터를 누볐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