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지역 독립운동사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 김한종 의사, 이남규 의사를 빼놓을 수 없다.
예산 고덕의 한내장터에서 시작된 예산지역 3·1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의 파고다 공원과 거의 같은 3월 3일부터 6일까지 덕산, 삽교, 신양, 예산으로 번져 수백 명이 만세운동을 펼쳤다. 예산지역 독립만세운동은 한 달여를 두고 계속됐고 일경의 총격으로 사망자가 10명 부상자가 수십 명이 속출했으며, 30여 명이 검거 투옥됐다. 다시 상황을 보도한 매일신보는 모인 군중이 1000명을 넘나든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을 시발로 홍성, 청양, 천안, 정산, 당진, 대호지면 등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 7월에는 전국노동자공제조합 예산지부가 결성돼 300여 명이 가입했고, 오가면에서 소작쟁의가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일어날 정도로 의식이 깨어 있는 지역이다. 1923년 8월 오가면 소작쟁의는 예산공립보통학교에서 수백 명이 모여 항거하다가 면장을 구타하기도 했다. 이어 옥계리 삽교소작농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예산노동조합 결성은 주변에 영향을 미쳐 곧바로 홍성인력거조합이 생길 정도였다. 예산의 깨어 있는 의식을 발한 사건은 1928년 극단 만경좌 예산 공연장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이다. 만경좌는 친일문화를 보급하는 경성의 어용 극단으로 홍성, 서산을 거쳐 예산 공연을 하다가 지역민들의 습격으로 난장판이 됐으며,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사람이 수명에 이른다.
1920년 대흥보통학교 학생들이 총동원된 동맹휴교와 만세운동 사건은 가담자만 20명에 달했고, 강봉주가 주도했던 예산농림 독서회 사건만으로 옥고를 치룬 사람이 7명에 이른다.
강봉주는 ‘예산농업학교독서회사건’으로 알려진 예산공립농업학교 비밀결사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예산농업학교 학생이던 한정희는 정종호, 강봉주 등과 함께 독서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독서회를 기반으로 1932년 5월 사회주의 이념을 기초로 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목적으로 ‘좌익협의회’를 조직했다. 박정순과 한정희는 1932년 6월 학교 측이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권농일이라는 이유로 등교를 시키자 ‘학생동원의 부당성과 한인 학생들의 차별정책 철회’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좌익협의회 학생들이 퇴학처 분을 받아 조직이 와해 되자 1932년 9월 강봉주, 정종호, 박희남과 함께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을 조직,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은 조직의 명칭을 ‘토요회’로 변경하고 학생들을 규합하기 시작했으나 같은 해 11월 친일 연극 상연반대 투쟁을 벌이던 중 일제에 발각돼 체포됐으며,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다.
■ 예산 ‘충청남도 최초의 3·1독립만세운동’
예산에서의 3·1독립운동은 예산 읍내인 예산면에서 3월 3일 오후 5시경 예산읍에서 이발업을 하던 윤칠영(尹七榮)과 친구 4명이 예산읍의 권경화(權敬和) 집에서 모여 오후 8시 30분경부터 예산읍의 요리점 ‘명월관(明月館)’에서 “경성지역의 일본 유학생과 조선의 학생들이 단결해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등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이야기하다가 오후 11시 30분경 읍내 동쪽의 산 위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들은 모두 예산일본헌병분대에 체포됐다. 이 만세운동은 ‘충청남도 최초의 3·1독립만세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3월 9일과 12일에 예산읍 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외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월 중순경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3월 31일 예산읍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4월 3일에서 5일까지 3일 동안 예산군 각 면과 리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월 31일에는 60여 명의 군중이 예산헌병분대와 군청으로 이동하면서 독립만세를 불러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을 재점화한 것으로 전해지며, 4월 3일에는 예산 읍내 일대를 비롯해 신례원, 대술면, 신암면, 오가면 등에서 주민들이 산에 올라가 횃불을 오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이어 4월 4일에도 오후 10시경에 예산 읍내를 중심으로 예산면, 대술면, 오가면, 신암면, 고덕면의 각 마을과 신양면 일부 마을 등 예산군 내 18개소에서 산 위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4월 5일에는 예산시장에서 박대영(朴大永)·최문오(崔文吾)가 오후 3시경 20여 명의 군중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했다고 한다. 이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장을 활보해 참여 군중이 50여 명으로 늘어났고, 점차 군중이 늘어나면서 4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만세 군중은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예산헌병분대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시장을 순시하던 헌병들은 만세 군중들에게 즉시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일본 헌병의 명령에 불응하면서 계속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일본 헌병 상등병 소키 아키히데(曾木秋秀)는 수차 해산을 종용하다가 박대영을 체포하자, 최문오가 헌병에게 두 주먹을 휘두르며 체포를 저지했다. 박대영도 헌병의 곤봉 양 끝을 잡고 몸에 깎지를 끼고 바싹 조여 일본 현병을 꼼짝 못하게 했다. 결국 일본 헌병은 최문오의 주먹을 맞고 땅에 쓰러졌다. 이때 박대영도 헌병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일본 헌병의 체포를 저지한 이후 만세 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었고 이들은 시장 일대를 활보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오후 8시경 읍내 동쪽 시산, 서쪽 관영산, 남쪽 형제고개, 북쪽 금오산 등 4개소에서 횃불이 올라갔고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일본 헌병들은 각 방향으로 출동, 해산할 것을 요구했으나 군중들이 거절하자 곧바로 발포를 시작했다. 이때 마침 비가 내리면서 만세 군중들은 해산하기에 이른다.
■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들 독립만세운동
대흥에서는 3월 13일 동서리 대흥공립보통학교 전교생 300명이 오후 2시경 교정을 출발해 대흥장터로 나아가 시장 일대를 돌면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활발했던 독립만세운동을 제외하고는 예산지역에서의 3월 중 독립만세운동은 그다지 활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후 4월 3일에는 고덕 한내장터(대천시장)에서 2000~3000명의 시장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상궁리 이장인 장문환(張文煥)이 통장, 반장들과 협의해 시장 군중들과 합세,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헌병주재소 헌병오장 시무라(志村松太郞)와 헌병들이 출동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군중들은 불응해 독립만세를 외쳤고, 헌병들은 칼을 빼 해산을 강요했다. 이때 상궁리 통장인 인한수(印漢洙)는 시무라 헌병오장의 칼에 목이 찔리자 피를 흘리면서도 말을 탄 헌병의 다리를 잡아끌어 내린 후 혼절,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장문환은 이정래의 장남 이인성 등 14~15명의 청년들과 인한수의 시신을 헌병주재소 사무실로 운구해 안치하고 ‘어떠한 연고로 살해하느냐? 이 자를 소생시켜라!’고 소리치며 압박했다. 이에 헌병들이 이들을 밀쳐내고 인한수의 시신마저 사무실 밖으로 내쳤다. 이에 장문환은 헌병들을 향해 ‘우리 모두를 죽여라’고 소리치며 헌병오장을 죽이겠다며 덤벼들었다. 이에 군중들이 호응하자 사태의 위급함을 인지한 일경들은 발포를 자행, 해산시켰다. 이날의 독립운동으로 인한수가 순국하고 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7명이 체포됐다. 4일에는 고덕면 내 각 마을에서 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또 3일에는 신례원에서 마을 주민 15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고, 대술과 신암, 오가에서도 마을 주민들이 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덕산에서는 최승구(崔昇九) 등이 덕산시장에서 700여 명의 군중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광시에서는 4월 4일 하대장리 마을 주민 25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다음날 5일 새벽까지 40여 명이 면사무소를 공격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4일 대흥에서도 정인하(鄭寅夏)가 밤에 대율리 주민 수십 명과 마을 동쪽 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고, 또 신속리에서도 횃불만세운동을 펼쳤다. 신양에서는 4일 연리의 성원수(成元修)가 오후 8시경 마을 주민 수십 명과 뒷산 정상에 올라 횃불만세운동을 외쳤다.
대술에서는 4월 5일에 민제식(閔濟植)이 산정리 주민 30여 명과 마을 산에서 횃불독립만세를 불렀다. 삽교에서는 5일 밤, 박성식(朴性植)이 목리마을 주민 40여 명과 함께 뒷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박성식은 다음날인 6일 오후 7시경 최중삼의 집에서 김헌식(金憲植)에게 ‘어떤 연고로 흑립(黑笠)을 쓰고 있느냐?’며 흑립을 망가뜨리고 옷깃을 잡고서 주먹으로 얼굴을 타격하는 등으로 독립운동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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