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홍주, 충절의 고장 홍성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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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홍주, 충절의 고장 홍성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 취재·사진=한기원 편집국장, 홍주일보 주민·학생기자단
  • 승인 2025.12.11 11:06
  • 호수 922호 (2025년 12월 25일)
  •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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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충남의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21〉
홍성읍 대교공원의 한국유림 독립운동파리장서비.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옛 홍주 땅, 홍성지역의 독립운동은 1894년, 조선을 뒤흔든 민중항쟁인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 군사적·행정적 요충지였던 홍주성에서는 동학농민군과 의병이 힘을 합쳐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또 3·1독립만세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과 독립단체 후원운동 등의 다양한 방식의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이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홍주 땅은 예로부터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인물들을 배출한 충절의 고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고려말 최영 장군의 사당이 이곳에 있고, 사육신을 대표하는 인물인 성삼문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홍주의병은 김복한·이설을 중심으로 한 남당학파와 유생층인 안창식·안병찬 부자 등이 주축이 돼 실행했다. 여기에 임한주(林翰周), 이근주(李根周) 등 열사도 빼놓을 수 없다. 홍주의병은 전국 곳곳에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됐으며, 1910년대 독립운동과 3·1독립만세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근대에 들어서는 만주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독립운동을 펼친 백야 김좌진 장군과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사의 생가도 이곳 홍성에 있다.

이렇듯 천년 역사의 홍주 땅인 홍성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독립만세운동과 횃불만세운동, 파리장서운동 등의 항일독립운동이 다양하게 펼쳐지면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227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다.

■ 홍성지역 3·1독립운동, 홍성장터에서 시작
홍성지역의 3·1독립운동은 3월 7일 홍성 읍내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시작으로 3월 8일과 18일 광천에서, 3월 21일 광천과 은하에서, 10여 일 후인 4월 1일 금마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재점하되면서 4월 4일부터 9일까지 금마, 홍동, 홍북, 장곡, 고도(갈산), 구항, 은하 등 각 면에서 독립만세운동과 횃불독립만세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3월 7일 읍내의 홍성장터에서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을 시작으로 홍성의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으로 김좌진(金佐鎭)의 재종제인 김종진(金宗鎭)이 체포됐고, 홍북의 박군상(朴君相)이 왼쪽 고막이 터지는 부상을 당했다. 이어 4월 2일에는 홍성 읍내에서는 4월 1일 금마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조한원(趙漢元) 등이 읍내로 나와 홍성장터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광천에서는 3월 6일 박원식(朴源植)의 집에서 동생 박세화(朴世和)가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전하고 독립선언서를 보여 줘 이명종(李鳴鍾)과 박원식은 독립운동으로 실행하기로 협의했다. 3월 8일 독립선언서 문구를 2장의 종이에 쓴 유인물을 광천시장과 옹암리 2개소 부착했으나 이를 순사들이 떼어버림으로써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각 집에 배부하고, 광천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했다. 이후 최응모(崔應模), 오인섭(吳仁燮), 성배호(成培鎬) 등이 합세했다.

3월 16일 박원식과 오인섭은 박원식의 스승인 서승태(徐承台)를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문구를 간략하게 재작성해 줄 것을 부탁하는 도움을 요청해 승낙을 받았다. 3월 18일 서승태의 자택에서 박원식과 오인섭이 가제(加除)한 내용을 필기해 오인섭의 집에서 박원식, 이명종, 최응모, 성배호 등이 회합을 갖고 목판으로 500여 매를 인쇄해 이날 밤 이명종, 성배호, 오인섭 등이 옹암리 일대의 집에 배포했다. 이후 3월 21일 광천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은하에서는 3월 21일 대천리에서, 4월 9일 장곡리에서는 전명규(田明圭) 등 9명이 밤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려다가 사전에 일경에 발각돼 제지를 받았다.

금마에서는 4월 1일 민영갑(閔永甲)이 이재만(李載萬)과 가산리의 임시 연극 공연장인 이원교(李元交)의 집에 모이는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최중삼(崔仲三, 八龍), 김재홍(金在洪), 조재학(趙在學), 조한원(趙漢元) 등에게 알려 동의를 받았다. 연극 공연 중인 오후 8시경, 조한원(趙漢元)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관람 중이던 군중들 수십 명도 함께 따라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4월 4일에는 금마, 홍북, 홍동, 구항 등 4개면 24개소에서 주민들이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장곡에서는 4월 4일에는 윤형중(尹衡重), 윤익중(尹益重, 世重), 윤낙중(尹樂重, 己順) 3형제의 주도하에 윤의석(尹宜錫), 윤만수(尹萬洙), 이문재(李文載) 등의 적극적 참여로 화계리, 광성리, 신풍리 주민들이 합세해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윤낙중은 서울 경신학교 학생으로 3·1독립만세운동을 부르고, 윤익중은 독립선언서 100여 매를 가지고 함께 귀향했다. 이들은 윤의석과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4일에 윤만수, 최기석(崔寄石)과 함께 화계리, 광성리, 신풍리 주민들 100여 명과 매봉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운동을 외쳤다.

4월 7일에는 김동하(金東河·東化)의 계획적인 주도와 김동완(金東完), 김용숙(金容肅), 김용제(金用濟) 등의 화계리 주민들과 앞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오후 8시경에는 광성리, 가송리 주민들 300여 명과 함께 면사무소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 한상철(韓相喆)의 일제 만행 규탄 연설과 독립선언서 취지 설명을 들은 후 북을 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면사무소로 이동해 이문재 등이 앞장서서 돌과 곤봉 등으로 문기둥과 유리창 등을 파괴하고 각종 기물과 문서 등을 파손했다. 다음날인 8일에도 오후 11시 도산리에서 학생 60여 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구항에서는 4월 4일 면내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불렀고, 7일에는 황곡리에서 이길성(李吉性), 황문수(黃文秀)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 이길성은 집에서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 쓴 깃발을 만들고 황문수, 이유홍 등 마을주민들 8명과 함께 백월산에 올라 깃발을 세우고 횃불을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경이 출동해 총을 난사하면서 하산했다. 하지만 이길성(李吉性), 황문수(黃文秀), 이유홍(李有弘), 이희창(李熙昌), 이동규(李東圭) 등 5명은 월산의 다른 봉우리로 이동해 홍성 읍내를 바라보며 또다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홍동에서는 4월 4일 구룡리 주민들이, 일에는 신길리 주민들이, 8일에는 원천리 주민들이 중심이 돼 운월리, 효학리, 금평리, 문당리 등 면내 주민들이 각 마을의 산에 올라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고도(현 갈산)에서는 4월 8일 상촌리의 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처럼 홍성지역의 독립운동에서 7명이 순국했고, 4명이 부상했으며, 295명이 태형과 옥고를 겪었다. 광천에서는 5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옥고를 겪기도 했다. 

■ 영남·호서 유림들 파리장서로 독립청원운동
3·1독립만세운동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인사 33명의 민족대표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공포되자, 유학계에서도 독립을 선언하려는 움직임이 ‘파리장서운동’으로 나타났다. 영남지방에서 김창숙(金昌淑)의 활동으로 곽종석(郭鍾錫) 등 영남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을 추진했다. 호서지방에서도 홍성의 김복한(金福漢)이 고종의 시해소식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고 있음을 전해 듣고 과거 의병 동지들과 연명해 파리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을 요구할 계획을 세웠다. 

일제가 신의를 버리고 약속을 어긴 죄를 묻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음을 질타하며, 이에 만백성이 분통해 하는 사실을 밝히며, 강토를 회복해 독립과 조선왕조를 복구하려는 의지 등을 담은 장서를 작성했다. 먼저 청양의 임한주(林翰周)에게 동의를 구하고 찬성을 얻었다. 

이어 안병찬(安炳瓚), 김덕진(金德鎭), 홍성의 최중식(崔中植), 전양진(田穰鎭), 이길성(李吉性), 서산의 김상무(金商武), 김봉제(金鳳濟), 보령의 유호근(柳浩根), 유준근(柳濬根), 백관형(白觀亨), 김지정(金智貞), 신직선(申稷善), 김병식(金炳式), 논산의 이내수(李來修), 부여의 김학진(金學鎭) 등이 서명했다. 김복한(金福漢)의 제자 황일성(黃佾性), 이영규(李永珪), 전용학(田溶學) 등을 서울로 보내 임경호(林敬鎬)와 협의해 장서를 파리로 보내도록 했다. 임경호는 장서를 받고 출국을 준비하던 중에 3월 27일 유진태(兪鎭泰)의 소개로 이득년(李得秊)의 집에서 김창숙을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나 호서와 영남 유림의 계획과 목적이 동일함으로 통합을 시도했다. 논의에서 영남 유림들의 장서(영남본)를 채택하고 서명을 곽종석, 김복한 순서로 합의를 이뤘다. 

이 합의를 바탕으로 3월 29일 김창숙은 박돈서(朴敦緖)와 용산역을 출발, 만주 봉천에서 사전에 발송한 장서와 자금을 받아 4월 4일 정오경 상해에 도착했다. 파리장서는 상해에서 영문과 한문으로 인쇄, 작성돼 평화회의 의장, 파리위원부, 각국 대사 공사 영사관, 중국 정계 요인, 해외 각 항구와 각 시의 동포, 국내 각 지방 향교 등 기관으로 발송됐다.

김복한 주도로 전개된 유림들의 파리장서운동은 종교계의 대표를 민족 대표로 해 독립선언을 한 상황에서 지역 유림계를 대표하는 독립청원운동이었다. 비록 영남지방의 영남본이 채택, 추진됐지만 유림계가 추진한 파리장서운동의 한 축을 호서유림들의 호서본이 이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또한 면 단위의 독립만세운동이 대부분 면내 마을 주민들이 참여해 지역민들의 독립의식을 고조시켰고, 지역민의 단결력과 강한 공동체 의식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겠다.<끝>
 

홍동 3.1운동기념비각.
장곡 3.1운동 공훈비, 독립운동가 묘역.
장곡 3.1운동기념비.
장곡 3.1운동기념비.
장곡 3.1운동기념비.
홍성 독립선언서비.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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