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편수회' 중심 '식민사관' 만들어 민족혼 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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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편수회' 중심 '식민사관' 만들어 민족혼 말살
  • 신상구(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 승인 2013.08.2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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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8주년 기념 특집> 일제강점기 민족역사 왜곡


▲ 1948년 8월15일 전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행사가 열리고 있다. 정부 수립 후 조선총독부 건물은 중앙청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한국 사서 20만권 강탈·밀반출
고대사 왜곡 조선 병탄 악용
국내 학자들 민족사 정립 혼신
한국사 정비 역사교육 강화를

올해로 광복 86주년을 맞았다. 일제는 강점기 동안 우리 역사를 왜곡시키고 식민사관을 정착시킴으로써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대륙 침략의 정당화를 꾀하려 했다. 이런 일제의 만행에 맞서 우리 역사학자들도 민족사의 정립을 위해 혼신을 기울이기도 했다. 광복 68주년을 맞아 일제의 민족역사 왜곡과 우리 사학자들의 민족사학 정립 활동을 특별기고 형태로 게재한다. <편집자 주>

최근 학교가 대학 입시 위주로 교육을 하다 보니 국사 교육이 소홀히 취급되어 청소년들의 역사의식이 매우 낮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중국-일본 3국 사이에는 역사전쟁과 영토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해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 직속의 '조선사 편수회'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선도 사서의 내용과 최근 홍산문화 발굴 성과를 반영해 고조선 이전의 잃어버린 상고사를 새로 정립하고 중국과 일본과의 학술교류를 하는가 하면 외교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 역사 왜곡하면 이마니시 류와 두계 이병도가 금방 떠오를 정도로 일제강점기에 조선사 편수회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데에 앞장섰던 역적들이다. 백당 문정창이 지은 '군국 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 의하면 일제는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직후인 1911년 말까지 약 1년간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주도로 불온서적을 수색한다며 군경을 동원, 전국 각지에서 51종 20만권의 사서를 강탈하거나 소각했다. 그리고 재야 사학자였던 남당 박창화의 폭로에 의하면 일제는 1916년부터 3년 동안 조선사를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또 한 차례 사적을 거둬들여 희귀한 비장사서들을 일본으로 가져가 나라현 도다이사에 있는 왕실의 유물 창고인 정창원과 동경대 비밀서고 등 은밀한 장소에 숨겨놓았다. 당시 일제는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 관련 기록을 중점적으로 강탈하거나 약탈해 일본으로 밀반출했다고 한다.

이마니시 류는 1875년 일본 기후현 출생으로 도쿄 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이어 동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했다. 교토대학 교수를 거쳐 1926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는 16년 2개월 동안 조선사 편찬 업무에 관여해 오면서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 설화설을 만들어 역사 왜곡에 앞장섰다. 그는 1512년 경주 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유사 정덕본을 발굴해 영인하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개찬하여 경도제대 영인본 이름을 붙여 각계에 배포했다. 이 같은 개찬작업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단군신화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계에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지금까지도 일부 삼국유사 해설 서적들이 그대로 왜곡 기술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다시 말해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는 상고사 기록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바꿔, 고조선의 입국 사실을 부정하고 환인과 환웅을 신화적인 존재로 조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육당 최남선이 조선사 편수회 제6회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단군고기'는 본시 상당한 여러 고기록을 종합한 것을 극히 간명하게 축약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 자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더욱이 환국 즉 환나라와 환인 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예전부터 수상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다. 가령 한 자의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전문의 해석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경도대학 영인본의 경우 그 원서의 환인의 인(因) 자가 국(國)자 위에 칠을 하여 인자로 고쳐 놓은 것을 일견하여 바로 알 수 있다. 고전을 인용하는 경우에 가령 극히 명백한 오류라 하더라도 이것을 함부로 경망스럽게 개찬한다는 것이 심히 부당하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 이 사서에서도 이점에 대한 경건하고 예민한 배려가 있어야 될 줄 안다."



이마니시 류는 요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의 황해도와 평안도로 비정하고 고구려와 발해를 한국사에서 분리하여 금나라와 청나라로 이어지는 별도의 만주사로 보는 사관을 지녔는가 하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정하여 신라와 백제의 역사를 300-400년 축소하고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근거하여 고대 한반도 남부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근대 조선 병탄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병도는 1896년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급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곧 귀국해 약 7년간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지리·역사 및 영어를 가르쳤다. 이 무렵 문학동인지 '폐허'의 창간에도 동참하였다. 뒤이어 조선사편수회 촉탁,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을사오적 중의 한 사람인 이완용의 조카로 식민사학의 원조인 쓰다 소키치로부터 조작된 국사를 배우고 일제의 조선사 왜곡의 첨병인 이마니시 류의 수서관보가 되어 신석호와 함께 '조선사 35권 편찬'이라는 거대한 역사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1934년에 진단학회를 창립했다. 그는 유학사, 지리도참, 고대사 연구에 치중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교수, 문교부장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학술원 회장까지 지냈다. 그리하여 그는 일제의 '조선사' 편집에 참여하여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핵심으로 하는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직접 기여하였고 일제가 유포시킨 식민사관을 해방 후까지 이어주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한국 사학계에는 직, 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다. 그를 따르는 일련의 학자들을 두계학파라고 칭하는데, 그들은 실증주의 사관을 도입하여 일제의 역사 왜곡을 철저하게 따라가고 있고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한국 사학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병도는 죽기 직전 최태영 박사의 간곡한 권유를 받고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게재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시선은 의외로 싸늘했다. 어떤 이는 '노망 드셨네'하며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이라 생각하니 그저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다행히도 일제강점기에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대종교를 신봉하던 김교헌,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안재홍, 유근, 이상룡, 장도빈 등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식민사학에 대항해 목숨을 담보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민족사학을 정립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민족혼이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다. 항일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홍암 나철에 의해 창시된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민족종교로 삼일신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경기도 수원 출생으로 1885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무원 김교헌 선생은 1910년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군경을 동원, 전국에서 사서를 수거해 강탈하고 소각하자 이에 맞서 현채·박은식·장지연 등과 함께 조선광문회 활동을 이끌면서 고전과 사서의 수집과 간행 및 보급에 적극 나섰다. 그리고 '신단민사', '신단실기', '배달족역사' 등을 저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대종교의 역사적 원형인 신교사관을 정립했다. 김교헌의 신교사관은 최남선, 장지연, 유근,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 민족사학과 국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항일독립운동가인 석농 유근은 '신찬초등역사',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백암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위당 정인보는 '조선사연구'를 저술하여 민족사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광복 68주년을 맞이한 지금도 친일사학의 뿌리는 깊이 박혀 있어 우리의 역사교과서가 왜곡 기술되고 있고 역사교육에 문제점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육부는 국사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최근의 유적과 유물 발굴과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식민사관에 의해 누더기가 된 한국사의 틀을 전면적으로 수정보완하고 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일제의 식민지 사관과 반도사관에 포로가 되어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축소함으로써 애국 시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강단사학자들을 비롯해 동북아역사재단과 국사편찬위원회도 이제는 일제의 식민지 사학을 청산하고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움으로써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한-중-일 간의 역사전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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