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아서] ① 홍주에서 태어난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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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아서] ① 홍주에서 태어난 만해
  • 김혜동 기자
  • 승인 2014.04.0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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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결성 출생 9세 홍주 남문동으로 이주
18세 때 전정숙과 결혼… 25세 전후 홀연 출가
남문동 거주지 오관리 추정 … 복원·정비 필요

 


만해 한용운은 백야 김좌진, 고암 이응노, 명무 한성준, 매죽헌 성삼문, 최영 장군, 남당 한원진, 지산 김복한 등 홍성이 배출한 수많은 위인 중 한 명이다. 만해는 독립운동가, 민족시인, 종교인으로서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의 선봉에 서며 조국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인물이다. 올해는 만해가 영면에 든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 특집보도에서는 만해 한용운 선사의 탄생에서부터 성장 과정, 작품 활동 상황, 독립운동과 서거에 이르기까지 생애 모든 발자취를 꼼꼼히 되짚어 만해 한용운 선사의 사상과 시세계, 독립 운동가로서의 의의 등을 다시금 새겨본다.

만해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에서 한응준(韓應俊)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萬海, 卍海)이다.
현재 만해의 행적에 대한 각종 연구자료와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가 25세가 되던 1904년 만해의 맏아들인 한보국이 태어났고 그후로 25세를 전후해 홍성을 떠나 강원도 건봉사로 건너가 그곳에서 최초의 선 수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만해는 현재 결성 생가지에서 태어나 유아기를 보냈고 그가 9세 되던 해 부친을 따라 홍주 남문동으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친 한응준이 이사를 결심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만해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이러한 배경은 만해 회고록인 ‘나는 왜 승이 되었나’(삼천리 6호 수록)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회고록에서 만해는 “나의 고향은 충남 홍주였다. 지금은 세대가 변하여 고을 이름조차 홍성으로 변하였으나 그때 나는 어린 소년의 몸으로 선친에게서 나의 일생운명을 결정할 만한 중요한 교훈을 받았으니 그는 국가 사회를 위하여 일신을 바치는 옛날 의인들의 행적이었다.(중략) 서책을 보시다가도 무슨 감회가 계신지 조석으로 나를 불러다 세우고 옛 사람의 전기를 가르쳐 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역사상에 빛나는 그 분들의 기개와 사상을 숭배하는 마음이 생겨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나하는 것을 늘 생각하여 왔다”며 아버지로부터 홍주 위인들에 대해 배웠던 기억을 회고했다.
선친 한응준에게서 만해는 당시 일반교육을 통해 배울 수 없었던 홍주의 위인들에 대해 배웠으며 이러한 가르침이 향후 만해가 독립운동을 펼쳤던 정신적 바탕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부친 한응준이 결성에서 홍주 남문동으로 이사를 결심한 것도 만해가 보다 개방적인 곳에서 근대식 문물을 접하길 원했던 시도였을 것이다.
일설에는 한응준이 취업을 전제로 이주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한건택 한서대 교수에 따르면 한응준의 본가에 상당한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취업을 위해 이주했다는 가설은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홍주 남문동으로 이주해 온 만해는 18세 되던 해 부모의 권유로 학계리에 사는 전정숙과 혼인을 한다. 이후 만해는 1904년 부인 전정숙이 첫째 아들 보국을 회임 중일 때 홀연히 출가한다.
당시 만해가 머물던 홍주 남문동 집에 대해선 정확한 자료가 전해지고 있지 않아 만해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학계 전문가들은 만해의 맏아들인 한보국이 태어난 집이 만해가 살았던 남문동 본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건택 교수가 ‘홍성문화’(제32권1호)에 수록한 ‘홍성에서의 만해 한용운’에 따르면 한보국이 태어난 집은 지금은 홍성읍사무소·보건소 신축으로 허물어진 담배인삼공사 내포지점 인근이다.
한 때 그 집에서 거주했던 전병준 씨는 “안방과 옆방의 면적이 각 2칸 이상이고 대청은 3칸, 사랑채는 2.5칸, 부엌이 3칸 정도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집의 구조나 대지의 위치로 보아 아래채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보국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은 대청 후원에는 연못이 있었고 정원 등이 잘 단장된 집이었는 증언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종합해 보면 만해는 결성 생가지에서 8년을, 홍주 남문동 집에서 약 10여년을 살았다. 홍성군에서는 만해 생가지를 정비하고 그 옆에 만해문학체험관을 지어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만해가 그보다 많은 삶을 영위한 홍주 남문동 집에 대한 연구와 고증은 현재까지 미흡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와 관련 한건택 교수는 “만해의 아들인 한보국이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운영했던 철물점의 위치 역시 오관리 206번지 일원(현 금강원조경 화원)이라는 점을 호적등본 등을 통해 확인했다”며 “향후 홍주성 인근 주차장 조성과 연계해 집터 등을 알릴 수 있는 안내판과 한용운 시비 등을 조성한다면 홍주성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만해 한용운의 고향으로서 홍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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