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의 기원와 이존창, 정순왕후의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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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의 기원와 이존창, 정순왕후의 생가 터
  • 조현옥 전문기자
  • 승인 2014.08.0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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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5>

홍주천주교회사 1 -생일과 생가

 


 홍주천주교회사를 빼고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없다. 홍주목(洪州牧)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만이 아니다.  천주교가 성립되고 양반 중심의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파견된 한 사람 때문이라고 감히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그렇다면 한 사람만 더 추가하자.  조선의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시대적 요청과 운명에 맞춰 제대로 살다간 여인이다.  홍주 천주교회사를 쓰면서 두 명의 인물로 시작하는 이유는 천주교가 홍주 지역에 전래되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배경과 급속도로 신자들이 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수를 배출하고 한국 교회사의 흔적을 가장 많이 남기게 된 사연을 설명하는데 가장 유력한 배후로 이존창과 정순왕후를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을 알아보기 전에 우선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된 경위를 살피자.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을 천주교 성립 200주년으로 선포한 바 있다.  조선 정조시대의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1784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이다.  천주교 기원 문제는 이승훈세례(1784년)를 기원으로 보자는 최석우 이론과 천진암 강학회(1779)로 봐야한다는 변기영 신부 이론으로 크게 나뉠 수 있다.  물론 예수회에서 계속해서 제기하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군사들을 위한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의 사목활동과 관련한 이론도 있다.  어쨌건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을 기원으로 삼고 있으며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권철신, 이가환, 정약종 등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갖으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것에 그 의의를 두고 있다. 
 

 


1799년 천진암 강학회에서는 그동안 계속해서 해오던 강학회 중에서 특별히 천주교 교리에 대해 양반 지식인 집단이 공부하고 받아들이면서 수련의 형태로 재를 지키기는 하였으나 모두가 예비신자로서, 세례를 받은 자가 있어야만 교회 공동체가 성립된다는 교회법을 근거로들어 1784년 기원설을 따르는 모양새다.  그러나 여전히 1779년 이론과 그 보다 더 전에 있었던 소현세자 이론 등 갖가지 설이 많이 남아 있다.  천주교가 성리학의 보유론(補儒論)으로서 학문의 형태로 접했던 시기가 존재한다.  그들 대부분이 성호 이익의 제자들로서 위에서 거론했던 권철신, 권일신 형제와 정약용 형제들, 희대의 천재라 불리던 이가환과 이승훈, 이 벽 등이다. 조선의 정학(正學)이던 성리학에서 풀어내지 못한 문제들을 서학(西學)으로 해결하려던 초기의 입장에서 나아가 재를 지키며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종교로써의 천주교가 받아들여지게 되는 모습이다. 이들은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선교사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을 찾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원래 사도로부터 이어 온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학문적 연구로 시작된 신앙이 벽에 부딪히자 북경에 사람을 보내 알아본다. 

북경 교회 측은 잘 모르고 행한 가성직제도를 그만둘 것과 “조상제사”를 금하는 내용을 전하는데 이것이 양반 중심의 한국 천주교가 뿌리 채 흔들리게 만든 근본 원인이 되고 천주교는 잠시 없어지는 듯 주춤한다.  그러나 권철신의 제자 이존창을 홍주 여사울에 파견하면서 조선의 천주교는 대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는 파견된 후 홍주 전역에 천주교를 퍼트리고 신자들을 만들어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고 얼마 안가 홍주는 조선 천주교의 요체가 된다.  이것이 홍주 천주교회 역사상 중요한 첫 번째 인물로 이존창이 뽑힌 이유다.두 번째의 배후 인물, 정순왕후!  그녀가 천주교 확산의 배후 인물이라니?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는 1745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홍주 지방 (현. 서산 음암면)에서 살았던 인물로 1759년 6월 9일 15세의 나이로 당시 66세였던 영조의 새 왕비로 간택되어 같은 해 6월 22일 혼례를 치른다.  아들 사도세자보다 10살이나 아래였으나 정조가 등극한 후로 뛰어난 정치력을 보이면서 정조 사후 순조의 섭정을 하기 까지 여군주의 면모를 자랑했다. 

 

 

 

 

 


남편 영조의 뜻을 받들면서도 정조의 가장 불편한 인물들의 제거를 도와주는 등 다각도의 정치 활동을 폈던 정순 왕후는 요즘 들어 인기가 많은 정조를 독살 시킨 배후로 지목되기도 한다.  젊은 나이에 종기가 악화되어 죽게 된 정조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과 가능성에서 나온 결과다. 정조의 죽음 후에 생겨난 권력, 대왕대비!  나라의 최고 어른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권력을 손에 쥐고 행한 일은 정조가 만들어 놓은‘장용영’ 철폐와 사학(천주학)죄인 없애기였다.  물론 이유는 정조 당시 오빠 김구주를 귀양 보낸 일에 대한 암묵적인 보복이었다.  이로써 자신의 비호세력과 맞서는 남인 계열의 인물들을 제거하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자아내게 된다.  그녀는 정조가 묵인하고 용서해 주었던 천주교 신자들인 이가환과 정약용 형제들을 다시 끌어내어 귀양을 보내거나 사형에 처했다. 이 때문에 이존창도 사형을 받게 된다.  이름 하여 신유박해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자 그해 겨울부터 시작된 추출작업은 1801년 피의 해를 만들어 낸다.  홍주진영의 영장이던 노상추는 그 해의 일기에 “죽여도 없어지지 않는 사학쟁이”들에 대해 기록하면서 홍주 지역에 퍼진 천주교에 대해 증언했다.  유명한 ‘오가작통법’도 정순왕후의 작품이다. 

다섯 집씩 묶어 사학쟁이를 관리하고 신고할 수 있는 유용한 법이었기 때문이다.  대박해가 있으면 없어질 것으로 판단했던 천주교는 신자들이 전국으로 피신을 가는 바람에 조선 전역에 천주교를 퍼트리는 2차 결과를 가져왔다.  없앤 것이 아니라 더욱 키운 셈이다.  홍주 천주교회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두 인물 이존창과 정순왕후를 만나러 가보자. 충남 서산시 음암면 한다리길 39, 356-844(유계리 464번지).  인터넷에 ‘정순왕후 생가’라고 치면 나타난다. 충남기념물 제 68호이다. 꽃다운 나이 15세에 왕비에 간택되어서였을까? ‘정순 왕후 생가’라고 써진 작은 돌비석 옆으로 연분홍 목백일홍이 여인의 품위에 맞는듯하다. 그러나 그녀의 꽃은‘목화꽃’이다.  그녀는 간택될 당시 영조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라고 답하여 영조의 마음을 뺏어갔다고 한다.

그것을 생각하여 관리하는 주인이 심었는지 아직 피지 않은 목화꽃이 반긴다.  경주 김씨들의 세거지로서 평탄한 마을 주변에 두 곳의 고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생가 마을은 기운과 터가 좋은지 독립유공자를 후손으로 두고 있다.  아쉬운 것은 ‘생가(生家)’라는 단어의 쓰임에 대한 작은 궁금증 증폭이었다.  이것은 예산시 신암면 신종1리 136-10번지에 위치한 이존창 생가에서도 나타났다. ‘생가’라 함은 ‘태어난 곳’이라는 사전적 해석이 있으나 두 인물 다 지금의 생가 터가 출생지가 아니다.  정순왕후는 경기도 여주가 탄생지고 이존창은 천안이 고향이다.  아마도 15세 까지 살았던 곳이라 해서 생가라고 사용하는 듯하고, 이존창의 생가 터인‘여사울 성지’도 그가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한 곳이라 하여 이렇게 쓰고 있는 모양이다.  홍주지역 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두 인물이 끼친 지대한 영향은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 속에서 자세히 들어날 것이다.

  이존창이 이룬 여사울 공동체는 그 후 공소를 지어 그 맥을 이어왔고 화려한 건축양식을 표방하지 않고 순박한 모습으로 건재하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 하늘색 페인트 건물에 십자가와 ‘천주교회’라는 문구만 역력하지만 이곳이 홍주 지역을 천주교의 거점으로 만들어 놓은 본산지임을 말없이 증거하고 있다. 서산시 음암면은 오는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할 해미성지와 가까이 위치해 있는데,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주인으로써 정순왕후를 만나고 차를 돌려 예산의 이존창 생가 터를 향하다 보면 시대의 아픔이 한껏 무겁게 다가온다.  그 중간에 현재의 홍성이 있으며 홍성은 홍주의 중심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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