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완숙·아들 홍필주(필립보) 124명 복자품 대열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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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완숙·아들 홍필주(필립보) 124명 복자품 대열에 오르다
  • 조현옥 전문기자
  • 승인 2014.08.1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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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6>

홍주천주교회사2

 


덕산의 황모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 출신의 순교자 이보현(프란치스코)은 연산에서 체포되어 “네 선생은 누구이고, 공범자는 누구누구이며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심문을 받는다. “제 선생과 동료들은 제 고향에 있습니다. 책으로 말씀드리자면, 몇 권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모두 중요한 문제를 다룬 책이기에 사또께 바칠 수는 없습니다.” 이보현! 사형 앞에서도 내놓을 수 없는 ‘중요한 책’을 가지고 있었다. 1800년의 일이다.

1866년 서산 강당리로 급파된 포졸 한 팀으로 이루어진 임시 심문소 주막에서 일어난 김선양(요셉) 고문사건. 포졸은 김선양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매질을 한다. 앞에는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살려 달라 애원하고, 아버지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그것만은 안 된다!” 소리를 지르는데 과연 ‘그 것’은 무엇인가? 책이다. 이보현의 말을 빌리자면 “그 책들은 만물의 대군(大君)이신 하느님께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었던 보물이었다.

 

 

 

 

 


책에 대해 써보자. 1563년에 태어나 1628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수광은 51세 때 ‘지봉유설’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1600년대 초 새로이 접한 서양 책 ‘천주실의’를 소개하는데, 이는 예수회 소속 신부인 마테오 리치(1552~1610)가 중국 선교를 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고자 집필한 교리책으로 중국 선비가 천주교의 중요한 교리내용을 질문하면 서양의 선비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당시 중국인들의 사상인 유교를 깊이 연구하여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였던 책으로 같은 유교문화권인 조선에도 슬그머니 들어와 학문의 한 부분으로 읽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수광뿐이었겠는가? 그의 손아래 동서인 허균은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 신분으로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때 서양서적을 구입해 돌아 왔다고 한다.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 “그들의 가르침(천주교)이 이미 동남쪽 여러 오랑캐들에게 행해져 자못 높아져 믿고 있었다. 우리나라만 믿지 못했는데, 허균이 중국에 가서 그들의 지도와 ‘게십이장(기도서)’을 얻어 가지고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다.

박지원 또한 ‘연암집’에서 “게십이장이 있는데, 허균이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그 것을 얻어 가지고 왔다. 그러므로 사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아마도 허균으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현재 사학을 배우는 무리들은 허균의 남은 무리들이다. 그 언론과 습관이 한 꿰미에 꿴 듯이 전해 내려왔으니, 그들이 그릇되고 간사한 학설을 유달리 좋아하고 지나치게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허균이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했느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허균이 최초의 천주교신자 가능성을 확고히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이란 점에서 중요함을 단박에 느낄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라면 예산 여사울의 홍유한을 거론해야 맞다. 그는 1770년경 여촌(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여사울)의 풍산 홍씨 집성촌에 살면서 ‘칠극’이라는 수양서를 읽어가며 은수자의 삶을 산 인물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자신의 소유였던 밭을 팔았는데 갑자기 일어난 산사태로 밭이 소실되자 그 길로 돈을 가지고 밭 임자에게 찾아갔다는 것이다. 한사코 말리는 농부에게 자신이 판 밭이 그리됨을 보상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 뿐 아니라 정확한 축일표를 갖고 있지 못하므로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을 축일로 지냈다는 이야기 등은 몸에 밴 천주교 신자의 모범이기도 하다.

비록 공동체를 이루어 그러한 삶을 실천했다는 이야기는 기록에 없으나 30여년의 수덕 생활은 그가 이주해간 경북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 마을에서도 전해져 내려온다. 그가 어떤 인연으로 경북에까지 이주해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이동으로 인해 경북으로 천주교를 소개하는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정조의 신임을 듬뿍 받던 유망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이벽, 조상제사문제로 나라를 뒤흔든 진산사건의 주인 윤지충, 이들 모두 문제의 ‘중요한 책’을 접하고 난 후의 인생이 달라졌다. 책의 무엇이 그토록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게 되었을까?

그들의 책, 특히 ‘천주실의’와 ‘칠극’을 보자. 성호 이익의 수제자 안정복(1712~1791)은 함께 공부해 오던 학자들 간에 천주교 서적과 그에 따른 그들의 삶을 걱정하다 ‘천학문답’을 지어 천주학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 속에 빠진 친구들과 후배들이 어서 바른 정학의 세계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아, 이것이 어떤 말인가? 상제가 아담을 창조해 인류의 조상으로 삼았다면 그 신성함을 알 수 있다. 어찌 상제가 마귀의 꾀임을 들어 마귀로 하여금 그의 마음이 진실된가 거짓된가를 시험할 것인가? 만약 아담이 참람되고 망령된 마음이 설사 있었다면 상제가 마땅히 다스려 그로 하여금 고치도록 함이 어진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진 스승이 제자에게 하는 것처럼 옳을 것이다….’

그는 온 인류가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죄악에 빠졌다는 구약성서의 처음 가르침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자손만대까지 죗값을 치르도록 한다는 것은 결코 하늘(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의 ‘천주실의’에 대한 비판이 단적으로는 천주학을 금하고 나쁜 학문임을 증거 하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 그는 유학자로서 천주학에 대한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모든 면에서 웬만한 교회 신학자만큼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후배인 권철신과 많은 후학들이 아까웠던 것이다.

그의 후배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용할대로 수용한 조선의 천주학은 학문을 넘어 신앙으로 흘러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조선 말기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이 세상을 바꿨다. 책이 세상이 바뀌도록 이끈 것이다. 목숨을 내놓고 지키고 싶은 신앙은 ‘중요한 책’으로 대변되고 한국 천주교회의 태동기에 ‘학문과 신앙의 매개체’ 역할을 함으로써 세계 역사상 유래 없는 선교사 없는 그리스도 전래를 이뤄냈던 것이다. 예산의 홍유한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집안으로 조선의 대사화 때마다 가문이 피바다를 이뤘던 불운했던 집안 태생이다.

정조가 신임했던 짧은 권력, 홍국영과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 천주교 신자 홍낙민(루까), 조선 최초의 여회장 강완숙(골룸바), 홍필주 등 유명한 내력을 가지고 있지만 유독히 홍유한만은 세상적 삶을 떠나 수도원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수덕적 삶을 실천하고 정치에서 떠나 은거를 했다. 그를 움직인 책은 ‘칠극’으로 인간이 극복해야 할 7가지 죄 (교만, 질투, 인색, 분노, 탐욕, 음란, 게으름)와 추구해야 할 7가지 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예수회 신부 빤또하는 중국 선교를 하면서 그리스도 신자가 갖추어야할 덕목을 자세히 실어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교육하였다. 예수회 신부 2명이 쓴 2권의 책이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던 조선인들에게 변혁의 책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산 신암면 신종리, 홍주지역에 천주교 신앙을 전파한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생가지는 이미 홍유한의 수덕의 터전으로 굳건하였고, 인근 뱃길을 이용한 한양의 권일신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홍유한은 이존창의 됨됨이를 보고 권일신에게 소개를 하여 한양, 양반의 천주교가 홍주지역으로 번져 내려오게 해준 안내자였다. 홍유한, 그는 조용한 은수자의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며 한양과 홍주, 홍주와 경북을 뚫어 변화의 계기를 일군 그러나 조명 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 일가와 친척이 보여준 홍주지역에서의 순교적 삶은 이번 시복식에서 영광스럽게 드러난다. 덕산 홍씨 가문에 시집을 간 강완숙이 천주교를 받아들이자 남편은 그녀를 내쫒기에 이른다. 전처 소생의 아들 홍필주(필립보)와 시어머니는 그녀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 주문모 신부를 도와 전교에 힘쓴다.

강완숙은 기지와 신앙의 굳건함으로 잡힐 때까지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대지 않고 순교의 칼을 받아 들였으며, 그의 아들 또한 어머니의 모범을 따랐다. 두 인물은 오는 15일, 124명의 복자품 대열에 오른다. 예산 홍씨 집성촌에는 아직도 그들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어 함께 기뻐하고 있다. 책을 통해 받아들인 천주교가 공식적인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일인 1784년이 되기도 전에 홍주지역에 보이지 않는 신자들을 형성하며 기반을 닦았음은 앞으로 더욱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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