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일광(시몬) 신분질서를 변혁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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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일광(시몬) 신분질서를 변혁시키다
  • 조현옥 전문기자
  • 승인 2014.10.0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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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10>

홍주천주교회사6

1801년 신유대박해는 조선을 피로 물들이면서 조선 천주교인들에게는 전국적으로 신자 만들기와 사제 영입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양반가 신자들이 처형되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아래로의 전교가 이루어졌다.

사실, 시대적 상황으로 조선은 신분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는데 유교의 기치아래 베풀어진 사대부들의 횡포가 나날이 증가했으며 지식인들조차도 정학인 성리학으로는 그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답답함에 봉착했다. 정조는 정학을 바로 세우면 일이 풀릴 것이라는 하교를 내린바 있었으나 양반의 강렬함 아래에서 숨도 못 쉬고 사는 평민들과 천민들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이 때 천주교의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자녀’라는 평등사상이 조선을 뒤흔들었다.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는데 이 사실은 홍주 진영장의 1801년 ‘노상추 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노상추 홍주영장은 이 지역의 사학하는 이들을 “아무리 죽여도 없어지지 않으니” 큰 걱정이라면서 평민 아낙네들과 천민들의 신자 수가 박해에도 오히려 증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따라서 얼른 정학을 바로 세워 조광조의 세상이 다시 도래했으면 하는 심정을 토로했다. 그것은 ‘불길’ 이었다. 억압받던 세력들이 무심코 전해들은 평등사상은 불길을 이루고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게다가 신유년의 박해는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한양에서 있었던 박해 여파로 정약용 집안에서 일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홍주 출신 황일광(시몬)이 붙잡혀 고향으로 압송되면서 홍주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더욱 입교하게 되었다. 또한 죽음을 불사하면서 신앙을 지키려는 그의 모습에서 새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황일광(시몬)은 조선의 신분체계에서 가장 비천한 계급인 ‘백정’ 출신이다.

자기가 살고 있던 동네에서도 한참은 떨어진 외딴 곳에서 기거해야했다. 소와 돼지를 잡는 직업이 대대로 백정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바꿀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멍에였다. 그러던 중 1792년 부여 홍산 땅으로 이주한 이존창의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웠으며 더 자유롭게 신앙하기 위하여 동생 황차돌과 함께 경상도로 이주하였다.

다시 경기도 정약종 집안으로 갔다가 그가 한양으로 옮기자 따라가 허드렛일을 보아 주면서 신앙이 깊어졌다. 마침 신유년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정약종 일가가 잡힐 무렵 포졸에게 붙잡혔으며 수많은 매질과 고문을 받았다. 당시의 법인 ‘해읍정법’에 따라 12월 26일(음)에 사형 판결을 받고 들것에 실려서 홍주로 보내졌다.

황일광은 홍주에 도착하는 날로 참수되었는데, 현재 홍주성 북쪽 문을 나가 북문교 근처의 모래가 많이 쌓이는 합수머리가 참수터이다. 황일광은 백정의 몸으로 홍주 목사가 내린 마지막 밥상을 받아 들고는 기쁘고 환희에 찬 얼굴로 ‘두개의 천국’을 증언했는데, 하나는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이 천국이요 둘째는 이제 곧 가게 될 하느님의 나라가 곧 천국이라고 설파했다.

앞으로 갈 곳이 천국이라는 것은 이해했으나 첫 번째 천국, 즉 현재의 삶이 어떻게 천국이 되겠는가? 그는 실제로 천국의 삶을 살았다. 조선의 천민 중의 천민으로서 천대 받으며 살았던 백정이 당대 최고의 양반가 정약용 가문의 양반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받아 모시고 한데 모여 기도를 했으며, 그들로부터 ‘형제님’ 이라는 불림을 받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지상의 천국’임이 확실했다. 사실이 그랬다. 이런 세상이 열렸으니 이미 천국은 현세의 삶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이 감격스러웠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을 할 수 있었다. 그의 공표가 홍주 지역에 퍼져 나갔다. ‘형제님’과 ‘자매님’이 가슴 속에 들어 온 것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강렬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것을 지키고 싶어진 것이다.

따라서 신유박해의 결과 홍주 지역의 신자들은 더욱 대범해졌다. 목숨을 내놓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아무것도 갖고 떠날 수 없었다. 단지 마음에 들어온 조선의 신분질서의 변혁 가능성, 누구라도 구원 받을 수 있고 누구라도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언뜻 보기에는 현실 도피로 비춰지겠지만 목숨과 맞바꾼 새로운 삶의 가치였다.

황일광(시몬)의 영성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지금까지 대단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시 124명의 복자품에 오른 황일광(시몬)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염수정 추기경이 추기경 서임 후 첫 번째로 받은 인터뷰에서 “황일광(시몬)과 같은 마음으로” 서임 소감을 밝힌 것처럼 이태리 출신의 가난한 수도자 성 프란치스코 못지 않은 가난한 이들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정말로 바뀔 것 같지 않던 조선의 신분체계가 황일광과 천주교 신자들의 모범에 따라 소리 없이 사라질 수 있었다는 약전은 한국천주교회 역사의 롤 모델이다. 각 성지마다 순교자와 성인이 있지만 황일광만큼 성지 사제들에게 사랑받은 이도 드물다. 내세의 삶을 현세에서도 기쁘게 살 수 있었던 그의 영성이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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