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왕건 긍준에 ‘홍(洪)’씨 성 하사, 지명 ‘홍주(洪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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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건 긍준에 ‘홍(洪)’씨 성 하사, 지명 ‘홍주(洪州)’?
  • <특별취재팀>
  • 승인 2015.07.2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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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④

 

홍주아문.

홍주, 평택이남·경부선 서부·금강이북 22개 군현 관할
운주, 태조 이전 궁예의 통치기 중요성에 등장한 지명
현종 3년(1012년) ‘운주(運州)’를 ‘홍주(洪州)’로 고쳤다
긍준, 태조로부터 ‘홍규(洪規)’하사 받고 ‘홍주(洪州)’로

고려 태조가 후백제에게서 지금의 홍성지역을 빼앗은 후 천안과 함께 후백제 공격의 전진기지로 삼았다가 고려가 재통일한 후에는 국방 못지않게 세수미를 나르는 조운도 중요시했다. 바닷가인 천북과 오천 사이 천혜의 해협에 충청수영을 세운 것을 계기로 충청 서북단인 태안반도에서부터 전라도 군산과 접하는 금강 하구인 장항지역에 이르는 충청 서해안을 방어하는 차령산맥 서부의 최대도시였다. 후삼국시대 이후 운주(運州)는 지명의 의미대로 고려의 운세를 바꾼 지역이다. 운주는 태조 원년(918년) 고려가 건국되면서 웅주(지금의 공주) 및 10개의 주·현과 함께 고려에 반기를 들면서 후백제에 넘어간 이후, 태조 17년(934년) 웅진 이북 30여 성과 고려 태조에 항복할 때까지 후백제와 고려의 접전지역으로 후삼국의 운명을 좌우했던 역할과 기능을 했던 곳이다. 운주의 등장은 백제 이래 가장 큰 세력의 거점이었던 결기군을 넘어 지금의 차령산맥 서부의 최대 도시로 발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려사(태조 편).
운주는 ‘고려사’에서 보면 태조 원년 8월(918년) “웅주운주 등 10여 개 주현이 반란을 일으켜 후백제에 붙자 전시 중 김행도를 동남도 초토사·지아주제군사로 임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태조 10년 3월(927년)에는 “왕이 운주로 쳐들어가 성 아래에서 운주성주 긍준을 쳐부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태조 17년 9월(934년)에는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를 치면서 견훤과 싸워 대패시키자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대로라면 ‘운주(運州)’라는 지명은 태조 원년(918년)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운주’의 성립 시점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다른 지역에서 나타난 새로운 ‘주(州)’의 성립과정의 기록과 고증자료를 찾아보면 증명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운 주의 설치는 궁예 및 왕건의 집권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볼 때, 운주성주 긍준이 왕건에게 항복한 대가로 ‘운주(運州)’를 하사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점이다. 따라서 ‘태조 10년 3월(927년)에 왕이 운주로 쳐들어가 성 아래에서 운주성주 긍준을 쳐부순 시점이라고 한다면 ’운주는 927년(태조 10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는 ‘웅주·웅진은 태조 23년(940년)에 공주로 지명이 개편되기 이전의 지명이란 점에서 당시의 기록이 ’고려사‘의 편찬 시점을 소급하여 적용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운주(運州)’는 태조 이전 궁예의 통치기에 후고구려의 남방기지로 중요성을 인정받으며 등장한 지명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운주(運州)’의 지명유래는 후백제시대 운주성주 긍준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던 이전의 10세기 초의 어느 시점에 등장한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더하고 있다.

고려와 후백제가 자주 결전을 벌였던 홍주의 모습.

이후 ‘운주’는 성종 2년(983년) 전국에 12목이 설치되었을 때 공주목에 속했다가 성종 14년(995년) 전국이 4도호부 10도의 편제가 될 때 하남도에 속하며, 도단련사가 파견되었다. 현종 3년(1012년) 도단련사를 폐지하고 지주사를 두었으며, 그 뒤 ‘운주(運州)’를 ‘홍주(洪州)’로 개칭하였다. 홍주는 5도 양계 가운데 양광도에 배속되면서 주변의 3군 11현을 관할하였다. 이후 현종 9년(1018년)에 정비된 지방제도는 4도호 8목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56개의 주(州)군(郡), 29개의 진(鎭), 20개의 현(縣)으로 편성되었다. 이때에 비로소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3군 11현을 관할하는 정식 행정지명으로 등장하게 된다. 행정지명으로의 등장은 지명의 탄생과는 다르다는 것이 보편적인 학계의 주장이다. 기록이 제대로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여 3군 11현을 관할하는 행정지명으로 사용된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홍주(洪州)’라는 지명의 등장은 태조 원년(918년)부터 현종 9년(1018년)사이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운주가 궁예와 관련된 지명이라면 이 과정에서 운주가 홍주로 개명된 것으로 보는 측면도 있다. 이미 927년(태조 10년) 태조가 ‘운주성주 긍준을 쳐부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어 934년 왕건과 긍준 사이에서 벌어진 ‘운주전투’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왕건이 긍준을 이긴 뒤 권훤을 압박하면서 935년 신라의 항복을 받고,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켜 민족을 재통일 할 수 있는 역사적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 전투에서 왕건의 편에 선 운주성주 긍준이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우면서 운주가 차령산맥 서북부지역의 중심지역으로의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운주의 호족 긍준은 고려 태조로부터 ‘홍(洪)’씨 성(性)을 하사 받고 ‘홍규(洪規’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이 딸은 태조의 12번째 왕비인 ‘흥복원부인’이 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생겼고, 따라서 ‘홍규(洪規)’의 이름에도 ‘홍(洪)’자를 명명했으며, 지명도 ‘홍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가능성을 추정한다.

충청수영성.

흥복인부인 홍 씨는 홍주사람으로 삼중대광 홍규의 딸로 태조와의 사이에서 왕자 직과 공주 일후를 낳은(고려사, 권38,열전1)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후삼국 이전까지는 사료 상에 전혀 나타나지 않던 지금의 홍성읍을 중심으로 한 운주라는 지역이 후삼국시대를 거치면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급부상하였음을 시사해준다. 통일신라 말 처음으로 운주 (지금의 홍성일대)라는 지명이 사료 상에 나타난다. 아울러 홍주지역의 위상을 높이는데 영향을 준 듯하다. 차령산맥 너머 서해안 최대도시인 홍주는 혜성군(지금의 당진군 면천면 일대), 대흥군(지금의 예산군 대흥면 일대), 결성군(1172, 지금의 홍성군 결성면)과 보령현(1105, 보령일대)·청양현(1395, 청양읍 일대)·덕풍현(1175)·이산현(예산 덕산일대, 이하 1105년)·당진현(당진읍일대)·여미현(서산 해미일대)·여양현(홍성 장곡일대), 홍양현(보령 천북일대), 신평현(당진 신평일대), 정해현(서산 고북과 해미일대), 고구현(홍성 갈산과 서산 고북일대)을 관할했다. 한편 공민왕은 1371년 보우국사의 사망 후 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홍주를 목으로 승격시켰다.

전국을 8도 333군으로 개편하던 조선 태종 13년(1413)에는 고구현(高丘縣, 홍성 갈산과 서산 고북일대)·흥양현(興陽縣)·여양현·합덕현을 폐지하여 직할지로 삼고, 천안부의 관할이던 아산·신창·온양·평택은 물론 차령산맥 너머 서해안 전 지역을 관할하게 되어 ‘홍주’는 충주·청주·공주와 함께 충청도의 ‘4목(牧)’중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 세조 때 홍주는 5군·14현·1속현 이외에 영내에 충청좌수영을 해미에, 우수영을 남포에 각각 설치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했던 홍주지역은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의 이남,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지역, 남으로는 금강 이북의 22개 군에 이르렀다. 홍주는 예부터 교통, 체신, 행정의 중심지요. 국방의 요새지로 의병이 창의하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천주교의 복음의 씨앗이 전해진 곳이기도 하다. 충청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 바로 홍주(홍성)지역이었던 연유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지역공동체캠페인사업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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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재위 918~943년 홍주(洪州) 이름 탄생 추정
홍규(洪規) 고려시대 홍주의 호족 홍주홍씨(洪州洪氏)
옛 고유지명 ‘홍주(洪州)’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빼앗겨
‘운주(運州)’지명 고려 건국한 918년 기록에 처음 등장
고려시대 운주의 탄생과 ‘홍주’지명사용 이유 있었네
홍성, 옛 목사고을 고유지명 ‘홍주’를 찾지 못한 유일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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