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규(洪規) 고려시대 홍주의 호족 홍주홍씨(洪州洪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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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규(洪規) 고려시대 홍주의 호족 홍주홍씨(洪州洪氏)
  • <특별취재팀>
  • 승인 2015.08.0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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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⑥

 

경기충청도여지도(19세기).

견훤의 후백제와 왕건의 고려가 정립되면서 충남지역은 양국의 경계지역에 위치하게 됐다. 당시 충남지역의 동향은 그 지역을 독립적으로 다스리고 있던 호족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향방이 결정됐다. 특히 차령을 경계로 해 그 이북과 이남지역의 향배가 달랐다. 일찍이 공주는 905년 공주장군 홍기(弘奇)가 궁예에게 항복해 태봉의 영역이 돼 있었다. 918년 궁예가 내쫓기고 왕건이 즉위하자 후백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이흔암(伊昕巖)이 중앙에서의 정변 소식을 듣고 철원으로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다. 궁예의 심복이었던 이흔암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중앙 정계의 흐름을 정탐하기 위해 상경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모반의 혐의로 왕건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틈을 타 공주의 호족과 백성들은 후백제에 붙어 버렸다. 이는 공주가 오랫동안 백제의 수도였으므로 백제의 부흥을 내걸은 후백제 견훤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 후 934년(태조 17년)에 운주(運州)에서 견훤이 왕건에게 패한 후 고려에 항복할 때까지 후백제의 수중에 있었다. 이처럼 왕건의 즉위와 함께 공주가 후백제에 넘어가자 왕건은 전시중(前侍中) 김행도(金行濤)를 동남도초토사 지아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知牙州諸軍事)로 삼아 그 여파를 잠재우려 했다. 아주(牙州)는 지금의 아산지역으로 이 지역을 거점으로 해 최소한 차령이북은 평정하려 한 것이다. 919년(태조 2년) 8월에는 오산성(烏山城)을 고쳐서 예산현(禮山縣)이라 하고, 애선(哀宣)과 홍유(洪儒)를 보내어 유민 500여 호를 편안히 살게 했다. 예산이란 이름은 이때 처음 탄생한 것이다. 925년(태조 8년)에는 왕건이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연산진(燕山鎭, 충북 문의)을 쳐서 빼앗고, 임존군(任存郡, 예산군 대흥면)을 격파해 획득했다. 왕건의 남방한계선은 예산, 아산, 천안, 청주의 선으로 확정됐다.

이에 후백제 견훤은 이듬해 그의 볼모 진호(眞虎)가 왕건에 의해 살해됐다는 명분을 들어 웅진에서 진격해 북진을 하려 했다. 공주를 거점으로 북방을 경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여러 성에 명해 성문을 굳게 사수하고 나와 싸우지 말도록 했다. 이를 보면 당시 웅주는 후백제의 최북방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927년(태조 10년) 4월, 왕건이 직접 웅주를 쳤으나 실패했다. 그것은 이보다 앞선 3월에 왕건이 ‘운주’를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이 운주전투에서 왕건군은 운주성주(運州城主) 긍준(兢俊)을 무찌르고 운주를 획득했다. 그 기세를 몰아 웅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던 것이다. 아마 공산성의 험준한 지세와 백제의 수도였다는 자존심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고려로 넘어온 긍준은 그의 딸을 왕건의 후비로 드렸다.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가 바로 그다.

 

조선전도(18세기).

운주성주(運州城主) 긍준(兢俊)이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은 이름인 홍규(洪規)는 홍주 홍씨(洪州 洪氏)의 시조로 홍주의 호족이다. 태조 17년 934년 9월 운주전투에서 백제가 예상을 깨고 대패하자, 공주이북의 30여성이 모조리 고려의 깃발을 내걸었는데, 이때 가장 큰 세력인 홍주(洪州)도 고려에 귀부했다. 이때부터 백제와 고려의 세력이 역전되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홍규의 딸을 비로 삼으니 왕건의 제12비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이다. 홍규는 삼한통일 후 삼한삼중대광 벽상익찬공신(森韓三重大匡壁上翊贊功臣)에 책록 되었고, 해풍부원군에 봉해졌다. 고려는 운주전투에서 승리(934년)한 것을 계기로 지금의 충청남도 서북부지역을 장악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935년)하고, 후백제를 이김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운주를 비롯한 각 지방은 호족들의 세력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것은 고려 왕실의 힘이 그만큼 약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왕은 다만 조세를 걷고, 이를 운반할 금유(今有)·조장(粗藏)·전운사(轉運使) 등을 파견하는 정도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태조는 정략적인 혼인정책을 통하여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이때 태조의 12번째 왕비가 된 흥복원부인 홍씨는 운주 사람으로 삼중대광 홍규(洪規)의 딸 이었다. 홍규는 태조 10년 왕건에게 패한 뒤, 왕건의 마군장군으로서 경북 선산의 일리천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던 운주의 호족 ‘긍준’이 성씨를 가지면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고려건국 이후 운주에서 왕건과 싸워 패한 긍준의 세력과 왕건의 후비 홍복원부인 홍씨의 아버지인 홍규의 존재는 나말여초 홍주지역에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호족이었다. 후백제시대 초기의 홍주지역은 후백제의 영역 안에 포함되어 견훤과 궁예의 치열한 세력경쟁 속에서 대립과 연합을 반복하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군읍연혁도(19세기).

궁예가 군사력을 강화시켜 남하하자 웅주를 지키던 후백제의 장군 홍기는 자진하여 투항하였고(904년), 이는 주변지역에 영향을 미쳐 홍주지역도 후고구려와 연합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궁예가 왕건에게 축출되고 후고구려의 영향력이 소원해진 틈을 타 홍주지역을 비롯한 주변의 10여 주·현은 고려와의 관계를 청산하고(917년), 후백제와의 연합을 도모하였다(고려사, 태조 원년 8월). 그 결과 홍주는 후백제가 멸망하는 934년까지 약 17년 동안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예컨대 고려의 대상 홍유(남양홍씨의 시조)에 의해 유민 500여 호가 모집되고(고려사, 태조 2년 8월), 임존성이 공략되어 3000여 명이 죽었으며(고려사, 태조 8년 10월), 927년 운주가 공략되어 운주성주 긍준이 격파되었다(고려사, 태조 10년 3월). 결국 홍주지역은 태조의 운주 정벌군과 견훤의 5000 군사가 운주에서 격돌하면서 견훤군 3000여 명이 격파된 후 웅진이북 30여성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것이 934년의 일이다. 고려 왕건은 934년 운주전투에서 승리를 계기로 충청남도 서북부지역을 완전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936년 경북 선산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홍주가 충남서부지역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홍규와 흥복원 부인 홍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왕자 직(稷)과 공주 일후(一後)를 낳았다(고려사, 권88 열전1). 이로써 홍주는 고려 왕실과 각별한 사이가 되고, 운주의 영향력은 그만큼 높아지게 되었다. 그 후 운주는 광종 대와 성종 대를 거치면서 지방 통치제도가 정비될 때,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고(성종 14년, 995), 현종 3년(1012년)에는 지주사(知州事)가 설치되었다. 그 뒤 운주(運州)는 홍주(洪州)로 이름을 바꾼 다음 양광도 아래에 속하면서 3군 11현을 관할하였다. ‘운주’라는 지명은 당시의 호족이었던 ‘긍준’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그 대가로 태조 왕건으로부터 받았을 가능성이 크며, 그 시기는 928년, 즉 태조 10년이다. 그리고 ‘운주’에서 ‘홍주’로 바뀐 시기는 4도호부·8목체제로 지방의 행정구역을 개편한 현종 3년(1012)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결성지역은 운주(홍주)의 등장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고려 명종 2년(1172)에야 비로소 결성(結城)이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지면서 감무가 설치되었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홍주에 소속되어 지방관조차 파견되지 않았다.

결국 태조(太祖, 877년 1월 31일 (음력 1월 14일)~943년 7월 4일(음력 5월 29일))는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장군이자 고려의 초대 천자(재위기간 : 918년 7월 25일~943년 7월 4일)이다. 성은 왕(王), 휘는 건(建),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약천(若天),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이다. 연호는 천수(天授)이다. 앞의 기록대로 태조 왕건은 943년 음력 5월 29일 병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임종 당시 향년 67세였다. 따라서 왕건이 운주성주 긍준에게 홍규라는 홍주홍씨의 성을 하사하고 홍규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는 대목 등의 추론을 통해 행정지명의 사용이 아닌 토종지명 홍주(洪州)라는 지명의 탄생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이 기사는 지역공동체캠페인사업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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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운주의 탄생과 ‘홍주’지명사용 이유 있었네
홍성, 옛 목사고을 고유지명 ‘홍주’를 찾지 못한 유일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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