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상석으로 만든 남포벼루의 명맥 잇는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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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상석으로 만든 남포벼루의 명맥 잇는 장인
  • 한관우·장윤수 기자
  • 승인 2015.10.0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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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전통기업 대를 잇는 사람에게 길을 묻다 <7>

 

▲ 김진한 명장이 벼루에 문양을 새기고 있는 모습.


3대째 남포벼루를 만들면서 가업을 천직으로 생각해
‘오석’으로 잘못 알려진 ‘백운상석’으로 만드는 벼루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작업실에서 지내며 벼루 만드는 것을 지켜봤죠. 벌써 50년 이상 벼루를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충남 보령에서 50여 년 간 남포벼루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김진한(74) 명장의 말이다. 김 명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가업으로 남포벼루를 제작해오고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옛날 다듬잇돌을 만들어 오일장에 내다 파시곤 하셨는데, 하루는 서당에서 벼루를 만들어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벼루를 만들기 시작하셨죠. 아버지께선 그런 할아버지를 따라 벼루를 만드셨는데, 일제시대에는 청라면의 한 보통학교에서 벼루 선생님으로 계셨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학생들이 직접 만든 벼루들은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죠. 저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5형제 중 유일하게 가업을 이어 벼루를 만들고 있습니다.”

김진한 명장은 이처럼 가업을 이으면서 지난 1987년 12월 충청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6호가 됐으며, 아버지인 김갑용 씨도 무형문화재 제도 이전부터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을 정도로 남포벼루의 대가로 널리 알려졌다. 김진한 명장은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벼루 만드는 솜씨를 배우기 시작했고, 백운사 뒷산인 성주산을 올라 다니며 벼룻돌을 캤는데, 이 덕분에 어떤 돌이 벼룻돌로 가장 뛰어난지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게 됐다.

김 명장은 “문헌상 남포 벼루는 ‘오석’으로 만들었다고 되어있는데, 사실 오석과 벼룻돌은 판이하게 다르다”면서 “오석은 모래가 뭉쳐진 돌로, 벼루를 만들 수 없고 비석 등을 만들 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와 함께 백운사 주지와 협의를 하고 뒤에서 백운상석을 채취해 벼루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찰 뒤라는 이유로 채취 허가가 나지 않아 다른 곳에서 채취를 해야만 했죠. 저는 성주산의 돌 맥을 찾아 이리저리 고생을 하며 헤맸고, 결국 웅천 상평리에서 이어지는 백운상석의 맥을 찾아내 그곳에서 백운상석을 채취해 벼루를 만들고 있습니다.”

벼룻돌은 가장 상석인 ‘백운상석’과 그보다 질이 낮은 중석, 하석 등으로 나뉜다. 백운상석은 ‘흰 구름이 돌 위에 떠 있는 모양’이라는 의미가 담긴 돌로 일반인들은 벼루만 보고는 백운상석으로 만든 벼루가 무엇인지 구분하기 어려운데, 백운상석으로 만든 벼루는 뚜껑과 벼루를 마찰시켜봤을 때 맑고 경쾌한 쇳소리가 나지만, 중석이나 하석으로 만든 벼루는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가 난다. 또한 백운상석으로 만든 벼루에 먹을 갈면 먹물이 맑아 붓 끝까지 세밀하게 그어지고 발색이 좋은 것이 특징이다. 자석이나 단계석과 같이 붉거나 푸른 돌로 만든 벼루에 먹을 갈면 먹이 원색과 멀어지는데, 백운상석은 돌의 색이 전혀 나오지 않아 먹 색깔을 100% 반영하기 때문이다. 보물 제547호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유물 중에는 벼루 3개가 있는데, 이 중 2개가 남포벼루일 정도로 남포벼루는 예부터 유명했고,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 김진한 명장이 자신이 만든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문화재도 시대 흐름에 맞춰 진화하고 발전·계승돼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


“한때 벼루의 수요가 급증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남포벼루라는 이름을 달고 여러 사람들이 옛날에는 벼루로 만들지 않았던 돌까지 사용해 벼루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죠. 그 때 남포벼루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습니다.” 김진한 명장은 정부조달문화명품협의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는데, 재임 당시 남포벼루를 홍보하기 위해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남포벼루를 한창 홍보하고 있는데, 일본인들이 꽁꽁 싸매온 벼루를 들고 오더니 “이것이 예전에 구입한 남포벼루인데, 쓸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좋지 않다”며 항의를 해 난감한 상황이 있었다. 김 명장은 “남포라는 것은 한국의 지명 이름이고 그곳에서 만든 벼루는 모두 남포벼루라고 부르는데 사용할 수 없는 돌로 벼루를 만들어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라 설명했고, 자신이 직접 백운상석으로 만들어 간 벼루를 꺼내 보여주며 “한 번 써 보고 평가해달라”고 말해 실사용자들의 인정을 받아 이틀 만에 준비해 간 800여 개의 벼루를 모두 판매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제가 판매한 벼루는 모두 소장자 명단을 정리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50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벼루를 판매했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문제가 생겼으니 고쳐달라거나 바꿔달라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직접 써 본 사람들이 좋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남포벼루가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것 같습니다.” 김진한 명장은 “돌은 물을 머금었다 마르기를 반복하면 터지게 마련”이라며 “그러나 백운상석만큼은 수 천 년의 세월이 지나며 물을 담아도 터질 염려가 없기 때문에 훌륭한 벼루를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백운상석은 매우 단단한 돌이기 때문에 다이아몬드 날이 아니면 커팅을 할 수가 없고 가공이 매우 어렵다. 때문에 과거에는 백운상석보다 무른 돌로 벼루를 만들었고 지금도 백운상석으로 벼루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가장 좋은 돌인 백운상석의 가공이 가능해졌고, 여기에 김진한 명장의 고집이 더해져 최고의 벼루가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김진한 명장은 벼루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빛을 이용해 쪼아내는 독특한 방식의 제작 기법을 개발해 발명 특허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김진한 명장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발전해나가는 우리 문화재의 필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 김진한 명장의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의 모습.


“문화재도 시대에 발맞춰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문화 관련 정책들을 보면 장인들에게 과거의 방식만을 고수해 생산품을 만들어내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을 해왔고,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가 만들어져 우리의 삶이 변화되었듯이 비록 만드는 과정이 현대화가 되더라도 우리의 문화유산이 잊히지 않는 것, 또 그것을 만들어나가는 이들이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괴로운 것이 아닌 정말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 가업을 계승하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점차 확산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진한 명장은 5형제 중 유일하게 남포벼루를 제작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벼루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까지 천직으로 생각해왔기에 계속 할 수 있었다”는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짧은 인생을 살며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벼루를 만들면서 100% 만족하는 작품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는 것이 제 대답입니다. 영감이나 생각은 아주 훌륭하고 멋지게 떠오르지만 막상 손으로 만들다보면 결점이 항상 생기게 마련이죠. 마치 무지개가 눈앞에 보이지만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다음엔 더 멋지게 만들 것이다’ 다짐을 하게 되죠.”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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