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의 땅 홍성, 백야 김좌진 장군의 위대한 삶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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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땅 홍성, 백야 김좌진 장군의 위대한 삶의 출발
  • 글=한관우/자료·사진=한기원 기자
  • 승인 2015.10.1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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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10>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 갈산면 행산리의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김좌진, 강한 것 누르고 약한 것 돕는 억강부약사상 철저해
기호흥학회 조직, 호명학교에서 준재 골라 서울에 유학시켜

 

김좌진, 강한 것 누르고 약한 것 돕는 억강부약사상 철저해 기호흥학회 조직, 호명학교에서 준재 골라 서울에 유학시켜충청도 홍성을 충절의 고장이라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홍성 땅 곳곳엔 선열들의 구국정신의 넋이 그대로 배인 땅,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고 정신이다. 홍성의 역사를 말할 때 대략적으로 기억되는 인물만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공민왕 때의 명승 보우국사, 고려말의 명장 최영 장군, 학덕과 절의의 표상 이성 선생, 신돈을 탄핵한 장하 선생,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 선생, 백의종군으로 구국정신 실천한 임득의 장군, 구국열사 이설 선생, 을사 5적을 서토한 김복한 선생, 병상에서도 병오의거에 가담한 채광묵 선생,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자결한 이근주 선생, 기미독립선언의 만해 한용운 선생,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한 백야 김좌진 장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애국선열들의 넋이 살아 숨쉬는 땅이 바로 충남 홍성 땅이다. 을미 창의, 병오항쟁, 3‧1운동의 현장을 간직한 땅도 바로 홍성 땅이 아닌가. 이러한 수많은 애국선열들 중에서도 백야 김좌진 장군에 대한 연구 등 체계적인 조명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1885년 고종 26년, 음력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화약궤를 안고 순국한 선원 김상용 선생의 11세손이며, 개화당의 거수 김옥균의 4종인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마을 아이들을 모아놓고 활도 쏘고 말 타는 흉내도 내며 꼬마대장 노릇을 해왔다고 전하다. 어느 때는 변소 앞 느티나무에 종이를 걸어 놓고는 용변 후에는 반드시 쥐어박으라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야만 오래 산다는 철학이었다는데, 이렇게 어려서부터 쥐어박는 연습에 골몰해 왔던 김좌진은 커가면서도 그런 버릇을 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는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도와주자는 억강부약의 사상에 철저했고, 또한 인정스러움도 강했다고 한다.

김좌진의 소년 시절은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4년), 제1차 한일협약(1904년), 을사보호조약(1905년) 등 역사는 가파르게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시대 상황이 멸망의 최후를 향한 진행이었던 셈이다. 전국 각지에서는 항일의병들이 봉기하였고 애국지사들은 자살로서 순절했다. 17세(1905)되던 김좌진은 이때 서울로 향한다. 고향에서 수련하고 단련된 무예와 체구는 절륜의 지경에 이르렀고 호방‧대담한 그의 성격은 곧 애국지사들과의 친교로 이어졌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선 교육사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고향에 호명학교를 세웠는데 교사 문제로 곤란을 겪던 그는 자기가 살던 80여 칸의 집을 학교 건물로 사용했다. 후에 그는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호명학교에서 준재를 골라 서울에 유학시키기도 했다.
 

▲ 갈산의 백야 기념관.


1915년 독립자금 강탈에 실패 3년 동안 서대문형무소 복역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사관연성소 설치 독립군 양성에 전력


1908년에는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청년학우회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곳에서의 활동상과 교우관계 등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1913년 경북 풍기에서 채기중 외 몇 사람이 중심이 되어 대한광복단을 조직했는데, 대구의 박상진을 위시한 여러 지사들이 합류했고 노백린, 신현대, 윤홍중, 신두현 등이 가입하면서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김좌진도 여기에 가입했다. 이들은 비밀결사조직으로써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행동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지에서 눈부신 활동을 했는데, 대구의 부호 장승원을 살해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한 일이나 전남 보성의 갑부 양재학, 전남 낙안의 부호 서도현을 살해, 각기 독립자금의 조달에 분망했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동지들이 발각되어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좌진은 1915년에 서울 돈의동의 거부 김종군으로부터 독립자금을 강탈하려다가 실패하여 3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것은 분명한 의거였고, 날짜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1915년 전후의 일임에는 분명하다. 김좌진은 천성이 호담무쌍한 성격으로 사생을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성격이었다. 1930년 2월 동아일보의 보도를 보면 김좌진에 대한 기사에서 그가 어느 정도 대범한 인물이었나를 쉽게 짐작케 한다. 그는 물건을 살 때나 인력거를 탈 때에 돈을 세어주지 않고 주머니에 있는 것을 몽땅 털어 주었고 커다란 대접으로 술을 폭음했으며, 갈비 한 짝을 한꺼번에 처치하는 대식가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단 사건으로 체포될 때도 포승에 묶이자 힘을 한번 쓰니까 포승줄은 썩은 새끼줄처럼 쉽게 끊어져 버렸다는 무시무시한 힘, 형무소 복역 당시엔 쇠고랑조차도 쉽게 끊어버리자 두 개를 겹쳐 채웠다든가, 쌀 한 섬을 작은 물건 하나 다루듯 운반하곤 했다는 기록과 바위만한 돌을 들었다는 기록 등은 그가 장사였음을 짐작케 하는 일들이다. 또한 문중의 과부에게 개가를 권하고 단발을 일찍 하도록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의 앞을 내다보는 명민한 개화사상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들이다. 당시에 이런 선구적 사고와 사상가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일들이라 하겠다.

안화춘 연변역사연구원 교수는 “1917에 광복단 사건으로 출옥한 후 그는 다음과 가은 시 한편을 남기고 망명의 길을 떠난다. ‘남아선수난객지, 지사논생경대시, 남아가 실수하면 용납할 땅이 없으나, 지사가 구차히 살려함은 다시 때를 기다림 일세.’ 조국을 잃어버린 백성이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패배한 것이 아니다. 때를 기다려 자신의 대의명분을 삼았다”며 “동북만주, 시베리아 등지의 망망한 대륙 소만국경을 전전하며 실의와 좌절의 쓰라린 형극의 길이었으나 천성이 낙천적이고 굽힐 줄 모르는 호방한 성격은 많은 동지들을 얻게 되곤 한다.

이보다 앞서 1911년에 서일 등이 길림성 왕청현에서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을 조직했으나 무기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교육과 계몽에만 힘써 왔으며 1915년 계화 채오 등은 중광단 조직을 토대로 만주 각지의 대종교도들을 통합하고 정의단을 조직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꾀했다. 바로 이때에 김좌진은 왕청현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는 즉시 여기에 가입하여 그들과 함께 근본적인 개편을 시도하여 군정부라는 대군사 조직체를 결성하고 본진을 왕청현 서대파구에 두었다. 이게 1915년 8월의 일이다. 이곳에 모여든 지사들은 현천묵 이범석 등을 위시한 쟁쟁한 당시의 전략가들이었다. 이들은 또한 제 1차 대전 때 시베리아에 출동했던 체코슬로바키아군의 호의를 얻어 블라디보스톡에서 무기를 사들임으로써 경무장을 할 수 있게 된다. 같은 해 12월에는 북로군정서로 개칭하고 김좌진은 그 총사령관에 취임한다. 당시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한편으로는 한교의 산업진흥과 교육보급에 힘쓰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건립했다”는 설명이다.

1920년에는 다량의 무기를 블라디보스톡에서 더 구입하여 명실공이 병력의 증강과 무기를 갖춘 전투부대로 재편된다. 그들은 만주의 군벌 장작림에게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게 되고 압력을 받은 장작림의 권유로 독립군은 장백산으로 이동한다. 철수여행단을 조직하고 철수예정일을 9월 20일경으로 정했다. 각지에 흩어진 정보망으로부터 전략적 이동보고를 받은 것은 장백산을 향해 떠나던 도중이었다. 북로군정서에 대한 양면 남북 협공작전이 개시 되리라는 것이었다. 

 자문=안화춘 연변역사연구원 교수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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