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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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9〉
  • 조현옥 전문기자·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0.0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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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보내는 공소行 편지
▲ 구정리 공소 내부.

오후 1시가 되어서 구정리 공소에 도착했습니다. 운월리에서 1시간가량 걸어 온 셈입니다.  홍동중학교에서 사고개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 왼쪽으로 접어들어 길 따라 10분쯤 올라오니 언덕배기에 담배 밭이 보입니다. 입구의 느티나무가 가려 공소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문은 잠겨 있고 발이 아파와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아 물을 마시며 좀 쉬었습니다. 앞모습이 운월리 공소와 닮았다고 생각했으나 주변을 돌아보니 조금 다릅니다.

좌우 면은 수많은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군요. 숲과 가까운 왼쪽 창들은 보기 좋게 담쟁이 넝쿨이 타고 올라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진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제대 중앙에 예쁜 꽃병이 놓여있습니다. 내부는 하얀 칠을 했는지 깨끗해 보였는데 여느 공소처럼 겨울용 난로와 선풍기가 함께 있습니다.

바쁜 일상가운데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기에 그러하리라 짐작해보며 이번엔 그냥 떠나야겠다 마음먹고 일찍 청양 비봉공소로 향했습니다. 담배 밭을 내려오다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홍동 사고개를 거쳐 큰 길을 가는 것도 좋겠지만 지름길인 반교마을을 질러가고 싶어 길을 묻기 위해서 입니다. 그랬더니 참 다행입니다.

예전엔 산길을 통해 반교마을로 다녔지만 지금은 풀이 수북해 걸을 수 없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무슨 일로 그러냐는 질문에 답하다가 이 분이 구정리 공소 회장님인 강순원(아우구스티노) 형제님임을 알았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말고 공소로 올라가서 문을 열어주시며 설명을 들려 주셨습니다.

농촌에서 일하는데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들려주는 공소 이야기가 재미있어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그전엔 이 건물 말고 먼저 건물이 있었는데 아, 제가 군대 갔다 오니까 무너져버린거유. 홍성 지진 때쥬.” 지진으로 첫 번째 건물이 무너지고 다시 공사를 해 현재의 건물이 들어 선 것이랍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전에는 신자들이 반교마을 신필균 초대회장댁에 모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 씨네 집하고 두 집을 오가며 모이다가 공소를 짓게 된 것”이라고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회장님은 “이 건물 낙성식 때 이완구씨가 처음으로 홍성경찰서장으로 발령받았는디, 그 분이 참석했었지유”라며 함박웃음을 지으십니다. 대부분의 공소는 장소가 협소해 “고백소”를 두기가 어려운데 구정리에는 오래된 철제의자 두 개가 전부인 소박한 고백소가 있었습니다.

 “아이구, 요즘은 신자 노릇도 못하겠슈. 어디 사람이 있남유?  농사철이라 다 바쁘구 젊은이덜두 읎구.” 하시는 분과 헤어져 반교마을로 걸어갔습니다. 하긴 건물 청소도 정리도 공동체 기도도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은 어디나 개인중심이고 인터넷으로 연결된 익명 공동체를 이루는 마당에 누가 나서서 이웃의 어려움과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하겠습니까? 그나마 운월리 공소는 면소재지에 귀농인들이 모여들어 젊은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지만 외떨어진 공소들은 운영이 되질 않아 문을 닫는 실정입니다. 시골 학교마다 폐교가 되어 그 학교를 다닌 동문들의 수십 년 된 추억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이처럼 시골 공소들도 같은 현상을 맞이하고 있군요.  

반교 마을은 어르신들 그림지도를 그려 홍동면소재지에서 반교까지의 마을을 자세히 설명하는 안내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새로 난 홍성~청양간 4차선 도로가 금당리를 거쳐 걸을 수 있어 반교마을 진입로부터 그 길을 이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대영리 들어서는 부분까지만 가능합니다. 일부 구간이지만 차량통행이 없어 혼자 고즈넉이 걸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별안간 배가 고파지면서 금당리에 있는 식당을 지나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홍동 빵집에서 샀던 빵부스러기를 꺼내 요기를 하고 대영리 고갯길을 걸어 장곡리 끝자락을 통과해 예산군 땅을 밟았습니다.

홍성에서 비봉공소까지는 그러니까 세 개의 군을 지나는 형국입니다. 노전리 ‘인장박물관’ 표지판이 보여 마음 같아서는 들렸다 가고 싶었으나 저녁나절이나 도착할 목적지 때문에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오후 다섯 시가 가까워지니 점심을 해결하지 못한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어디라도 들려 밥을 사먹고 싶어 두리번거려도 새로 난 길 때문에 그나마 보이는 식당도 멀리 돌아가야 해 결국 목적지까지 굶고 갔습니다.
 

▲ 비봉공소.

청양 화성과 예산으로 갈라지는 길을 지나 비봉면 장재리 쪽까지 오니 멀리 쌍둥이 저수지가 있는 산들이 보이고 곧 비봉공소에 닿을 듯 해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식당 몇 개가 있는 비봉면 소재지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 ‘은골’에 도착했습니다. 마을이름처럼 동네가 순박하고 예쁘며 조용합니다. 반쯤 쓰러진 돌담길을 돌아 할머니들이 한가롭게 모여 앉은 느티나무 정자에 멈춰 반가운 인사를 나눴습니다.

스무 살에 시집을 와 여기서 계속 사셨다는 84세 가르시아 할머니와 칠십 중반의 수산나 할머니는 은골, 이 비봉공소에서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하신 분이십니다. 비봉 공소는 1958년경 지어진 건물로 바로 옆에 조선시대 말에 생긴 옹기 터가 있어 옹기를 만드는 수많은 일꾼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박해 때문에 숨어들어 온 천주교인들이 옹기를 구워 만들어 팔기 시작해 커진 공동체인 셈이지요. 일제 강점기에도 옹기 마을이었고 스테인 그릇이 나와 옹기가 사향산업이 된 1970년대 말까지 이 마을은 옹기장이들로 북적였다고 합니다.

가르시아 할머니도 옹기를 들고 홍성, 갈산, 광천, 청양장으로 팔러 다녔다고 하는데 “처음엔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다녔지. 리어카가 나와서 싣고 다녀 훨씬 쉬웠어” 지금도 한창인 젊은이 같으십니다.

“처음에 이 마을에 강당(공소)이 없을 때는 예산으로 다녔어. 봄 부활 때하고 8월 몽소승천 때, 그리고 12월 성탄 때 세 번 게까지 걸어갔지. 걸음이 빠른 사람이 아침에 걸으면 저녁에 닿았어. 아마 칠팔십 리는 되지. 여름에는 마른 장작을 잘게 패서 쌀 한 됫박이랑 머리에 이고 예산 성당으로 걸어가서는 성당 밑에 솥단지를 걸어 놓고 불 때서 밥을 해먹었어. 그러고 미사 참례하고 잠은 아는 사람 집에서 얻어 자고 또 돌아오곤 했지.” 할머니의 걸음이 상상이 됩니다. 지금도 저리 건강하신데 그 때는 저보다 훨씬 빨리 걸으셨겠지요?

저녁밥을 드시러 가신다는 두 분과 헤어져 공소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종이 동쪽으로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공소 미사가 행해질 때 울려 퍼졌던 종소리가 상상되어집니다. 마룻바닥은 조금씩 삐걱거리고 천정은 낮아 키가 큰 사람은 닿을 듯합니다. 1982년에 기증받은 풍금이 구석에 있고 한국의 미를 자랑하듯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 다소곳하게 서 있습니다. 홍동 운월리와 구정리 공소보다 훨씬 오래된 건물이어서인지 방 한 칸짜리 사랑방에 앉은 느낌입니다. 이 마을 어르신들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라고 하니 얼마나 공동체가 컸었는지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번성했던 옹기 공장의 건물은 옛 공소 회장님 댁 창고로 쓰이고 있는데 할 수 있다면 그 건물을 잘 정리하여 옹기 관련 박물관으로 사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 종일 주렸던 배를 채우고자 비봉면소재지까지 잰 걸음으로 나왔는데 식당마다 문을 닫았습니다. 비봉정류소슈퍼에서 소시지를 두 개 사서 급하게 먹으며 7시 완행버스를 타고 홍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편지까지 그대의 영혼이 건강하기를.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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