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 1896년 을미의병과 1905년 의병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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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 1896년 을미의병과 1905년 의병봉기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3.2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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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2>

1906년 3월 안병찬 등 의병모집 홍주성점거 실패
홍주성 탈환 노리는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1906년 5월 19일 홍주성 점령, 31일 내주고 말아
이후 홍주의병 충청·전라도 각지 흩어져 항쟁 계속

 

▲ 민종식 등 홍주의병은 홍주성의 탈환을 노리는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5월 31일 홍주성을 내주고 말았다. 홍주성 성벽과 홍주성 남문인 홍화문.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홍주성 남문은 2013년 12월 3일 복원돼 홍화문이란 이름으로 위용을 드러냈다.

일제시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제시대는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의 시기에 해당한다. 한국으로서는 근대의 상당한 시기를 식민지라는 억압의 조건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국의 근대는 독특한 역사적 특징을 지니게 된다. 서양의 역사에서는 근대는 다름 아닌 국민국가의 성립시기이며, 이는 절대주의적 왕권의 붕괴와 민주주의적 정치의 발전과정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한국은 독립적인 국가를 성립시킬 수 없었고, 또한 국민을 형성시킬 수도 없었던 시기다. 일본의 족쇄가 그것들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시대 우리의 역사는 새로운 질서에 의한 역사가 아니라 국가를 찾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역사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시대의 역사를 알기위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러한 운동을 우리는 민족의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민족 독립운동이라는 개념 속에는 독립된 자주국가 수립을 위한 운동뿐 아니라 민족의 내부 질서에 주목을 하는 정부수립을 위한 운동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의병, 국가와 민족위해 싸운 민간 군대
한말의 의병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맞아 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봉기한 민병(民兵)이었다. 민병이라고 해도 관군을 지원하는 등의 단순한 민병이나 관군의 위치를 초월한 민족의 군대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904년부터 일어난 중기의병 이후의 의병전쟁에서 더욱 분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구한말 의병항쟁을 의병전쟁이라고 이름하는 것도 민족의 군대로서 항쟁했다는 데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의병전쟁이란 나라가 외국인에 의하여 침략을 당하였을 때 누구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는 민간으로 구성된 군대를 말하는 것이다. 의병은 우리나라가 외적에게 침략을 당했을 때 마다 나타난 것으로,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민간인들로 조직된 의병이 스스로 일어나 싸웠고, 한말에도 일본군의 침입을 막고 그들을 쫒아내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한말 의병전쟁은 한민족의 구국성전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시작된 의병전쟁은 1905년 을사조약을 거치면서 한층 격화되었고, 1907년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대일 전면전의 단계로 발전되어갔다. 이에 일제의 통감 이등박문은 증폭되어 가던 한민족의 항일기세를 꺾기 위해 영국이 이집트의 민족영웅이었던 아라비 파샤를 멀리 실론 섬에 유폐했던 사실에 착안하여 의병의 대마도 유폐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 홍주의병의 홍주 9의사 등 대마도 유폐
이후 홍주의병의 홍주 9의사와 태인의병의 최익현과 임병찬을 대마도에 유폐시켜 철저히 감시하고 억압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의 성장 발전 가운데 의병전쟁이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였으나, 잘 훈련된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 참판 민종식이 이끈 의병은 충청도, 충남의 홍주(洪州)에서, 전 참판 최익현이 이끈 의병은 전북 태인에서 봉기하였으나, 이들 유생 의병장이 이끈 의병 부대들은 일본군과 정부군에 포위당하자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못한 채 의병항쟁을 끝내고 말았다. 특히 최익현의 경우 관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하자 ‘왕이 보낸 군대와 싸울 수 없다’하여 의병을 해산하고 스스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유교적인 ‘충(忠)’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양반 유생 의병장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겠지만, 당시 이 과정을 지켜본 백성들의 절규는 충신으로서의 최익현의 명망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한말 의병전쟁은 일제의 최초 침략전쟁인 1894년 청일전쟁 직후인 을미사변과 단발령 전후에 시작되어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 빼앗기기까지는 물론 서북간도(西北間道)와 시베리아 지방에 무장 한국독립군의 터전이 잡히는 1914년경까지 전후 20년에 걸쳐 계속된, 민족과 국가를 지키려는 민족의 항전이었다. 한말의 의병전쟁을 민족독립을 위한 ‘피의 역사’ 라고 기록한 민족주의 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는 이 의병을 나라의 ‘민군(民軍)’이며 민족의 ‘국수(國粹, 한 나라와 국민의 고유한 역사, 문화, 국민성 등에 나타난 우수성)’라고 규정하였다. 즉 군주의 원한을 풀고자하는 ‘충의군(忠義軍)’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충의정신과 오상정신에 입각하여 자발적으로 외적의 침략에 무장항쟁한 군사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처럼 ‘의병적 성격’ 또는 단순히 ‘정의의 군대’라는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의병’과 임란과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주자학사상의 충의정신에 기초하여 무장투쟁한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의병’과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 홍주성 안에 있는 병오항일의병기념비.

■ 을사홍주의병, 가장 치열한 항쟁 벌여
을사조약으로 우리나라가 독립국가로서의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자, 1905~6년 국권회복을 위해 민중과 양반유생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일무장투쟁이 본격화 되었던 것이다. 1904년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이어 1905년에는 통감부설치와 한국의 외교권박탈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일감정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조직되었다.

먼저 1904년 7월 서울 교외의 조선군인들이 일본의 만행에 격분하여 반일의병부대로 전환한 이후, 원주·단양·제천·죽산 등 중부일대에서 의병이 속속 출현하기 시작했다. 을미의병(乙未義兵) 당시에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에서 중군으로 활약했던 원용석(元容錫)·박정수(朴貞洙) 등은 1905년 9월 원주 동쪽인 주천(酒泉)에서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어 제천·청풍·횡성·홍천 등지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했다. 그러나 활동도 개시하기 전에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와 일진회(一進會) 회원의 습격을 받아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 부대의 의병들은 소규모의 부대로 분산하여 죽령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면서 유격전을 추진했다.

을사의병 중 가장 치열한 항쟁을 벌인 것은 홍주(洪州)의병이었다. 1906년 3월 안병찬(安炳瓚)·박창로(朴昌魯)·채광묵(蔡光默) 등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홍주성(洪州城)을 점거하려 했으나, 도중에 합천(合川)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실패했다. 한편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도 1906년 3월경부터 충남지역과 전라도의 유생들을 규합하고 의병을 모아 봉기를 추진하다가, 그해 5월 11일 이용규(李容珪)·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정재호(鄭在鎬) 등과 함께 홍산(鴻山)에 모여 봉기를 최종 결정하고 의군을 출동시켰다. 이들은 서천(舒川)·남포(藍浦)·보령(保寧)·결성(結城)을 거쳐,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했다. 민종식 의병은 홍주성의 탈환을 노리는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5월 31일 홍주성을 내주고 말았다. 그 이후 홍주의병은 충청·전라 각지에 흩어져 수천 명 혹은 100여 명의 부대로 꾸준히 항쟁을 계속했다.

을사의병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1895년의 을미의병과 큰 차이가 없었다. 평민출신 의병장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을사의병의 지도부는 여전히 양반 유생이 중심이었고, 지도이념도 위정척사사상에 기반 한 반외세의식이었다. 이러한 양반 유생중심의 의병은 민중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계급적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대중의 반침략적·반봉건적 요구를 수렴할 수 없었다. 또한 전투력에서도 무기와 편제가 조잡하고 민병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전력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7년 이후 일제의 침략이 더욱 심화되고 군대해산과 함께 군인들이 의병에 참가하면서 반침략·반봉건 지향이 전면에 등장하고 민중세력이 의병의 지도부로 진출하는 등 의병의 성격은 변화하게 되고, 전투력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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