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은 절개의 충신 김복한, 배신의 기회주의자 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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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절개의 충신 김복한, 배신의 기회주의자 이승우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4.0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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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4>

을미사변 단발령 공포, 홍주유생들과 의병투쟁 전개
홍주부 내에 창의소 설치, 지산은 의병 총수에 추대
관찰사 이승우 홍주목사·창의대장 변심 지산 등 구속
일제시기 지산의 문하 김좌진·김명동·윤봉길 등 배출

 

▲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 산70-9에 있는 추양사(秋陽祠)는 지산 김복한의 옛 문하생을 중심으로 지방의 유생들과 역대 군수의 주선으로 1973년에 건립됐으며, 그의 영정을 봉안, 매년 3월 보름날 제향을 올리고 있다. 秋陽은 가을의 빛이 강한 태양을 말하는데, ‘맹자’에서 따온 말이다.

홍주의병(洪州義兵) 투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 1860.7.24.~1924.3.29.)이다. 한말의 의병장이었던 유학자 김복한은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순절한 문충공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10대손이다. 선비의 매운 지조와 의열(義烈)의 피를 타고난 셈이다. 60평생을 옥살이로 일관했던 지산은 곧은 절개의 상징으로 내종형인 이설과 안병찬·임한주·이근주·채광묵 등과 함께 홍주의병을 일으킨 인물로 꼽힌다. 의병, 특히 홍주의병의 발상지인 홍주부(洪州府)는 1895년 음력 5월 26일 고종(高宗)이 칙령 제98호, 지방제도의 개정에 관한 안건을 반포하면서, 신설한 23부 중 하나이다. 고종 33년(1896년) 8월 4일, 지방제도를 23부제에서 13도제로 다시 개편하면서, 홍주부는 폐지된다. 홍주부의 관할구역은 부청 소재지였던 현재의 홍성군과 충청남도 당진시, 보령시, 서산시, 서천군, 예산군, 청양군, 태안군 지역과 부여군 일부, 아산시 일부지역이 해당되는 곳이다. 이곳이 홍주의병투쟁의 발상지였던 것이다.

■홍주의병투쟁과 지산 김복한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는 갑오변란을 지산은 국망(國亡)의 시초로 보았다. 두문불출하던 지산은 1895년 8월 을미사변의 비보와 11월의 단발령 공포에 접하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반개화 반침략의 의병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단발령 공포 직후부터 지산은 홍주지역 유생들과 잦은 접촉을 하였다. 중앙정계에서 요직을 역임했던 지산의 의병 봉기는 지방 유생들을 크게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우선 지산은 이설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다. 지산은 12살 때인 1871년부터는 예산군 덕산면의 송애에 거주하던 농은(農隱) 이돈필(李敦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살 되는 1874년부터는 내종형인 이설의 가르침도 받았던 인연이 있었다. 이런 관계로 지산은 이설에게 의병참여를 권유하였으며, 또한 홍주부 전 영장 홍건과 함께 관찰사 이승우의 의병 참여문제에 대하여 여러 차례 협의하였다. 또한 홍주향교 전교인 안병찬과 만나 거의(擧義)의 뜻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이상린·이봉학 등과 연락을 취하였으며, 청양군수 정인희에게도 글을 보내어 의병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지산의 의병 봉기에 안병찬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유생들과의 연합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들은 노론과 소론이라는 당색의 차이를 극복하고 의병투쟁에 적극 합류하였던 것이다. 이미 안병찬은 1894년 여름부터 의병봉기를 준비하였으며, 을미사변 직후부터는 군사모집과 무기수집 등의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실제로 안병찬은 지산을 만난 다음 날 청양의 화성에서 향회를 실시 180여명의 민병을 모집하였으며, 이들이 홍주의병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지산의 거병은 12월 1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저녁에 이봉학·이세영·김정하 등에게 정산과 청양의 민병 수백 명을 나그네 또는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홍주성(洪州城)안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12월 2일, 지산은 안병찬의 척숙 박창로가 사민 수백 명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가 청양군수 정인희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 집결을 기다려 의병을 반대하는 홍주부 참서관 함인학과 경무사 강호선을 체포하여 이들의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다. 의병들이 경무청을 부수고 들어가 이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 구타하기에 이르자 관찰사 이승우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면서도 동참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지산은 당 태종이 죄 없는 진양령을 죽여 천하를 다스린 고사를 들어 힐책하자 이승우는 결국 의병에 참여하기로 승복하였던 것이다.

 

▲ 홍주의병장 지산 김복한(사진 원안) 의병장의 통문(1895). 의병장 김복한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의병궐기를 도모하기 위해 돌린 통문(通文).

■ 관찰사 이승우 변심 지산 등 구속해
거병한 지 3일째 되는 12월 3일, 드디어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였는데, 지산은 의병 총수에 추대되었다. 지산은 ‘존화복수(尊華復讐)’라 쓴 기를 세우고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각 고을 대표들로 하여금 집을 순회하며 노약자와 독자를 빼고 각 호에 한 사람씩 응모하도록 하였다. 관찰사 이승우 역시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란 이름으로 관내 각 군에 명령을 내려 당일로 군사를 이끌고 오게 하였다. 관찰사의 명령은 바로 하달되어 홍주부 관할의 관군은 군수의 명령 하에 홍주에 집결하기 위해 출동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 만에 관찰사 이승우는 변심하여 지산 등을 구속했다. 이 소식을 듣고 각 군의 관군은 회군하고 말았다. 오직 청양군수 정인희만이 공주를 공격하려고 진격 중 정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했다. 홍주부와 홍주성은 서울에서 내려 온 친위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친위대는 신우균이 이끄는 1개 중대로 250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복한은 12월 7일 신우균의 취조를 받고 홍주부에 수감되었으며, 12월 30일 칼을 쓰고 결박당한 채 서울로 압송되던 중 1896년 1월 1일 신례원에서 돌아와 홍주감옥에 재차 구금되었다. 이는 이승우가 아관파천 직후에 김홍집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압송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복한은 이설·안병찬 등과 함께 1896년 1월 17일 서울로 다시 압송되어 구속되었다. 이때 얻은 각기병으로 지산은 평생 보행이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지산은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종황제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귀향한 지산은 그해 4월 보령의 길현(현, 충남 보령시 청라면)으로 이사하여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다. 5월에는 성균관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음해 다시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이후 지산은 후학 지도와 향약을 베푸는 등 주자학의 교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지산의 구국의지 옥고 치르며 더욱 굳건
지산은 1894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관직을 사직한 후, 낙향하여 나머지 생애를 항일투쟁에 바쳤다. 지산은 1895년 을미사변의 비보와 단발령의 강행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반개화, 반침략의 홍주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얻은 각기병으로 평생 보행이 어렵게 되었으니 지산의 항일민족운동의 출발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옥 후에는 후학 양성에 힘쓰는 한편, 향음례를 실시하고 향약을 베풀면서 주자학 보급에 주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지산은 내종형인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5적 처벌과 일제 구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비록 건강상의 이유로 의병을 일으킬 수는 없었으나 지산은 안병찬 등에게 의병봉기를 고무하였다. 민종식이 체포되자 지산 역시 체포되어 서울 경무청에 구속되었다. 풀려난 후 공주감옥에 다시 구속되었으나 지산의 구국의지는 옥고를 치르면서 더욱 굳건해졌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910년 국망(國亡)과 함께 지산은 자정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이 발발하자 노년의 나이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운동을 계획하였다. 지산은 의병 동지를 비롯한 유림들에게 뜻을 알리고 서명을 받아 호서유림의 독자적인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지산 김복한이 주도한 장서운동은 영남지역에서 추진되던 장서운동과 통합되어 하나의 장서를 파리에 발송하기에 이르렀다. 학파와 당색이 서로 다른 호서와 영남지역 유림의 장서운동의 통합은 민족운동사에서 일대 쾌거라 하겠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초연한 지산의 국권회복 의지와 반침략 정신은 민족의 위기에 지산을 비롯한 문인들의 적극적인 민족투쟁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그 결과 지산의 문하에서 일제시기 김좌진·김명동과 같은 걸출한 민족지사는 물론, 유명(遺命)으로 유교부식회가 설립되어 유교의 개혁과 아울러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써 윤봉길과 같은 혁명운동가가 배출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지산 김복한은 19세기말 조선사회의 전환기를 실천적으로 극복하고자 고투했던 곧은 절개를 지킨 충신이었고 유학자였으며, 일제의 침략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투쟁, 또한 파리장서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항일독립투쟁을 주도했던 걸출한 곧은 절개를 지킨 홍주출신의 선비였으며, 독립 운동가였던 것이다.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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