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 오서산 폐금광 굴 20~40대 남성유골 21개체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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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 오서산 폐금광 굴 20~40대 남성유골 21개체 발굴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0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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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평화인권공원(가칭) 어떻게 조성해야 할까? <2>
▲ 광천읍 담산리 산93-1번지 폐금광 굴에서 보도연맹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해발굴 작업이 홍성 지역에서 처음으로 진행됐다.

좁은 굴 입구 2m 지점에 18구의 유해 엉켜 있는 모습 드러내
모두 남성 20대 6명, 30대 8명, 40대 2명, 어른 2명, 불가 1명
뼈에 총상 흔적 관찰돼 총살됐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증거로
‘병규’라는 이름 새겨진 라이터도 출토돼, 관련자 찾는 일 과제

 

‘용봉산평화인권공원’ 조성사업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올해 발굴된 광천 폐금광 유해발굴과도 맞물려 있다. 기존에 용봉산 골짜기에서 홍성지역 보도연맹원들이 사살되었던 사실에 바탕 해 지난 2015년 7월 13일 홍성군은 홍북면 용봉산 학살 현장에 추모탑을 정식으로 세웠다. 한국전쟁 당시 홍성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당한 것으로 확인된 민간인 61명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탑이다. 이 탑을 건립한 계기는 지난 2013년 9월 12일 당시 대법원 2부(주심 신영철 대법관)는 홍성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 9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인 대한민국의 상고를 기각하고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년 10월부터 보도연맹사건 관련 조사를 벌여 지난 2009년 1월 19일, 1950년 당시 홍성보도연맹원 13명이 경찰에 의해 희생당했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국회를 통과, 홍성군유족회는 2006년 2월 10일 결성됐다. 이후 2009년 6~7월 두 달 동안 홍성지역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조사가 이뤄져 500여 명이 이르는 신청서가 접수됐으며, 대법원 손해배상 결심에서 유족들이 승소판결을 받았다.
 

■광천 폐금광 유해 보도연맹 희생자 추정
홍성지역의 국민보도연맹사건은 1950년 7월 초 20~30대가 대부분인 홍성지역 남자 농민 보도연맹원들이 홍북면 상하리 용봉산 기슭에서 무고하게 공권력에 학살돼 광천 담산리 폐광산에 매장된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광천읍 담산리 산 93-1번지에 대한 발굴 결과 다수의 유해와 탄두를 발견함으로써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유해매장지임이 확인됐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좁은 동굴 입구와 2m 들어간 지점에 18구의 유해가 엉켜 있는 등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발견된 유해들이 엉켜있는 것으로 볼 때 폐광의 굴에서 살해됐다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폐금광 인근에서 살해됐거나 또 다른 지역의 어디에선가 살해돼 이곳에 옮겨져 암매장됐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 지는 대목이다. 발굴단 관계자들도 “탄피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동굴 밖에서 군경에 의해 사살된 후 안으로 옮겨 진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하고 “습기가 많고 물리적 손상도 많아 온전한 게 없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나쁘다”고 말하고 “희생자는 대부분은 20대와 30~40대로 모두 남성”이라고 밝혔다. 또한 “유품 등으로 볼 때 희생자들은 1950년 7월경 희생된 보도연맹원들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는 당시의 증언 등으로 추정해 볼 때 보도연맹원들을 홍성경찰서에서 트럭에 실어 용봉산 방향과 광천방면으로 갔다는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살해 방법으로는 뼈에 총상 흔적이 관찰되는 것으로 봐서 총살됐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증거라는 지적에 설득력이 있다.

발굴조사 결과 부위를 확인할 수 있는 뼈는 모두 233개로 머리뼈와 사지 뼈 등을 종합해 볼 때 최소 21개체로, 모두 남성이며 20대가 6명, 30대 8명, 40대 2명, 어른 2명, 불가 1명 등으로 분석됐다. 사지 뼈에 총상 흔적이 관찰되고, 머리뼈 부위에서 M1 탄두 1개 등 모두 2개의 탄두가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총기류(M1 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가늠된다. 탄두의 출토가 적은 점으로 보아 굴 밖에서 희생당한 후 굴 안으로 유기 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밝히고 있다. 특히 광천의 폐금광에서는 유해 외에도 단추, 가죽혁대, 고무신, 버클 등 30여점의 유품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병규’라는 이름이 새겨진 라이터가 출토되기도 해 살해된 사람 중에 ‘병규’라는 이름과의 관련자를 찾는 일도 과제로 남겼다. 이는 희생자가 누군 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유품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이와 관련해 안경호 상황실장(4·9 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희생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새긴 것일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특히 피해자 수에 비해 버클, 4열 단추, 고무신 등의 수가 적은 점과 발굴된 유품 등의 품질 등을 통해 종합 분석한 결과 “학살 시기를 무더운 7월 초, 직업은 주로 농민이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힌바 있다. 이곳에서는 1950년 6월부터 10월까지 2차례에 걸쳐 보도연맹원 및 부역 혐의 등으로 최소 6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살해돼 암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동조사단도 발굴된 유해가 주로 보도연맹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한 이유다.
 

▲ 광천 폐금광 동굴 입구에서 2m지점에 유해가 엉켜있는 모습.

■희생자 21구의 유해, 유품 수십점 발굴
광천 폐금광에는 1950년 6월부터 10월까지 보도연맹원 및 부역 혐의 등으로 30〜6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살해돼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09년 충남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결정서를 통해 “국가권력이 불법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것”이라며 “국가는 유족을 비롯한 국민에게 사과하고 위령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라”고 권고했다. 이후 시간은 흘러 2016년, 광천 폐금광의 발굴 현장은 가로 8m 가량의 굴에서 모두 21구의 희생자 유해와 수 십여 점의 유품이 발굴됐다. 공동조사단은 “아파트 한층 높이 정도로 복토된 흙을 파낸 뒤에야 폐광의 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폐금광 안은 “몸집이 작은 한 사람이 겨우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았으며, 폐금광 안에 퇴적된 돌과 흙을 파내는 데만 꼬박 8일이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낸 폐금광의 보존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동조사단 관계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인근에서 돼지 농장을 하는 토지소유주가 ‘여러 사람이 오가면 구제역 등 전염성이 있는 질병 방역에 어려움이 있다’며 현장 보존과 활용에 부정적 태도를 밝혔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6년이 지났지만 당시 군경에 의해 불법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의 유해는 전국 곳곳에 방치돼 있다. 한국전쟁유족회, 민족문제연구소, 4·9통일평화재단, 포럼진실과정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 2014년 2월 공동조사단을 발족하고 시민모금과 자원 활동을 통해 진주지역 보도연맹원학살사건, 대전형무소사건 희생자 등 매년 1곳씩의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유해발굴과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등 정부의 역할을 요구해 오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그로부터 7년이 지나도록 사과는커녕 희생자 유해마저 버려둬 오고 있다. 보다 못한 시민단체가 나서 지난 2014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결성, 시민의 손으로 유해발굴을 벌이고 있다. 이날 유해발굴은 ‘진주지역 보도연맹사건 희생자’와 ‘대전형무소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희생자’에 이어 ‘광천 폐금광의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발굴이 3번째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 집단 매장돼 있는 광천의 폐광산 유해 발굴지를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지만 토지소유주가 난색을 보이는 등 사실상 불가능 할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광천 폐금광의 유해발굴조사를 맡았던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은 지난 3월 6일 오후 광천읍 담산2리 산 92번지 폐금광 현장에서 이번 유해 발굴과 관련해 설명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박선주 발굴단장은 “전국에서 수많은 유해를 발굴했다”며 이 중에서 “이곳처럼 유해매장지가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은 드물다”며 “현장을 잘 보존해서 인권교육의 장 등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발굴조사 공동조사단은 지난 3월 8일, 유해 발굴 후 원상회복 약속에 따라 일단 발굴현장을 다시 메운 상태다. 일부에서는 이곳 광천 폐금광 매장지를 그대로 본떠 또 다른 보도연맹 피해자가 희생된 홍북면 상하리 용봉산에 재현하는 방안 등을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용봉산평화인권공원 조성 등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에 광천 폐금광 굴에서 발굴된 21구의 유해는 용봉산 골짜기에 마련된 ‘보도연맹희생자추모비’ 부근에 임시로 마련된 추모관에 안치하고 있다. 용봉산 골짜기도 광천 폐금광과 함께 1950년 7월 11일 정오경 최소 100여명 이상이 살해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며, 갈산면 행산리 이동마을 뒷산의 금광굴 등 세 곳이 대표적인 민간인 살해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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