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산골짜기 등 보도연맹 희생자 유해 찾고 추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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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골짜기 등 보도연맹 희생자 유해 찾고 추모해야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1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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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평화인권공원(가칭) 어떻게 조성해야 할까? <3>
▲ 용봉산의 보도연맹희생자추모비가 있는 오른쪽 골짜기가 당시 살해장소로 추정되며, 왼쪽에는 광천폐금광에서 발굴한 유해를 안치한 임시안치소가 보인다.

용봉산골짜기 60~100여명의 민간인 집단 처형된 것으로 추정
홍성내무서 감금 주민 월산리·소향리 붉은고개·용봉산서 희생
광천 폐금광 발굴 유해 DNA분석 등으로 희생자·후손 찾아야
발굴된 유해 훼손이 우려되는 심각한 실정, 국가·지자체 책임


 

홍성지역의 국민보도연맹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7월 14일 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요시찰인 수백 명이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살해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희생자 중 상당수는 좌익 사상과는 무관하게 좌익단체에 가입한 전력이 있거나 보도연맹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가입한 농민들이며 주로 20~40대의 청장년층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홍성지역 보도연맹 사건은 조사가 미비해 국가차원의 적절한 재조사가 요구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은 6·25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 등에 의해 민간인이 집단 희생된 사건이다. 1950년 7월 11일 홍북면 신경리 산79 일원 용봉산 골짜기에서 60~100여명의 민간인이 집단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홍성경찰서서 용봉산 골짜기로 끌려가
특히 홍성에서는 1950년 6월 28일경부터 학살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연행된 주민들은 홍성경찰서 상무관에서 며칠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용봉산 골짜기로 끌려갔다고 한다. 당시 홍성 쪽에서 트럭 1~2대가 용봉산 입구로 사람들을 실어 갔으며, 잠시 후 총소리가 들렸다고 전해진다. 이틀 뒤 현장을 목격한 증언자에 의하면, “두 명의 여성을 포함한 수십 구의 시신들이 있었다. 당시 생존한 아무개라는 사람을 통해서 거기서 죽은 사람들이 보도연맹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증언했다. 인민군의 후퇴 시기에도 주민피해가 발생했다. 홍성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 60~100여 명이 1950년 9월 27~28일 유치장, 월산리 등에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10월 2일에는 홍성읍에서 물러난 인민군 패잔병과 좌익이 갈산면으로 들어와 주민 3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국군이 홍성지역을 수복하자 홍성경찰서는 1950년 10월 7일 공식 복귀하여 부역자 처리를 시작하였다. 홍성경찰서 유치장은 당시 8개 동이 있었는데 각 동에는 70~80명이 갇혀 있었으므로 모두 500~600여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구금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민들은 홍성읍뿐 아니라 홍북면, 금마면, 갈산면에서도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분류에도 불구하고 이들 상당수는 소향리 붉은고개에서 희생되었다. 일부는 용봉산의 용봉사 절 입구 왼쪽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붉은 고개에는 큰 구덩이 3개가 있었으며, 100여 명에 달하는 시신들이 매장되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홍성경찰서는 1950년 7월 10일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 수감했으며, 다음날 새벽 중앙에서 내려온 특무대가 이들을 홍북면 용봉산으로 싣고 가 처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홍성경찰서장이었던 박헌교는 1990년경 지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서별로 예비검속한 사람들을 군청에 집결시켜 놓으니, 특무대에서 1차로 거물급을 포함해 20~30명을 트럭 한 대에 실어 이송했다”고 말하고 “이 때 보도연맹 사무국장 박종세(금마면 봉서리), 농민조합장으로 10월 혁명을 주도하고 도피하다가 자수해 보도연맹 선전부장을 맡았던 이강세(홍성읍 옥암리) 등이 떠났지. 다음날 2차로 남은 사람 모두를 트럭 두 대에 실어 특무대로 이관하고 경찰은 보도연맹에서 손을 뗐다”고 밝힌바 있다. 박헌교의 이러한 진술은 사실과 부합하는지에 대한 확인이 더 필요한 대목이다. 박헌교의 진술 내용 중에 이강세 등을 1차로 이송했다는 진술은 보도연맹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 등으로 보아 사실로 보이는 대목이다.

이강세가 예비검속된 것은 1950년 6월 27일 경으로 비교적 전쟁 초기이며, 이 시기에 검거된 사람들은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헌교의 주장대로 이 시기 실제로 경찰이 보도연맹에서 손을 뗐는지에 대해서도 당시 시대적 상황 등을 감안한다면 명확치는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점은 앞에서 밝혔듯이 용봉산에서 총살을 할 당시에 경찰이 트럭에 사람들을 실어 나른 점, 홍성지역 보도연맹원 살해에 특무대와 경찰이 관여했던 점, 이 과정에서 경찰은 특무대의 지휘를 받았을 것이란 점 등이다. 오히려 특무대 보다는 경찰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에 설득력이 더하기 때문이다.

▲ 광천 폐금광에서 발굴한 유해를 용봉산희생자추모비 인근에 안치하고 난 후의 유족대표들.

■홍성보도연맹 희생자 용봉산에서 수습
한편 홍성지역 보도연맹 진실규명자 중에서 용봉산에서 시신이 수습된 사람은 황은동, 장영환, 전천수, 황길동, 박봉석, 이관세 등이며, 시신이 수습되지 않은 박상화, 이강세 등은 박헌교의 증언대로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희생됐거나, 아니면 이송 도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당시만 해도 전쟁이 발발한 상황이었고, 계엄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군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장소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특무대 보다는 경찰이 오히려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장소적으로 볼 때도 계엄군이나 특무대는 홍성지역이나 충남서부지역에는 주둔부대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당시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계엄령은 7월 8일에 선포되었고, 7월 12일에 ‘체포구금에 관한 특별조치령’이 발동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무대가 전면에 나서기에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이르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경찰청과 과거사진상위원회에서도 일반적으로 헌병대나 특무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도 7월 중순 이후라고 보고 있으며, 또 그렇게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홍성지역에서도 실제 박아무개씨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의 시신을 용봉산골짜기에서 수습한 날을 기준으로 할 때 용봉산에서의 사살 시점은 7월 10~11일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그 때의 상황으로 볼 때 군인들이 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나 시간은 없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희생되었으며 어디에 어떻게 묻혀있는지 등 정확한 정황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종민(홍성읍 옥암리)씨는 “당시 교통이나 도로 상황 등을 생각한다면 경찰서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30분~1시간 이내)지역의 구릉이나 골짜기, 깊숙한 개울, 강가 주변 등지로 트럭 등이 드나들 수 있는 주변 일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아버지(이강세, 당시 홍성군농민조합장)의 시신을 찾으려고 큰 누이가 사방을 다니다가 대전에서 한보국(한용운의 아들, 당시 홍성군인민위원장, 지금의 군수로 이강세와 친구)을 만나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지금까지 세월이 흘렀다”고 안타까워했다.

 

■광천 발굴유해 국가·지자체가 해결해야
당시 홍성경찰서 외에도 각 지서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실상과 진실을 파헤쳐 기록으로 보존하는 것이 과제다. 또한 광천 폐금광 굴에서 발굴한 유해에 대한 희생자와 후손확인이 시급한 상황으로 대두되고 있다. 현재 발굴한 유해를 용봉산의 보도연맹희생자추모탑 인근의 임시안치소에 봉안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발굴된 유해의 훼손이 우려되는 심각한 실정이기 때문에 시급성이 요구되는 문제다. 실상을 모른 채 66년 만에 발굴한 유해를 놓고 후손을 찾는 작업까지 서로가 미루고 지연된다면 이는 후손된 도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만찮은 경비가 소요되는 DNA기법 등을 통해서라도 마땅히 희생자의 확인과 함께 후손을 찾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일이다.

이 문제는 정부가 앞장서 해결해야 하고, 정부의 해결에 시간이 걸린다면 충청남도, 홍성군이 우선적으로 해결할 시급성이 요구되는 문제다. 66년의 세월이 지난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마땅히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다. 정부가 미온적이라면 우선 충청남도와 홍성군이 나서서 해결하고 국가에 보상 등을 요구하는 것이 순리다. 이러한 기초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들이 하나하나 순조롭게 해결된다면 이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역사의 상흔을 교육하고, 기리기 위한 용봉산평화인권공원 등의 조성방안을 신중하게 모색해야 할 것이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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