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산내 골령골서 민간인 7000여명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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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산내 골령골서 민간인 7000여명 집단학살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2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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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평화인권공원(가칭) 어떻게 조성해야 할까? <4>
▲ 농지에서 공원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학살 암매장지 일원.

대전 ‘산내 골령골’에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추모공원 조성
월간 말지 1992년 2월호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을 공론화 해 
골령골 좌익정치범들 처형지 아닌 민간인 대규모 살육장소
2015년 2월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들 유해 발굴 작업 펼쳐


 

‘산내 골령골’로 불리는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원’이 조성된다. 대전시는 행정자치부의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원 조성 공모에서 산내지구 골령골이 사업대상지로 최종 선정됐다고 지난 6일 밝혔다.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원 등 대전형무소 수용자 수천 명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죽어간 민간인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전국의 희생자 유족들이 함께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공모를 통해 이곳을 추모공원 조성지로 선정했다.

행정자치부는 이달 중 처리심의위 의결이 끝나는 대로 산내 골령골을 전국 단위 위령 시설 조성 부지로 선정된 사실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이후 관할 자치단체와 협약을 체결한 후 내년 기본설계, 2018년 실시 설계 및 부지매입 후 2020년까지 준공(총 사업비 약 300억 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내년 예산안에 기본설계 용역비 2억 5800만 원을 기획재정부에 요구해 심의 중이다. 전국 단위의 평화 위령 공원은 온 국민이 찾는 품격 있는 인권역사 교육의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충남도내 8개 시군에서 민간인집단희생지가 산재해 있는 충남은 단 한 곳도 후보지 공모신청을 하지 않았다. 행자부는 애초 6월 한 달간 공모를 신청하다 8월 5일까지 신청 기간을 연장했었다.

 

▲ 1950년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산내학살기록 사진<미군촬영>.

앞서 행자부는 전국 위령 시설 건립을 추진하기로 하고 지난 3월, 유족대표 11명과 전문가 11명 등 22명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지난 6월에는 전국 자치단체를 상대로 후보지 공모신청을 받았다. 행자부는 공모신청 공고에서 대상지가 선정되면 이곳에 추모관, 인권 전시관, 상징물, 조형물, 평화공원 등을 조성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공모 결과 대전 산내 골령골을 포함, 모두 7개 후보지가 유치를 신청했다. 대전 동구청은 동구 낭월동 일대 10만㎡ 규모의 부지를 후보지로 정해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중 대전 산내 골령골은 파급 효과, 접근성, 역사성, 자치단체 의지 등의 평가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조성 부지로 선정됐다는 평가다.

따라서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 일대에 설계용역과 부지매입 절차 등을 거쳐 2020년까지 조성될 추모공원에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추모관과 유해를 모시는 봉안관, 민간인 희생사건을 알리는 교육·전시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또 이곳은 희생자 유족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 생태평화공원으로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대전광역시 김우연 자치행정국장은 “대표적인 민간인 희생지역인 산내지구에 전국을 대표하는 추모공원이 조성되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며 “산내사건 희생자 유족회와 시의회, 동구청 등 민·관이 협력해 대전에 유치한 만큼 추모공원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 대전산 골령골에 추모공원조성이 확정됐다.

■골령골, 한국군에 의해 7000여명 학살
“사격개시-! 그러면 사수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사격을 하면 골이 튀어나와 사수의 온몸에 튕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나지요. 사수가 물러나면 양쪽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단총으로 다시 확인사살을 하고,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지휘자가 또 다시 확인을 합니다. 그 다음엔 뒤에 대기하고 있던 소방대원들이 우루루 몰려와 시체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요. 그 후 기관단총 사수가 다시 두 번을 왔다갔다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2차 확인사살을 합니다.” <월간 ‘말’지 1992년 2월호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기사 중 발췌·인용>
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내초등학교 앞에서 옥천방향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산기슭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한국군에 의해 7000여 명이 집단학살 된 산내 골령골이 나온다.

대전 ‘산내학살 사건’은 월간 ‘말’지 1992년 2월호에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으로 공론화된 이후 오랜 기간 또 다시 침묵해야만 했다. 이후 1999년 12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던 산내학살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서 지역사회단체의 진상조사와 유족들의 증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것이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해제 된 문건은 ‘1950년 7월초 3일간 대전형무소 정치범 1800명이 처형됐다’고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사회단체들은 △목격자들이 ‘당시 열흘이 넘게 학살이 진행됐다’고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점 △유족들에 의한 제사가 7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는 점 △학살현장이 3곳으로 그 규모가 크다는 점 등 진상조사 결과를 토대로 최소 3000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2006년 4월 발굴된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지의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위닝턴의 증언록은 학살의 규모를 7000명으로 명시했다. 증언록은 학살의 마지막 순간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7월 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전선을 돌파하자, 7월 17일 새벽 남아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또 다시 시작됐다.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00명씩 37대 트럭분, 3700여 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모습.

■보도연맹원·대전형무소 재소자들 살해
결국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내려온 한국정부는 ‘폭동을 일으키고 적을 도울 우려가 있는 사람’에 대해 학살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7월초 3일간은 대전형무소 정치범 1800여 명이 집중 처형됐으며, 그 외 1200여 명이 7월 1일부터 보름에 걸쳐 대대적으로 총살당했다. 또한 금강전선이 무너지고 한국정부가 대구로 이전한 다음날인 7월 17일 새벽에 3700여 명이 마지막으로 학살됐다. “보도연맹원들이 1950년 6월 28일부터 사흘에 걸쳐 산내에서 희생되었다. 그리고 7월 1일 아침에 형무관 해산명령에 따라 피난을 갔다.”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란 1년지’ 대전형무소 형무관 이아무개의 녹취진술록, 1951년> 또한 신뢰할 만한 정보통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지시에 의해 대전과 그 인근에서 공산주의 단체 가입 및 활동으로 체포됐던 민간인 1400명이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대전에서 약 4km 떨어진 산에 매장되었다.”

<미 제 25사단 CIC 파견대의 전투일지 활동보고서 중에서>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산내학살 진상규명 활동 초기부터 취재를 했던 심규상 기자에 따르면 “정치범보다는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이 학살된 규모가 더 크다”며 “골령골은 좌익정치범들에 대한 처형지가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살육 장소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학살의 기준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모호해졌다”며 “나중에는 여성과 10대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심 기자는 골령골을 ‘죽음의 골짜기’ 또는 ‘유골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전시에서는 지난 2015년 2월 23일부터 3월 1일까지 산내 골령골(낭월동)에서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보도연맹이 아닌 사람도 무참하게 학살되어 매장된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을 펼쳤다. 유해 발굴 작업에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최로 대전 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제주 4·3희생자유족회 대전위원회,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대책위원회 등이 주관한 것으로서 발굴 작업과 유해 세척 및 분류 작업 등은 충북대학교와 영남대학교의 인류문화학과 교수들과 학생들이 참여했다. 발굴지역은 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 13-1번지로, 이 일대에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대량 학살(1차:6.28~30, 1400명, 2차:7.3~5, 1800명, 3차:7.6~7.17, 1400~3700명)된 700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의 유해가 묻혀있는 곳이다.

산내 낭월동은 지금은 2차선 도로지만, 예전에는 비교적 깊은 산골로 들어간 곳이었다. 그런데 발굴 현장은 땅을 2미터도 채 안되게 판 곳이 대부분이고, 사방 10여 평방미터 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만도 대단히 많은 유골과 금이빨, 신발 등이 나왔다. 땅 구덩이를 깊이 파지도 않고 많은 사람을 그냥 간단히 묻어 버린 것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곳 골령골의 유해 발굴 작업도 정부가 아닌 민간의 힘으로 이뤄졌다는데 아픔의 상처가 더하는 대목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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