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항쟁의 땅 우금티, 의병사의 젖줄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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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농민항쟁의 땅 우금티, 의병사의 젖줄 금강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0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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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9>

동학혁명 우금티 전투 견준산에서 가장 치열하게 벌여
홍주농민군·의병들 공주로 향하다 일본군에 처형된 곳
동학농민군의 패배, 일본군의 농민군 대학살로 이어져
송장배미, 우금티 전투 시체 산더미처럼 쌓여 묻은 곳

 

▲ 공주 우금티에 세워진 동학혁명군 위령탑.

우리의 근대사를 안고 흐르는 금강(錦江)의 곰나루를 앞으로 밀고 있는 공주의 두리봉산과 의병(義兵)들의 행적을 좇는 길에 반드시 건너야할 강이 바로 금강이다. 금강은 의병사(義兵史)의 모태가 되는 젖줄이기도 하다. 금강에는 공주를 남과 북으로 연결하는 공주대교가 걸쳐 있는데, 근대사의 자주적 분기점을 연결하고 있는 ‘동학혁명(東學革命)’의 강도 금강이다.

금강이 이고 있는 공주대교의 삼거리에서 부여방향으로 10~20분정도가면 금학동과 주미동의 경계에 있는 우금티(치)를 찾을 수 있다. 우금티의 너른 터에는 높이 6m, 너비 3~4m정도의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위세 당당한 풍채로 버티고 서있다. 아스팔트를 타고 이민면 쪽으로 걸어서 올라가면 일락산과 주미동의 주미산 사이에 움푹 패인 분지모양으로 공주시내가 내려다보이고 공주 쪽을 등지고서 바라보면 이인면의 널찍한 들판이 가깝게 내려 보이는 고개다.

주미동은 공주시로 편입되기 전까지는 주미리로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 농민군 공격의 전초기지였다고 한다. 위령탑 쪽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일락산이 있는데, 이곳은 일제시대 당시에는 ‘해가 떨어지는 산’이 아니라 ‘일본이 떨어지는 산’이라 해석돼 일본인들이 월락산으로 이름을 개명해 불렀다고 전한다. 아직도 공주지역에서 나이가 많은 주민들은 ‘월락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학혁명군위령탑의 중앙비문에는 ‘5·16혁명’이니 ‘유신’이니 하는 문구가 쓰여 있다. 그 뒤에는 ‘1973년 대통령 박정희’라는 이름과 함께 역사의 진실이 상징물에 의하여 왜곡되고 ‘민중의 피’의 댓가에 한낱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 광경이다. 비문의 글씨에 누군가 돌로 훼손시킨 듯 민중의식의 흔적을 남겼다. 한 주민은 이곳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이곳을 공주의 백마고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 우금티(치) 전적비 안내도.

■농민군 서울 진격 발판은 충청도 감영
황토현과 황릉촌전투에서 승승장구해 올라온 농민군은 전라도의 마지막 보루인 전주마저 무혈입성에 성공하고, 곳곳에 농민직접행동통치기구인 집강소를 둬 관이 주도하는 관아와 이원행정체제를 만들었다. 당시에 백성들은 관아보다는 집강소를 훨씬 많이 이용했다한다. 농민군은 원평·태인을 거쳐 삼례에 도착하니 그때가 9월 보름이 약간 지나서였다. 최시형과 정봉준의 이견으로 분리됐던 남·북접은 당시 백성들의 ‘반외세’와 ‘반봉건’의 요구로 이곳 충청도에서 통일을 이루어 연합전선을 폈다. 양반이 많아 수탈 받는 농민과 노비가 많았던 터이기에 ‘연합전선’을 펴기가 쉬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농민군은 전봉준과 손병희를 선봉장으로 하여 곡물·현물의 집산지이며 부자 농민이 많았던 강경에서 모였는데, 이때 농민군이 10만 여명이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많은 농민군들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발판은 충청도 감영이 있는 공주였다. 공주는 북으로 금강, 서쪽으로 봉황산과 일학산, 남으로 우금티(우금치, 전에는 넘기 어렵다하여 ‘개금치’라고도 했다)동쪽으로 주미산과 월성산으로 이루어져 삼면·사면으로 가로막힌 천연의 요새였다. 이에 농민군들은 이인에 머물면서 주미리를 통한 우금티를 주 공격로로 삼았다. 검상마을을 거쳐 곰나루를 지나 송장배미를 돌아 봉황산 기슭에서 감영을 치는 공격로 주봉과 견준산 사이 새재 공격로인 주미산과 효포를 통한 능치를 공격하는 공격로 등 다섯 가지 방법으로 공주를 포위하고 진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주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우금티 고개는 두리봉과 연결되고 앞에는 견준산이 버티고 있다. 동학군의 혁명 횃불을 사그러지게 한 우금티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우금티 고개를 넘으면 이인을 거쳐 부여로 닿는다. 우금티전투는 견준산에서 가장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때의 형세를 공주사(公州史)를 연구하는 구상회 향토사학자는 “견준산의 주인이 하루에 네 번씩이나 바뀌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점령했다가 관군과 일본군이 서로 뺏고 빼앗기기를 네 번씩이나 되풀이 했지요. 그러니 그 치열했던 전투에서 두리봉과 일락산 사이에 웅천천이 피냇물을 이루었고, 금강 물도 핏빛으로 덮었지요”라며 “주미산과 능치에서는 매일 밤 횃불을 들고 북을 치고 했었고 관군과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한 ‘허장성쇠’부대였지. 이때에 이 농민군을 보고 ‘황하사’ 즉 갠지즈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는 뜻으로 이야기를 했고 이것은 우금티의 허점을 노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결전의 날(1894년 11월 9일)은 다가오고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결사대’라 이름하여 우금티를 넘는다. 당시 서산군수였던 성하영 군대와 일본 모리오부대를 향해 돌진하지만 신병기와의 전투 지형상의 불리함으로 인하여 ‘보국안민’의 함성은 30만 농민군의 시체와 함께 산천에 묻히고 끝내 공주는 농민군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남는다.

우금티를 빼고라도 공주에는 공격로가 네 곳이 더 있었다. 특히 ‘새재’를 통한 공격로에는 “전에 소가죽으로 밥을 해먹었다는군. 네 곳에 기둥을 받치고 물을 부어 밥을 지었는데 이동이 심했던 농민군에게는 전투 속에서 터득한 지혜라 할 수 있겠지”라고 새재에 사는 한 농민은 말했다. 이곳 새재까지 농민들이 점령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곰나루 봉황산 기슭 쪽으로 돌면 ‘송장배미’라는 논이 나온다. 이곳 공격로에서는 공주영장 이기동 부대에 막혀 시체가 쌓여 모두 송장배미에 묻었다 하는데, 이곳에는 칠월칠석이면 송장배미 논의 주인이었던 이상필 씨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를 왜 지내느냐고 물으면 “뱀이 자주 나와 제사를 지낸다”며 당시의 시대상황이 ‘농민전쟁’을 ‘동학난’이나 ‘비도’ 등으로 여기던 때라 왜곡된 역사에 새삼 부끄러울 뿐이다.

■동학농민운동 최대 격전지 원혼 서린 곳
송장배미 논의 조금 위로 올라가면 ‘하고개’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살았던 김상만 옹의 증언을 구상회 향토사학자에게 간접적으로 듣자면 “길을 닦으려고 부역에 나갔는데 사람의 턱뼈가 한없이 나오더라는 거야. 바지게로 날라 수십 차례는 되었다는데 아마도 내가 보기엔 서산·홍주(洪州)지방의 농민군들이 공주에 입성하기 위해 ‘전주성’에서처럼 장꾼차림으로 들어오다가 ‘즉결처형’된 것 같아 당시엔 비상시국이라 장이 서지 않았다”며 긴 한숨을 내 쉰다. 당시 우금티 전투에서의 전사자를 ‘적시여산’이라 하여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결국 김상만 옹의 증언대로라면 당시 홍주(洪州)의 농민군이나 의병들도 공주로 향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던 것이다.

이렇듯 “동학농민군들의 사체(死體)처럼 쌓아올린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이곳에서 처형된 농민군들의 넋을 차곡차곡 쌓아올렸음을 웅변하는 듯하다”며 “최대의 격전지인 우금티에는 특별한 기념시설이나 선양사업은 없고 매년 열리는 위령제가 공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을 뿐 지역사회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이 지수걸 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전하는 얘기다. 우금티 견적지에는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있다. 우금티 전적지(국가사적 제387호·공주시 금학동)는 제2차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최대 격전지로 동학농민군의 원혼이 서려있는 곳이다. 우금티전투는 동학농민혁명의 승패를 가르는 전투였다.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 붙이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미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벱세울 앞산에 주둔시키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m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쏟아져 내려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과 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다. 우금티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그 뒤는 일본군의 농민군 대학살전으로 이어졌다. 우금티전투와 동학농민군의 패배요인은 무기의 열세였다.

당시 농민군의 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화승총으로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에 분당 2발을 발사하는 수준인데다 그마저도 갖지 못한 사람은 죽창으로 싸워야 했다. 그에 반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넘고 분당 12발을 쏠 수 있는 소총에다 막강한 화력의 미국제 개틀링기관포로 무장됐다. 기관포 사격을 받는 농민군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20여 년 전 ‘우금치’에서 ‘우금티’(동학농민혁명 당시 이름)로 바뀌었을 뿐, 1994년 사적지로 지정됐지만 조형물 몇 개만이 오늘도 현장을 지키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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