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천주교순교성지, 특징 세 가지는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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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주교순교성지, 특징 세 가지는 무엇?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0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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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8>
▲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전경(생매장 순교지).

박해 초기부터 병인박해까지 80여 년 동안 순교자 탄생해
예비신자들이 모범적으로 수계하며 순교했다는 특징 간직
한국천주교회 복음전파의 못자리이며 순교사의 거점 성지
전국에서 두 번째 많은 순교자 탄생, 충청도의 첫 순교 터

 

홍주지역에 천주교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84년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초기 순교자들인 홍주 응정리(현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 출신의 원시장(베드로)과 사촌 원시보(야고보), 홍주의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과 황일광(黃日光, 시몬) 등의 순교 행적에서 볼 때, 홍주지역도 이미 1780~1790년대에 예산·당진·보령·면천·덕산·청양지역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한 신자들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홍주지역에서 일찍부터 순교자를 탄생시키게 됐던 것이다.

홍주지역의 첫 순교자는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체포되어 이듬해에 순교한 원시장(베드로)이다. 다음으로 1797년의 정사박해(丁巳迫害) 때는 면천 여름이(현 당진시 면천면 대티리) 출신으로 감사의 비장을 지낸 방(方) 프란치스코와 2명의 동료, 그리고 박취득(라우렌시오)이 홍주에서 순교하였다. 이어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는 홍주의 백정출신 황일광(시몬)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윤 바오로와 한 토마스도 이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초기박해(1791~1801년) 때 홍주에서 순교한 신자는 모두 8명(1801년 순교자 김귀동을 포함하면 9명)이 된다. 이 중에서 원시장,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황일광 등 4명은 지난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홍주를 포함하여 내포지역의 신자들은 일찍부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신유박해와 1815년의 을해박해, 1827년의 정해박해 때에는 다른 지역에서 순교하는 홍주출신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된다.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도 홍주의 다락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출신으로 경기도 안양의 수리산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하다가 순교했다. 1812년에서 1839년 사이에는 홍주에서 순교한 신자들도 있다. 홍주의 배올(현 홍성군 홍북면 봉신리의 ‘배울’ 추정) 출신의 이여삼(바오로)이 첫 번째 순교자였다. 이어 1837년에는 홍주에서 김윤우(시몬)가 순교했고,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에는 덕산 청정이(현 예산군 삽교읍의 ‘창정리’ 추정) 출신 유 바오로가 홍주옥에서 순교했다. 또 홍주 다락골 출신의 최대종(요셉)도 기해박해 때 체포돼 홍주에서 옥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 홍주천주교순교성지 비문.

■홍주 순교성지의 세 가지 특징은?
첫째, 박해 초기(1792)부터 병인박해까지 8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순교자들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홍주순교성지는 기록상 212명의 순교자가 있고, 무명 순교자까지 거의 700여명이 순교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가 많은 곳이다. 홍주순교성지는 전국에서 공주 황새바위성지(250명) 다음으로 많은 유명 순교자(212명)를 배출한 곳이다. 교회 순교록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인 1866년에 51명, 1867년에 19명 등 모두 115명이 이 지역에서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관변 측 기록에는 102명(중복 기록자 17명)의 이름이 남아있는 등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만 212명에 이른다.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도 700여 명에 이르는 등 1000명에 가까운 순교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원시장(베드로), 방(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황일광(시몬)등 4명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되었다.

특히 충청도 첫 순교자 원시장(베드로)은 55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끊임없는 선행을 행하다 체포되어 옥중 세례를 받고 추운 겨울 몸에 물을 뿌려 61세에 동사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그의 행실을 보고 천주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방(프란치스코)은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식사를 받고 기뻐하며 유언을 남겼는데,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지만 사또가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섭리이자 은혜인데 어찌하여 그대들은 슬퍼만 하오. 만일 우리가 천당 가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오겠습니까?”라며 옥고를 치른 후 순교했다. 박취득(라우렌시오)은 곤장을 1400대나 맞아 다리뼈가 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숱한 고문을 받고도 죽지 않자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여 달라고 청하여 30세에 순교했다.

황일광(시몬)은 홍주의 천한 백정집안의 출신으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다가 천주교 신자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으면서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백정인 나를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말하고 참수 터에서 순교했다. 둘째, 예비자들의 모범 성지이다. 홍주순교성지는 예비신자들이 모범적으로 열심히 수계하며 순교했다는 특징이 있는 성지다. 예비신자들이나 신앙심이 약해질 때 새롭게 신앙심을 되찾는 은혜로운 성지라고 한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3년간 예비자로서 수계하며 복음을 선포한 원시장(베드로)이 신해박해 때 옥에서 세례를 받고 동사로 순교했던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장장 22년간이라는 예비자 생활을 하며 거의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순교하기 직전에 자기가 자신의 머리에 물을 붓고 하느님을 영접한 이여삼(바오로) 등이 순교한 ‘예비자들의 모범’성지이다.

셋째, 한국천주교 순교사의 거점 성지이다. 한국천주교회 복음전파의 못자리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권일신에게 세례를 받은 이존창이 예산 여사울에서 첫 선교를 하여 내포고을에 천주교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내포의 많은 신자들이 전국으로 피난을 가게 되어 전국에 복음이 전파된다. 그럼으로써 홍주순교성지는 복음전파의 못자리가 되어 조선의 전역에 천주교가 퍼져나가게 된다. 그 증거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장주교는 1891년 10월 전국을 8개의 본당으로 나누었는데, 이중 4개 지역이 충청도에 있었고, 그 중 2개 본당이 내포(상부, 하부)지역에 있었으니 그만큼 신자가 많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홍주는 한국천주교 신앙의 중심인 내포의 열개 고을을 관할하던 정3품 관찰사의 주둔지였다. 따라서 내포의 신자들은 체포되어 이곳 홍주 목에 압송되어 신앙을 증거 하다가 대부분 홍주 옥에서 순교하게 된다. 홍주 옥에서 교수형이나 옥사로 113명이 순교하였다.
 

■순교·증거·매장터 공존 특색 홍주성지
결과적으로 홍주순교성지의 특징이라면 첫째 전국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이 탄생한 성지라는 점과 둘째 충청도의 첫 순교 터(원시장 베드로)라는 점이다. 충청도 첫 순교자 원시장이 홍주 옥터에서 순교한다. 55세 때 천주교에 입교하여 자신의 것을 나누고 베풀며 끊임없이 선행과 사랑실천을 하다가 순교를 결심하고 옥에서 세례를 받고 추운겨울 끼얹은 물에 얼음덩어리가 되어 죽어갈 적에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고, 내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봉헌합니다”라고 마지막 봉헌기도를 바치고 45세로 동사해 순교했다. 마을 사람들은 원시장의 행실을 보고 하루 동안에 무려 30가구나 천주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셋째 다양한 순교 터(증거 터, 순교 터, 생매장 터가 한곳에 모두 있는 곳)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장소 세 곳으로는 첫째, 순교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당하던 홍주 진영의 동헌(옛 경사당, 지금의 한국통신 자리) 둘째, 홍주 목사의 동헌(옛 근민당, 지금의 홍성군청 뒤뜰) 셋째, 홍주성내의 저잣거리(지금의 홍성군예비군중대 터)는 순교자들이 조리돌림을 당하던 장소다. 또한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 터 세 곳으로는 첫째, 홍주 옥터로 113명(교수형 100명, 옥사 13명)이 순교한 최대의 순교 터이다. 둘째, 홍주성 밖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근처의 생매장터이다. 셋째, 홍주성 북문 밖 월계천과 소향천이 만나는 북문교 아래 100여m 지점에 있는 참수 터이다. 이 6곳의 성지는 직선거리로 1.2㎞정도이며, 걸어서 모든 곳을 돌아본다 해도 40여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홍주성지성당 전담 사제로 사목하고 있는 최교성 신부는 “홍주성지는 한 곳에 순교 터와 증거 터, 매장 터까지 있는 특색 있는 성지”라며 “이토록 거룩한 성지를 통해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삶을 증거함으로써 은총의 성지로 거듭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홍주순교성지 개발에 초석을 놓은 나기순 신부는 “홍주성지는 예비신자로서 순교한 분들이 많기에 특히 예비신자를 위한 성지로 성역화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홍주순교성지를 통해 박해자의 후손이 아니라 순교자의 후손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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