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곰나루와 우금티고개, 그리고 송장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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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곰나루와 우금티고개, 그리고 송장배미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0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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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20>
▲ 동학농민군들의 시신이 묻힌 송장배미(용못)에 세워진 추모 조형물.

동학군 공주감영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 웅진동 집결
동학농민군 공주전투 대패, 농민운동 실패한 결정적 계기
박산소 부근 전투, 농민군 수십 명 죽어 송장배미에 묻어
공주, 단군신화처럼 곰과 관련된 곰(고마)나루전설 전해져


올해로 동학농민운동 122주년을 맞았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제2차), 음력 9월의 전주·광주 봉기(제3차)로 나뉜다. 당시 농민들은 동학교조 최제우의 신원회복 문제 외에도 조선의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혼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1882년(고종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법에 의거하지 않는 형벌)이 도화선이 됐다.

부패척결과 내정개혁, 그리고 동학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이면서 서울시내 한복판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키는 빌미를 제공하고 이후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농민군 공주접전 패배 동학 결정적 실패계기
1894년 9월 재봉기 이후 동학 남접의 접주 전봉준은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정권에 항거하기 위하여 공주와 수원을 거쳐 서울을 공격하기로 정하고 북접과 연합전선을 이뤘다. 전봉준은 먼저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로 올라오다가 그해 10월 논산에서 손병희(孫秉熙)의 북접군과 합류했고, 이를 계기로 일시에 공주를 공격하기로 정했다. 한편 신정희(申正熙), 이두황(李斗璜), 허진(許璡) 등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정부군은 200여명의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공주로 향했던 것이다. 10월 23일 이인(利仁), 효포(孝浦)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이 벌어졌으나 농민군이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11월 초 우금티를 주 공격로로, 곰티·곰내·하고개·주미산 쪽을 보조 공격로로 정하고 금강 건너 유구 쪽에 농민군을 배치해 공주를 협공하기로 정했던 것이다. 11월 8일 총공격을 시작하여 정부군을 우금티로 몰자 조선군과 일본연합군은 뛰어난 화력을 가진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좌측과 우측에서 협공으로 농민군을 공격했다. 농민군은 공주의 남동쪽으로 후퇴하면서도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결국 제2차 공주접전에서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대패하고 만다. 전봉준은 계속된 조선군과 일본연합군의 협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농민군을 해산했고, 그해 12월 배반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됐다. 이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벌인 전투 가운데 최대 규모였으며 농민군이 크게 패배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사실상 실패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 공주의 동학농민 전쟁 전적지 송장배미 표지석.

■용못에 붙어 있는 논 ‘송장배미’의 한
충남 공주시의 시내에서 곰나루로 이어지는 길에 금강변 못 미쳐 웅진동에는 용못이라고 불리는 못이 하나 있다. 이 용못은 강물은 말라도 용못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전해지는 연못이다. 이 용못에 붙어 있는 논이 바로 ‘송장배미’이다. 이 논을 경작했던 이상집 씨에 의하면, “어른들 말씀에 농민군 18명이 이 논에서 죽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상집 씨에 의하면 지금은 작고한 이상필 씨와 가족들은 1973년 우금티에 위령탑이 세워진 뒤인 1979년까지 이 송장배미에 ‘무언(無言)의 고사(告祀)를 지냈다’고 전한다.

관군들의 기록에 의하면 “11월 9일, 송장배미 근처 박산소에서 이른 아침부터 공주로 넘어 오려는 농민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군 백락완이 기록한 남정록에 의하면 “박산소 부근의 전투는 매우 팽팽하여 육박전까지 벌어졌으며 이 싸움에서 수십 명의 농민군이 전사하였고, 송장배미에서만도 십 수 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공주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우금티전적지(牛禁峙戰蹟地, 사적 제387호)의 동학혁명군위령탑은 동학군이 공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쓰러져간 한을 풀어주려 한 듯하다. 우금티 고개 언저리에서 동학군의 유골이 출토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금티가 공주성의 인후에 해당한다면 곰나루에서 웅진동을 거쳐 일락산과 이어져 있는 봉황산을 넘는 길목은 목덜미에 해당하는 급소였다고 후세의 사가들은 전략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동학군은 공주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하여 봉황산 밑에 있는 웅진동에 집결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학군은 마치 병목과 같은 이 지역을 통과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동학군의 주검은 계곡을 가득 메웠으며, 피는 곰내를 적시고 금강까지 붉게 물들였다고 전한다. 봉황산 뒤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죽어간 동학군의 주검은 한곳에 모아 매장했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송장배미’라고 하는 논이었다고 전해진다. 주봉자락이 곰나루로 달리다가 멈춰 선 곳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공주시 웅진동이다.


■곰과 나루를 뜻하는 웅진, 한글로 곰나루
우금티에서 송장배미로 가기 위해서는 서쪽으로 가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웅진로를 달려 공주고등학교를 지난 후에 중동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무령로가 나온다. 이곳은 교동의 하고개로 불리며 오른쪽에는 공주향교가 있음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나온다. 이곳의 지명인 하고개도 서울과 공주를 비롯한 청주·강릉·전주 등의 교동에도 향교가 있다. 아무리 지체가 높은 사람이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하는 하마비가 향교 입구에 있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하고개를 넘어서면 무령로와 왕릉로가 만나는 모서리에서 ‘송장배미’로 불리는 ‘용못(공주시 향토문화유적기념물 제4호)’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1894년 가을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였던 우금티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밀린 농민군이 무수히 죽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는 곳이다. 전투에서 죽어간 동학군들의 시체를 전부 다 처리할 수가 없어서 였는지 이 연못에 시체를 넣었다는 장소인 만큼 민초들의 한을 담은 조형물에서도 서글픔이 묻어나는 듯하다. 연못 앞에는 공주금성여자고등학교가 있다.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송산리고분군(公州宋山里古墳群)은 송장배미에서도 가깝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백제의 고분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인 송산리는 은진송씨들이 살던 마을의 지명이라 전한다.

공주 공산성의 최병옥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공주는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지역이었고, 마한지역에는 가장 크고 번성했던 목지국을 비롯해 봉건제 국가가 54개나 되었다. 백제시대에는 지명이 곰과 나루를 뜻하는 웅진(熊津)으로 한글로 쓰면 곰나루였고, 단군신화처럼 곰과 관련된 곰(고마)나루 전설이 전해져온다”며 “옛날 강 건너 연미산으로 나무하러 갔던 나무꾼이 여자로 변신한 암곰을 따라 굴속으로 들어갔다. 곰은 나무꾼에게 좋은 음식을 주며 보살폈지만 굴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아놓아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세월이 흘러 자식이 두 명이나 되자 안심한 곰은 굴 입구를 돌로 막지 않고 사냥을 나갔다. 굴을 빠져나온 나무꾼이 헤엄쳐 강 건너편에 도착한 것을 뒤늦게 알고 곰은 돌아올 것을 애원했으나 나무꾼이 들어주지 않자 두 자식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때부터 배가 이곳을 지날 때면 풍랑이 일고 변고가 생기자 곰 사당을 지어서 곰의 영혼을 위로했다”는 설명이다.

공주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비참하게 패배해 1602년 충주에서 충청감영이 이전한 후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질 때까지 330여년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졌던 충남도청이 80년 대전시대를 마감하고 지난 2012년 동학의 땅, 의병의 고장인 천년역사의 홍주 땅에 천년의 새둥지를 틀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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